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united kingdom 에서 왔고 Irish 임을 강조한다.
알다시피 영국은 연방국가이니까...
영국계 통신 분야의 가장 좋은 대학 중의 하나를 졸업했으며, 제일큰 통신 분야의 회사에 manager로 스카웃 되었던 사람이다.
나보다 나이 많아보이지만 한살 어리다.
그런데, 하나님이 중국에 대한 마음을 그에게 주셨고 선교사로 살기로 결정한다.
또,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에서는 너무 아쉬워서 대접을 더 잘 해 준다고, BMW 좋은 차도 주고, 집도 준다고 했는데 다 고사했다.
많은 연봉과 좋은 환경을 팽개치고, 페낭으로 와서 SOFM School을 하고 나와 보경 자매와 함께 SBS를 같이 했다.
SBS를 하면서 당장 살 돈이 없어서 struggling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럽긴 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신기하게 알 수 없는 많은 재정이 Robert에게 채워지는 걸 보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린 그를 로보트라고 부른다.
좌우지간...
그의 삶이 기대가 된다.

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재주도 굉장히 많지만
언제나 찬양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사랑이 넘쳐나는 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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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내려놓음의 문제입니다.
권리포기란 말로 많이 불리고 있지만, 내려 놓음이란 말이 더더욱 좋은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면,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 것이므로, 내게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그럼 제 안에 있는 내려놓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의 문제:
사실, 가난하게 살거나, 불편하게 살거나 하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이 어찌보면 저에게는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거나, 고생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런 삶을 어느덧 추구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막연한 반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소위, 돈을 많이 가진 자들에 대한 반감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것에 대한 반감들...

과연 이런 행동이 옳은 것일까요?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와도 교제를 나누셨고, 아시다시피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부자 청년에게도 안타까운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그럼, 우리의 반응은 어찌해야 할까요?
이 사회 구조 간에는 너무나 큰 서로간의 갈등과 대립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이들과, 나이 드신 분들과의 대립,
보수 주의 진영과, 진보 주의 진영의 대립,
부자와 가난한 자들과의 대립...

서로가 서로를 이해 못하고 서로 자기의 생각들이 옳다고 하죠.
어느 것에도 답은 없습니다.

단지, 요구되는 것은 상대방을 편견없이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고,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행동에 대해 같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예수님을 만나고 삭개오는 삶이 변화되었고, 잘못된 삶에서 돌이키게 되었듯이,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는 삶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함과 사랑으로 인해 마음을 열게 된 상태에서 잘못의 교정이 이루어졌던 것이지, 편견이나 어떤 비난에 의해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을 바라보던지 간에, 그 사람에 대한 편견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바라봐주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여 행동의 변화가 나타나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겠죠.

내려 놓음에 대해 좋은 일화를 소개하죠.
예수전도단의 홍OO 형제님이 bedts 강의 때 이런 강의를 하셨습니다.
형제님은 외국에 강의가 있어서 누추한 여인숙에 묵을 때에도 마치 자기 집인양 편안하게 누리고, 혹시 좋은 호텔에서 묵을지라도 마차 자기 집인양 편안하게 누린다고...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저는, 누추한 곳에서 잘 누릴 수는 있어도, 풍부함에 있을 때는 잘 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환경에 있던지 간에, 하나님안에서 잘 누리고, 또한 무엇을 풍요롭게 받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 잘 알고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내려 놓음의 좋은 실천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00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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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는 두 장 밖에 되지 않지만 놀라운 책입니다.
작은데, 성경에 들어가 있는 것은 뭔가 놀라운게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개인적으로 갖게 합니다.

학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제 1차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지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정말 열심히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에스라나 느헤미야를 읽어보시면 알 수 있죠...
그들이 잠도 잘 안 자면서 열심히 노력했죠...
그런데, 갑자기 이들이 성전 짓는 것을 멈추기 시작합니다. 14년 정도 동안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학개 2장 4절 5절에 보면 하나님이 계속 마음을 굳게하라고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성전 짓기를 멈춘 이유 중에 하나가 두려움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라에 보면 성전 짓는 것을 중단하게 된 이유가 나오는데, 그 당시 예루살렘 지역에 머물러 살던 사마리아인들이나 여러 이방인들의 박해가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 짓기를 중단하고 그들의 눈을 돌려 현실적인 만족에 안주하기 시작합니다.
학개 1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전은 황폐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은 집에 거주하고 있고, 1장 6절에 보면 이들이 자기 자신의 만족과 필요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노력은 많은 것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삶은 우리에게 참 의미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말씀을 어떤 분이 성전 건축하는데 이용하며 마음의 일종의 죄책감을 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성전 건축이 우리의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성전 건축에 힘쓰라고...

하지만, 사실 학개를 인용하기엔 무리가 있는 말이죠...
학개 당시 사람들이 성전 건축에 마음이 많고 실제로 힘썼지만 두려움이 그것을 계속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거죠.

좌우지간,
그리고,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지은 성전을 보면서 규모가 보잘것 없음에 대해 실망을 느꼈습니다.(2:3)
하지만, 하나님은 성전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면 그 안에 얼마나 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이전 성전에 비해 초라하지만, 하나님은 그 영광이 더 클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7, 2:9)

저는 많은 기독인들이 선교사나 아니면 그런 쪽으로 풀타임으로 하면 헌신된 사람이고 그냥 직장에 머물러 있으면 뭔가 부족한 듯이 느끼는 그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부족해 보여도, 다시 짓고 있는 이스라엘 성전 같이 초라해 보여도 그 안에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시고 임재하시면 그것이 얼마나 크고 천지를 진동시키는 영광이 있는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외면적인 거대함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냐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 있게 하시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하루 하루를 하나님께 함께 거하는 것. 이것이 하나의 부흥의 원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두려움의 문제로 돌아가면...

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내가 함께 한다. 용기를 가져라. 내가 함께 한다. (1:13, 2:4) 그리고 하나님은 그 영광스러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9)

전 학개를 보면서 바울의 삶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오로지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모든 두려움과 고통들을 능히 감당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인 상황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거대함이나 이 세상의 부나 명예 등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영적인 의미를 잊기 쉽고,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함에 대해 잊어버린채 살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고, 그 영광의 풍성함이 얼마나 클지 생각한다면 어떤 것도 우리를 매이게 만들지 못하며, 우린 하나님의 자유함속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 가운데 풍성하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흘러 나오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학개는 이 외에도 다른 굉장한 의미가 있지만
저에게는 위에 적은 부분의 의미들이 많이 다가왔습니다.

이곳에 어떤 자매가 나눈 이야기가 많이 저에게 의미를 주어서 적어봅니다.

그 자매가 생일을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림을 하나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그건 결혼식 장면인데, 저 끝에 예수님이 신랑(주례자 앞)의 위치에 있고 그 자매는 드레스를 입고 한 걸음 한걸음 예수님이 서 계신곳으로 다가가는 그런 그림이랍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예수님 있는 그 곳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일일까요.
삶의 고통과 여러 가지 일들로 힘들지만, 그것을 이기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생각만해도 우리에게 소망과 힘을 줍니다.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2006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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