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있으면 구하는대로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주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속으로는 믿지 못하며 겉으로만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러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분께 내 삶을 다 맡기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때를 가르쳐 주시고 그 때 구하면 뭐든지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느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제 안에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구해봐라.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구했는데 바로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가 제 안에 바로 임했습니다. 그걸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가 그 이후에 그냥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건 이후에 저는 믿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뒤에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무엇을 구하라고 하시고, 그것에 대한 믿음을 주시며 그것을 그 때 바로 구하면 즉시로 이루어지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손기철 장로님의 책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이 분도 똑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한 성령님이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을 구하는 것이며 그 분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때를 가르쳐 주실 때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며 믿음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구하는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안 이루어지는 것은 아직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믿음을 연습시키십니다. 즉, 하나님을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신뢰하는 법을 연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어떻게 생기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그대로 순종했을 때 그 분과 동행했을 때 차츰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따라가기 시작했을 때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런 동행의 삶이 지속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구하라는 신호를 주십니다. 구했을 때 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처음부터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부터 연습하여 믿음이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어야, 그리고 듣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신뢰가 쌓이게 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고, 담대함으로 자녀의 권세로 주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뜻대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알므로 아버지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하심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십시요. 그럴 때 믿음이 자라고 그럴 때 그분이 내 삶 가운데 가르치시고 공급하시는 때를 알게 되며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게 될 것입니다.

축복합니다. ~~

예전에 성령 사역을 하던 곳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 강사님께서는 오늘은 사역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강사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의 신비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지적하셨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비적인 은사를 구하는 것에 대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에는 방언, 예언 같은 많은 신령한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부분을 메세지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꾸준히 신뢰하십시오. 흔들림 없이 소망하십시오. 아낌없이 사랑하십시오. 이 세 가지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중요한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14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사랑에 달려 있다는 듯이, 온 힘을 다해 사랑의 삶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선물을 열심히 구하십시오.


 결국 신령한 은사의 전제 조건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령한 은사에 대한 기대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전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혀 없는 사람은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살아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별로 체험의 경험이 없고,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해 그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론의 하나님에 그치는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명확하게 오늘날도 기적 속에서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살아계심의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젖먹이와 같다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단단한 것을 먹을 수 없는, 이야기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젖먹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를 받고 싶어서 간절함이 많은 사람들에게 저는 한 가지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라. 하나님이 너의 전부가 되기를 사모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신령한 은사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때에 따라 실제적으로 임하게 될 것이다.

 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항상 양손만 바라봅니다. 아무 선물도 사 오질 않자 문을 꽝 닫고 들어가서 아버지에게는 관심도 없습니다. 이런 아들보다는 아버지가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아도 아버지 자체가 좋아서 달려들어 안기는 자식에게 아버지는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만을 더욱더 사모했을 때 알아서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청하는 기도, 좋습니다. 강청해도, 오랫동안 기도해도 받을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평생 신앙을 오해합니다. 하나님 은혜가 뭔지도 모르고 한 5년 기도해야 하나님이 주신다 이런 생각 속에서 평생 신앙 자체를 미친 듯이 구해야만 주시는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삶을 마치게 됩니다. 제가 보기엔 답답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단단히 모르고. 그러나, 하나님은 불쌍히 여겨서 그 기도를 들어주심을 보고 그게 신앙의 전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그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자기가 뭘 미친듯이 해야 얻는다라고 생각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신앙인 것입니다.

 강청하는 기도보다 훨씬 바람직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자 힘쓰고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때를 따라 공급하심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십시오. 우리의 삶 가운데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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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짖는 개들, 곧 참견하기 좋아하는 종교인들, 시끄럽기만 하고 실속은 없는 자들을 피하십시오. 그들이 관심 갖는 것은 온통 겉모습뿐입니다. 나는 그들을, 수술하기 좋아하는 할례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진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이 사역을 부지런히 하고, 우리가 늘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소리를 공중에 가득 채우는 사람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대단한 자격 조건들을 내세운다 해도, 우리 노력으로는 이 일을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배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합법적으로 태어나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엘리트 지파인 베냐민 출신의 이스라엘 사람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엄격하고 독실하게 준수했고, 내 종교의 순수성을 열렬히 수호하면서, 심지어 교회를 박해하기까지 했으며,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낱낱이 지켰습니다.

 나는 저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조건들을, 내가 명예로이 여겼던 다른 모든 것과 함께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내던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전에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내 삶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내 주님으로 직접 아는 고귀한 특권에 비하면, 내가 전에 보탬이 된다고 여겼던 모든 것은 하찮은 것, 곧 개똥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품고, 또한 그분 품에 안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데서 오는 강력한 힘, 곧 하나님의 의를 얻고 나서부터는, 나열된 규칙이나 지키는 하찮고 시시한 의는 조금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죽기까지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나는 그 모든 하찮은 것을 버렸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빌립보서 3:2-11, MSG)

삶에서 안 무너지고 싶지만 무너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니, 많이 있습니다. 죄 가운데 피흘리기까지 싸움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무너질 때가 있으며, 그런 것들이 자책이 되고 정죄감 속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질까봐 두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다윗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주의 기름부으심, 임재가 사라질까봐 걱정했던 것입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처절하게 기도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특히,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생각하며 그 안에서 살고 있을 때 무너짐은 타격을 많이 줍니다. 이러다가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거두어지지는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긴 절망과 낙망의 터널을 지나기도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복입니다.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속을 썩이고 부모가 이렇게 해야 바른 삶이야라고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잘못된 길로 가는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입장에서 아이를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이가 잘못했다고 뉘우치는 모습 속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고 더 사랑하는 마음이 많이 듭니다.
심지어, 육신의 부모가 그럴진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무너졌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다른 어떤 좋은 말도 우리에게 격려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속에서 잠잠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예수 그리스도는 나 같은 죄인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실까를 생각해 보면 생각보다 그런 절망의 터널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가운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에게 보내어 심판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자신들의 모습을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모세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서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살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장대 높이 불뱀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 놋뱀을 본 자마다 살게 되었습니다. (민 21장)
놋뱀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소망함이 없다고 느껴질 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요.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의미, 그 사랑을 느껴보십시요. 그럴 때, 우리 가운데 다시금 회복케 하시고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멋진 사람은 그리스도를 잘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분께 우리의 나약함과 절망까지도 맡겨 드리며 그 분을 의지하는 연습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는 어떠하겠느냐? 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축복합니다.~~

살전 2: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개역개정)
though we might have made demands as apostles of Christ. But we were gentle among you, like a nurse tenderly caring for her own children.(NRSV)


 우리는 영적 권위자 하면 무섭고 딱딱하고 무엇을 정죄하고 꾸짖는 사람의 모습을 많이 떠올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모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권위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행사하지 않기 때문에 왜곡된 권위 행사를 하기 쉬우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이미지도 또한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들은 사역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도 그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겠거니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서로와의 관계를 통해 영적인 것들을 추론하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서로와의 관계가 온전해야 그리스도와 성도의 사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곡된 권위의 행사 관계는 가장 큰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써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지만, 도리어 부드러운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에 바탕을 둔 권위 행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권위 행사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독단적인 폭군과 같은 모습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영적 권위자가 내뱉는 사랑 없는 말 속에 사람들은 영혼의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결국 사랑 없는 영적 권위자가 사람들을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권위는 철저하게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자신이 영적 권위자인 경우 항상 확인해야 할 것이 나에게 주신 이 권위의 행사가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인가를 항상 확인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권위를 행사하지 않거나 하나님 앞에 다시금 자신을 점검한 후 권위 행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저도 항상 체크하는 것이 있습니다. 난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나의 자녀처럼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으려고 수시로 결정합니다. 누군가의 행동에 대해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이런 점을 지적하려고 하다가도 내 마음이 아직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싶으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내 마음이 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지적하고 훈계하기도 합니다.

 사랑에 바탕을 둔 영적 권위 행사 모두가 염두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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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개역개정)
14:1 여러분의 생명의 사랑에 달려 있다는 듯이, 온 힘을 다해 사랑의 삶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주시는 선물을 열심히 구하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진리를 힘써 선포하심시오. (MSG)


 고린도전서에는 성령의 신비로운 은사들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이 은사들을 질서 있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혼란이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에 따라 은사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3장에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랑에 대해서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언사역자들이 반드시 알아둬야 할 사항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14:1절에는 예언에 대해서 강조하지만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고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없이는 아무리 놀라운 능력이라도 사람을 파괴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사단이 타락하게 된 것은 교만이었고 사단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을 죽음과 파괴 속으로 몰고갑니다. 사단에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사랑이라는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이용하고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런 사단의 특징들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은사를 나누어 주실 때 우리 속의 동기를 반드시 확인하십니다. 너가 왜 은사를 구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함인가? 너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인가? 그리고 은사를 받았을 때도 계속 우리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느 순간 이 은사가 잘못 사용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서는 어떤 것들도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지 알고 있습니까?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교만하여 지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역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은사는 겸손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사용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예언들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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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day as they were worshiping God-they were also fasting as they waited for guidance-the Holy Spirit spoke; "Take Barnabas and Saul and commission them for the work I have called them to do." (사도행전 13:2, MSG)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신학적인 견해들이 있지만, 전 누구보다 무엇보다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에 나타난 현상들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더이상 오늘날에는 말씀하시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어떤 교리에 대해서는 지극히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도행전을 보다보면 얼마나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지 놀랄 지경입니다.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구체적인 행동 지침까지도 누구를 만나야 할지도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견해에 대해선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성경적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교리보다 더 성경에 나타난 것들을 그대로 믿으며 체험하고 그 방법대로 실천할 때 우리의 인생이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보수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그대로 해 보십시요. 왜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것을 그대로 삶에 적용하고 기도한 다음에야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예언자와 교사들은 모여서 하나님의 구체적으로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guidance라는 표현은 제가 참 좋아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그들 가운데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기 위해 그들은 예배 드리며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심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이 도우슨은 시련을 겪고 있는 친구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 10번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친구들의 마음을 일깨워 주셔서 그들이 하나님께 '백만불짜리 질문' - "주님께서 저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을 드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확실히 듣기까지 끈기 있게 기도하게 되도록 구한다. 그들이 환난을 겪고 있는 목적과 이유를 계시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가운데 guidance를 주십니다. 그것이 구체적인 해결책이던 기다리라는 표현이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계시하십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응답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어떤 것을 해결해야 할 때 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들어오십시요. 반드시 들어오십시요. 이 말은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guidance를 받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의 guidance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 교회가, 한국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guidance를 받아 나아간다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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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공부를 하다 보면 이유를 따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런 걸 해야 합니까?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하면 왜 내가 용서해야 합니까? 그런 사람을 왜 용서해야 하죠? 이렇게 따집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 왜 믿어야 하나? 이런 걸 못하게 하는데... 라고 말합니다.
 '왜'라는 표현을 우리는 잘 씁니다. 그러나, 실상은 '왜'라는 것을 알고 싶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내 삶과 정면으로 부딪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따라사는 것이 싫기 때문에 '왜'라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모습을 나타낼 때가 많습니다.
 정말 '왜?' 라는 것이 해결되면 따라하겠습니까? 저는 그 말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실천부터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이유부터 따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선하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분을 믿기 때문에 그대로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사시절에 아이들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 왜 해야 하죠?라고 이유를 따집니다. 그래서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결국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하기 싫기 때문에 이유가 생기는 것이죠.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우리는 왜?라는 답변을 듣고 싶습니까? 아니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아야 될 이유를 찾습니까?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다루시는 것과 그 분의 은혜를 알게 되며 변화가 시작됩니다.
 신학에는 큰 두 가지 흐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알면 믿게 된다 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믿으면 알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다른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해 보면 알게 되고 믿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왜 그것을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정말로 찾고 싶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십시요. 그러면 이유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영향력 있게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다보니 그 말씀이 얼마나 능력있는지를 경험했기에 그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
 실천해 보십시요. 알게 됩니다. 믿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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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기독인들을 만납니다. 기독인들의 가장 큰 소망은 아무래도 하나님과 친밀해 지는 것이겠죠. 하나님과 여러 일들을 같이 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남들이 보지 못한 것들, 듣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는 스릴 있고 기쁨 넘치는 그런 삶들을 우리는 꿈꾸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도 모르고, 성령의 내적 조명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우리가 생각하기에 잘난척 하고 그런 것들을 교만이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교만은 순종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앉을 때 전적으로 내가 듣겠습니다. 행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요. 라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뭐가 내 안에 다가오나 보자. 하나님 말씀, 뭐 이런 게 맞아? 내 상황이나 아시는지? 이런 식으로 앉아 있을 때 교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관자라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전적으로 배우겠습니다라는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태도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교만에 빠져 있으며 하나님과 절대 친밀해 지지 못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YWAM의 훌륭한 지도자인 플로이드 맥클랑이라는 분은 하나님과의 친밀감(intimacy With God, 부제: Winning over Pride)이라는 책에 대해서 썼는데, 그 책의 내용은 바로 교만에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가장 큰 방해 요인이 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에 교만을 제거한다면 하나님과 친밀해 질 수 있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당연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정말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존중하거나, 그분이 어떤 것을 가르쳐 주셔도 순종하겠다라는 마음으로 순간순간을 사십니까? 아니면 끊임없이 쓴뿌리와 회의와 방황 가운데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께 따지려는 마음으로 결국은 어떤 것도 하나님 뜻대로 하겠습니다라는 것으로 나를 주님께 복속시키지 못합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 바로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는 가장 유일하면서도 가장 빠른길입니다.
 
 축복합니다.~~
왕상 7:21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한글개역개정)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두 기둥의 이름은 야긴과 보아스입니다.
야긴과 보아스는 프리셉트 성경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긴 - 원뜻은 똑바로 서다, 그가 세우실 것이다라는 의미, 하나님이 성전의 건립자이심을 나타낸다.
보아스 - 힘이 그에게 있다는 뜻, 하나님께서 성전에 힘을 주시고 영원토록 지속시키심을 시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두 기둥에 의해서 힘을 받고 세워집니다. 그 큰 기둥 두 가지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야긴 속에 담겨진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 뿌리내리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제대로 설계하고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보아스 속에 담겨진 의미인데, 계속해서 하나님께 의탁드리며 기도하며 그분의 뜻을 구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물은 지어지는 것만으로 그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유지 보수를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령께 민감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의 능력 가운데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성전인 우리 모두가 우리의 뿌리를 알고, 하나님께 계속 붙어 있어서 그 생명을 공급받아 멋진 성전으로 지어져 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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