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랫동안 글을 못 올렸네요.
사실 설교문을 이 사이트 말고 다른 사이트에 올려 왔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글을 못 올려서, 딱히 쓸 말도 없고 해서 지난주 주일 청년부 설교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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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련회가 끝났습니다. 수련회 동안 느꼈던 것은 수련회 자체보다 수련회를 준비하는 동안 또는 수련회 기간동안 여러모로 도와주신 분들이었습니다. 수련회에 다른 교회에서 참석하신 분들도 많이 있었는데,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나요? 이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저에게는 여러분들이 그 어떤 교회의 사람들보다 아름답고 소중하게 보였습니다. 외모도 그렇고, 성품도 그렇고, 여러분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참 감사했습니다.

 또한 감사했던 것은 수련회 때 강의를 해 주시고 찬양 인도를 도와 주셨던 분들입니다. 강의에 와 주셨던 분들은 제가 군대 시절에 만났던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의 믿음이나 삶에서 얼마나 주와 동행하였는지를 제가 보았을 때, 많은 힘을 얻고 혼쾌히 어려움들을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했을 때 도와주는 모습을 보면서, 또한, 수련회 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모습을 보면서 제 안에 드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은 사람에게 있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살펴보면 복 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함에 있어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복에서도 마찬가지이죠. 우리는 복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우리가 추구하는 사람 자체보다 무언가 얻기를 원하는 대상적인 것이 떠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직장을 잘 얻고 또 거기에서 성공하는 것, 공부를 잘 하는 것, 명성을 많이 얻는 것 등등 우리가 복을 생각할 때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이런 것들 보다는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 자체가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공급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을까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지요.

 창세기 12장을 우리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가 복이라라고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람 자체에 우선적인 관심이 있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또한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거룩하게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 가운데 충만하여 곧 그들이 복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데 이르는 것이라고 우리는 정리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 사람들이 복인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선교사님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디를 가서든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일 자체가 아니라 바로 사람이다. 사람을 섬기며 사랑하며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추라.

 정말 맞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 보다도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여러분 자체에 관심이 있으시고, 여러분 자체를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고 우리 자체가 본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수단이 우리 존재 자체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고 그렇게 취급당할 때 영혼의 깊은 상처를 입기 쉽습니다.

 결국 그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잘 해 주었던 점이 나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유익을 나로부터 얻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토록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 자체에 있음을 가르쳐주며 우리의 본질도 결국 하나님 자신을 알아가는 데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1절에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이 아니하고와 같이 여기서도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라는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하나님을 자신을 알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알아가고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수련회에 참석했던 분들은 묵상 강의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묵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꼭 나오는 부분이 시편 1편의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 이런 사람이 복 있다고 합니다. 묵상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도 역시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1차적인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내가 원했던 무언가를 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묵상을 하시는 분들은 묵상이 진정으로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시는 분입니다.

묵상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알아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성품을 알게 되고 나를 향한 계획과 사랑을 알게 되고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의 뜻을 적용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럴 때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기쁨이 거하게 되고 열매맺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하다보면 상대방을 알아가는 기쁨이 참 즐겁습니다. 그 사람의 작은 행동 하나 하나도 눈에 들어오게 되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며 즐거워합니다. 물론, 사랑이 식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작은 행동조차 보기 싫지만요.

오늘 본문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그에게 기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으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을 알아가는 데 어떤 예수님을 여러분들은 말씀을 통해 만나시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구체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추상적으로 그냥 좋다, 이런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그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표현들을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자기는 내가 왜 좋아? 어, 이쁘니까?

자기는 내가 왜 좋아? 어,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 안에 사랑이 많이 느껴져, 그 사랑이 나를 따뜻하게 해.

어떤 것이 더 감동스런 표현입니까?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더욱더 풍성히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기쁨인지 그것을 우리는 말씀 묵상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는 예전 설교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껌을 chewing 하는 것입니다. 소가 되새김질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우리 삶 가운데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상상해 보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저는 촌에서 자라서 자연들과 더불어서 살았습니다. 메뚜기 잡으러 다니고, 송사리 잡고, 소 울음 소리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데서 발을 담그고 장난도 치고 그러면서 자랐지요. 시냇가에 심은 나무 생각만 해도 웃음을 자아냅니다. 얼마나 아름다고 따뜻한 모습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삶 가운데 열매가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삶 속에 열매가 맺힙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온화하며 하나님을 아는 기쁨과 즐거움이 삶 속에서 넘치고, 더욱더 삶을 향한 열정과 하나님 안에서의 인내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보면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현대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 해 놓았습니다.


5:22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지배하실 때 그분은 우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진실,

5:23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라는 표현도 직접 여러분들이 수분을 잘 공급받는 잎사귀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잎이 수분을 머금고 있어서 촉촉하며 파랗게 빛나는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매들 같은 경우에도 피부에 수분을 공급하기 위해 어떤 화장품이 좋은가 관심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피부에 수분 공급이 잘 되면 피부가 아름답고 촉촉하지요. 참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뿌리 박고 그 안에서 살아보십시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 이 부분의 표현은 우리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형통하다는 것은 잘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에는 단순히 잘 된다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다 형통하다고 이야기하는데, 하는 일마다 다 성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였던 다윗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모든 일마다 소위 잘 되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형통하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근원의 목적이 하나님 안에서 잘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위 말씀에서 우리의 관심은 뒷부분에 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표현일 뿐이고, 인사의 말에서 크게 더 의미있는 표현은 아닙니다.
이처럼 형통은 영혼이 잘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시편 1편에 적힌 형통이라는 표현은 요셉에게 쓴 표현과 같은 표현인데,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있지 않았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요셉이 형통하였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창세기 39:2-3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의 상황들을 보면 노예로 팔린 상황은 소위 말해서 우리가 기대하려고 했던 잘 된 상황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그 삶 속에서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라는 표현이 먼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형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에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에 나오는 이 고백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진정한 형통의 고백인 것입니다.


찬송가 495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얼굴 뵙기 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예수 모신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과의 동행이 바로 형통함을 의미합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워도 형통하였습니다.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모습을 보면 그닥 경제적으로 잘 살지 못해서 사람들이 보면 형통하지 않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제 삶이 주 안에서 형통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형통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영원한 생수가 흘러나와 우리가 복이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오히려 우리가 복이 되어 그들이 생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아브람이 복이 되고 아브람을 통해 민족들이 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편 6절을 봅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모든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은 관심이 있으시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부르시고 그의 삶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를 하나님은 순간 순간마다 살펴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결국의 길은 허무함과 생명없음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더더욱, 우리가 복이 되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생명이 가득한 사람들이 되도록 복의 진정한 의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람들로 하나님을 알게 하여 복된 사람들이 이 땅 가운데서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찬양 부릅시다.

찬송가 495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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