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바알을 섬길 것인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알은 풍요를 상징하고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상징했던 우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창조된 목적대로 에덴의 가치관으로 회복시키길 원하셨습니다. 물질에 사로잡혀서 노예가 되어 버리는 인간, 죄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파괴적인 곳에 방임해 버리려는 인간들을 구원하길 원하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너희가 바알을 따를 것이냐, 하나님을 따를 것이냐 선택하라고 하였으며, 그 질문을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예수님께서도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가장 강력한 사단의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물질을 숭배하는 가치관입니다. 신자유주의 사상에서부터 시작하여서 사회나 교회 안에서도 물질을 숭상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돈이면 대접받고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돈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우쭐해 하는 모습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제만 살리면 이 사회를 살릴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 어디를 통틀어도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가치관이 절대 아닙니다. 아무리 경제를 살리더라도, 사회 안에 도덕성이 없으면 그 도덕성 없음으로 인해 얼마나 경제적인 손실이 있는지 모릅니다. 즉, 경제만 살리면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 본질적인 해결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모 그룹의 총수였던 사람이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집행 유예 선고를 받았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드러내는 하나의 사건이며, 또한 이 나라의 가치관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삶에서 열매가 나타날 수 없고 기독교의 가치관이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열매와 가치관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과연 기독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모 단체에서 무조건 기독인이라고 당선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한국 뿐 아니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넓게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인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모든 사람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논리에서 이 땅의 기독인들이 벗어나길 원합니다.

'Intimacy With Go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교의 자유  (0) 2008.08.26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0) 2008.08.14
성찬의 은혜  (0) 2008.07.07
with Mike and Andrew  (0) 2008.06.30
믿음은 선포다.  (0) 2008.06.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