어떤 사람은 전도를 하면서 이런 말을 많이 한다.
그냥 전도를 하면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라던 안 자라던 그건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에 상관할 바가 없다.
목회자들 중에 이런 식으로 말하시는 분을 여러분 봤다.
과연 그럴까?

예수님이라면 그러셨을까?
아니면, 신앙의 본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의 목숨같이 사랑하셨다. 배반할 줄 알았던 가롯 유다도 끝까지 품으셨다.
바울은 그의 삶 속에 그가 복음을 전했던 사람을 끝까지 품고 목숨같이 돌보며 사랑했다.

그런데 오늘날?
왜 전도를 강조하면서 그냥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라고 하면서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나갈까?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일까?
난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린양 한마리가 방황할 때도 그 어린양 한마리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목자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그리고 탕자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 마음이 우리 믿는 사람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막무가내 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게 하고 그러면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직까지 내게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의 부류이다.

막무가내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드는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고린도 전서 3장의 말씀이다.
3:6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3:7 그런즉 심는 자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위의 성경 구절이 과연 어떻게 하든지 예수만 입으로 시인하게 한다면, 자라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사람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으니까 하나님이 이끄시겠지라는 말을 정당화하는 구절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고린도 교회는 분란이 많았다. 바울은 서로 한 가지 목적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데 합력하여 최선을 다하길 원했다.
하지만, 또한 고린도 교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정말 목숨을 아끼지 않고 협력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볼로와 바울처럼.
바울은 3: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님의 밭이고 집이라고 말한다. 서로 합력하여 밭을 일구고 서로 합력하여 집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러한 동역자들은 심고, 물을 주는 것을 서로 협력해서 열심히 했던 사람이다. 물론, 이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다. 그들이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서 그들은 겸손한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이 구절들 자체가 복음을 전하는데, 그냥 전하기만 되며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잘 되겠지라는 식으로 방치되는데 이용되는 말은 절대 아닌것이다. 모든 사람이 합력하여 성령의 인도아래 전인격적으로 헌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요는 책임성 있게 복음을 전했으면 좋겠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전인격적으로 대하여서 끝까지 품고 사랑하신 예수님의 삶을 따라 끝까지 품고 사랑하는 자세로 복음을 전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부담이 되니까 단순히 영접기도 시킬려고 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 아니다. 바른 자세가 아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흥에 대한 환상...  (0) 2006.12.07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  (0) 2006.09.22
경험해 보는 것  (0) 2006.08.28
권위에 대해서  (0) 2006.08.27
성경 공부 방법에 대해서...  (0) 2006.08.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