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길 가면서 생각들을 해 본 것이 있어서 적어봅니다.
얼마전에, 신대원 동아리 아나톨레에서 담당 간사 목사님께서 하신 이야기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이 나왔을 때, 친히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그들의 연약함을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전엔 장애를 가지셔서 휠체어 생활을 하시는 한 목사님이 채플에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누가복음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은 그냥 병들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솔직한 상태가 기록되어 있다고... 거기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까지 자신의 상태에 대해 포장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씀...

그러면서 내 자신을 한 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변에서 누가 가난하다고 병들어 아프다고 하면 뭐라고 하나?
흔히 쉽게,
기도하겠다, 그런 가난함들에는 병듦에는 다 영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이런 말을 너무나 자주 해 왔던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이 찾아왔을 때  육체적인 것이 낫는데 관심을 가지지 말고 영적인 것에 더욱더 관심을 가져라 이렇게 하셨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병든자를 고쳐주시고 또한 영적인 의미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누가 힘들다고 하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형태의 영지주의(육에 속한 것은 무조건 나쁘고 영에 속한 것만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형태의 사상)에 물들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은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육적인 우리의 생활도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성육신의 비밀이 여기에 감추어진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선 실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돕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도 이런 맥락에서 가난한 자를 직접 돕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기독인들의 목표라면
영육간의 조화가 나타나도록 이 땅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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