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성찬

 

고린도전서 10:16-17 공동번역

10:16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0:17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최고의 식탁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도 이 질문에 생각해 보면서 나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식사 자리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 나서 저는 색다른 경험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학부모들과의 식사자리였습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저는 모든 것이 새로운 자리였습니다. 그 때 쇠고기를 구워먹었는데, 아마 굉장히 좋았던 쇠고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입에서 살살 녹는 쇠고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자리를 최고로 칠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최고의 식사자리였다고 기억되는 것은 어머님이 차려주신 식사자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난주에 사정이 있어서 고향집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고향에 가면 참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손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어머님께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들여 준비하시고 온갖 과일들과 맛있는 것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저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며 tv도 보고 있고, 책도 읽고 식사가 차려지면 우와 하는 탄성과 함께 이 모든 음식을 먹습니다. 먹고 나면 설거지도 어머님이 다 해 주시니 그야말로 기분 최고인 식탁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찬에 대해서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빵을 떼는 것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잡히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베푸신 그 성찬은 참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도 일년에 여러 번 성찬식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잘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찬은 하나님 은혜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 지성소까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차례(횟수로는 4번정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성경에는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식서인 <장로들의 유전> <미쉬나>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하여 이런 규칙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되고 첫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지성소 법칙을 몰라서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발목에 끈을 매고 들어 가야 합니다. 혹시 죽으면 잡아 당겼습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자기를 정결하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는 하나님의 절차가 아닌 다른 절차를 따라 들어갔을 땐 죽게 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선 엄청난 정도의 거룩함과 성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고 하셨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동안 정결케 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보았지만, 제사장들과 기타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결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보았다가 존재가 멸망당하는 위험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기드온과 같은 여러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자를 만날 때 내가 죽게 되었다고 걱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다른가? 구약에서는 율법을 주시면서 지킬 것을 말씀하시는 어찌보면 하나님은 두렵고 공포의 대상인데,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을 과감하게 버리고 신약에서 나오는 참 사랑의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사에서 이단의 한 형태로 나온 주장이기도 하며 오늘날에도 여러 이단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에는주어진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다음의 것을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은혜와 배치되지 않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먼저 은혜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면서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집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사건입니다. 율법보다 먼저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왜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는가에 대한 부분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필요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다음의 것이 하나의 큰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자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따르면 얼마나 좋을까요?

솔로몬은 젊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고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하며 잠언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자기가 아는 대로 그대로 실천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전도서 2장 3절에는 솔로몬이 인생을 헛되게 보낸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3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하여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하였고 하나님이 지혜를 줍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서 궁금함이 많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일까? 이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까? 더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없을까 하고 자신을 술로 즐겨보기도 하고 부로 즐겨보기도 하고 각종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기쁘게 한다는 것으로 자신을 채워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늘그막에 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전도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서 12장 1절에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늙어서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겠다고 결론 내리는 것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봤으니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지, 인생에 참된 의미를 주는지를 깨달으라고 솔로몬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그 생활이 최고임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선택을 능히 압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 때 그것이 진짜 기쁨을 주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한국의 남자들은 나이가 되면 국방의 의무를 지게 됩니다. 신기한 것은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기전이나 갔다 온 후나 부모님의 사랑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변함없이 자식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시고 정성들여 자식들을 섬겨 주셨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부모님께서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기 전까지 부모님의 사랑을 모르고 군대에 가서 정말 고생하며 인간적인 대접을 잘 못 받고 명령으로 사는 군대라는 조직사회에서 부모님을 생각해 보니 얼마나 헌신적이었고 사랑이 많으셨는지를 느끼게 되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많은 젊은 청년들이 결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대하면 부모님에게 잘해야 겠다 이런 것입니다. 떠나봐야 받았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다시금 결단하게 됩니다.

이제는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자신의 힘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니었음을 가르쳐주는 도구로, 또한 하나님이 그냥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가르쳐주는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로마서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기독교의 은혜를 가장 잘 표현한 비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떠나 탕자가 방황하다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먼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탕자가 떠나도록 재산을 떼어 줬다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는 능히 자신의 재산을 당장 주지 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 안 듣는 자식에게 앞으로 영원토록 재산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재산을 떼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보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식이 떠나봤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더욱더 알 수 있기 때문이며, 사랑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어머니께서는 저의 잘못된 점을 고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제가 잘못했을 때 바로 벌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참 많이 맞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쩔 때는 제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내버려 두신 적이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선 아주 따끔하게 혼이 났습니다. 왜 시간을 두고 벌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을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참으시고 벌을 보류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바로 주어졌을 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율법을 통해 인간이 처절하게 자신이 한계를 가지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교훈으로 삼기 위해 구약의 그 오랜 기간들을 하나님은 끈기를 갖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느낄 기간을 찾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 아주 오랜 기간이 흘렀습니다. 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될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이후에 바로 은혜의 결정적인 순간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일방적으로 베풀어졌지만, 인간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겠다고 에덴을 뛰쳐나갔고, 또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도 완전함으로 깨끗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힘들게 살았던 시간들 속에 그것이 인간의 총체적인 실패임이 드러났을 때, 바로 은혜의 완전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세워두신 율법의 원칙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 지키고 나아가려고 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 한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 모든 한계를 깨뜨리시고 예수님의 식탁으로 사람들을 조건 없이 초대하였고 어떤 노력도 없이 예수님이 베푸신 그 정성스런 식탁아래서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탁에 참여한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세리 삭개오도 율법으로는 절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지만, 예수님이 뽕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내가 너의 집에서 같이 식탁을 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은혜의 자리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들과 함께 하셨고, 가난한 자들, 창녀들과도 같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짐들을 대신 지시고 용서하시고 그들과 식탁을 같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탁이었던 최후의 만찬의 순간으로 돌아가보려고 합니다. 흔히, 최후의 만찬 그 자체만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최후의 만찬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된 줄 아시고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시면서 바로 행하셨던 것이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위해 준비하신 것들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끝까지 이 사람들을 사랑하겠다. 마지막으로 발을 씻겨 주고 떡과 포도주를 통해 나의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그리고 나서 14장에는 그냥 이 사람들을 세상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어 항상 같이 있게 하겠다. 얼마나 따뜻합니까? 저는 이 식탁을 생각할 때마다 어머니의 식탁이 떠오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처음과 끝이 되신 하나님 항상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태초 전 부터도 우리를 향한 이 예수님의 식탁 준비와 같은 사랑을 하셨으며 지금도 동일하십니다. 단지, 우리들이 그 사랑을 거절하고 이해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그 품을 떠나갔을 뿐입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이나 신약에서의 하나님이나 같은 분이시고 태초부터 우리를 향한 은혜를 표현하신 분이셨으며, 율법이라는 과정을 지나는 동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계획하신 분이셨습니다.

[히13:8]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순종하므로 그들이 40년동안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그 벌을 내리시고 하늘 위에서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벌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계시며 광야를 지나시는 모습을 신명기 2장 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보통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벌을 주는 경우 교사는 그 벌을 같이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벌로 40년간을 광야를 헤매게 하셨지만,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계시며 40년 지난 후에 내가 다시 함께 가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40년간의 광야의 방황을 같이 담당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모습과 오버랩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들이 자신의 죄악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육체로 이 땅 가운데 자신이 직접 그 모든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르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분명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오래 참으시는 그 사랑이 공의와 정의보다 더 크므로 우리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 놀라운 식탁으로 하나님의 초대가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획되었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품에 안겨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의 떡과 포도주를 받아 마시며 감사함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식탁을 베풀어 주신 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을 인간들에게 하셨습니다. 죽음으로 사랑을 세상 끝날까지 표현하시고 그 사랑을 알기를 마지막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얼마나 더 하나님이 무엇을 하셔야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아니하고 받아들이게 될까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을 통해서 마지막까지 사랑을 표현하셨는데 아직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찬식에서는 어떤 사회적 지위나 성별이나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떡과 포도주가 나누어집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은혜의 식탁입니까?

이 은혜의 식탁, 사랑의 식탁, 인간을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의 준비를 기억하고 사랑의 준비 후에 십자가 지신 그 끝없는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그 성찬의 식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복이 한량없이 임하는 놀라운 하나님과의 두려움 없는 교제의 자리인 것입니다. 기쁨의 자리인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와 하나님과의 어떤 장막도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임해야 할 것이고, 우리 삶 가운데도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전에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또 하나의 식탁을 살펴보며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요한복음 21:9-13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1:9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21: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 오너라."

21:11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21:12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1:13 예수께서 가까이 와서 빵을 들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또 생선도 주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가 어부였던 사람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못 잡고 날이 밝았을 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정말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제서야 주님인 줄 알아본 제자들이 육지로 올라가 보니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생선과 빵을 구워 놓고 아침을 준비해 놓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빵과 생선을 집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식탁입니까? 예수님이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언제나 은혜로 섬겨주시는 어머니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그 정성과 섬김의 자리, 이 자리로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식탁에 아무런 조건없이 감사함으로 참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그냥 일방적으로 베풀어두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사랑의 식탁으로 초대하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며 사랑한다 말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외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고 풍성함의 길인지를 깊게 알기를 원합니다. 방황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평생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겨서 그 사랑을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자로, 주님의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의 식탁에 같이 참여할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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