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4: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4: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4:9 내가 생각하건대
-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무언가 어려움을 겪게 될 경우에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들, 내가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들을 겪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생긴다.
 내가 생각하건대라는 표현을 하나님께 대해 쓸 날들이 우리 인생가운데는 많다.
4:10
-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는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게 만들고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일이라는 것을 알 때 그런 회의와 물음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해 볼 점 :
내가 생각하건대 나에게 왜 이런 어려운 일이 닥칠까? 라는 의문이 생길 때
점검을 해 볼 것들이 있다.
그리스도 때문에 이런 일들이 닥친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나의 욕심으로 인한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우리는 어려움에 대해 자책하거나 자신의 신앙 문제로 돌리는 등의 좌절 속으로 자신을 집어 넣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왜 이런 상황이 내게 닥쳐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신앙의 나쁜 표현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며 성경적 질문이다.
예수님도 이런 질문을 본인에게 스스로 하실 때가 있으셨다.

4:10-13
대조의 표현들
- 신앙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 뜻을 아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고난이 있지만, 자신의 고난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그만큼 하나님 안에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산다면 인생이 겉보기에도 잘 풀릴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잘 풀리지 않아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인정 못 받고, 후원도 못 받고 자기가 스스로 수고하여 돈을 벌고 그것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써야 하는 경우도 있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비교하게 된다. 나는 죽도록 고생하여 이 정도로 성장하였는데, 저 사람은 기도 한 번 하니 어디서 재정도 흘러들어오고 하나님이 다 채우셨다 고백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좌절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와 다를 때가 많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라 간다는 것은 인정 못받고 고생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자신이 대접 못 받는 것에 대해 스스로 좌절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 봐야 할 점들 -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어떠하셨는가? 제자들, 사람들을 돌보면서 정작 자신은 굶주리실 때도 많으셨고, 쉬지 못하실 때도 많으셨다. 머리 둘 곳도 없으시고, 고난의 길을 묵묵히 가셨다.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4:14
바울은 사랑안에서 권면하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이 본이 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정도도 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스스로의 자괴감을 가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무슨 충고나 무슨 훈계도 사랑안에서 하지 않으면 오히려 해를 끼칠 때가 많이 있다.
사랑안에서 권면하는가?

4:15
스승과 아버지
일만 스승과 아버지의 대조
대조 되었다는 것은 은연중에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만 스승보다 아버지가 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복음안에서 자녀를 낳았다라는 말은 무엇인가?
스승은 아마도 삶의 방향성을 충고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번역본에 보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을 스승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살다보면 스승같은 사람들은 많다. 특히나 교회에서 충고를 해 주려고 하는 사람은 정말 많다.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그렇게 살면 안되는 거야, 그건 옳지 않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정말 그 어려움을 헤쳐나오도록 자신의 것을 희생하며 시간 내고 기도해주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다. 또한, 단순히 가르침을 주려는 사람은 많지만, 제자를 삼아 신앙 안에서 성장하도록 열정을 다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일만 스승보다는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제자 삼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멋있어 보이는 말 한마디를 날리는 스승인가?
고린도 사회에서도 스승은 많았다. 그러나, 복음안에 서도록 눈물로 양육하고 섬기는 아버지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17절에 디모데를 아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로 양육하였듯이,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자녀인 디모데들이 많이 나타나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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