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하나 하나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일평생 주님으로부터 듣고 배운다는 것은 큰 특권인 것 같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이, 성령님의 지혜가 심히 놀랍고 동행하는 것이 참 기쁨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주님의 말씀이 음성이 제 안에 있을 때 제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됨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이 그 무엇보다 좋습니다.

성령님을 높여 드리고 존중함이 무엇보다 좋습니다.
저의 이해와 한계를 넘어서서 그 뜻이 오묘하니 생각할 수록 주의 기이함에 전율하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더 경외하게 됩니다.

아버지,
계속 드리는 기도 제목 이루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조금만 더 알면 소원이 없겠다고 그것 한 가지를 붙들고 기도했던 것들 이루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도 저의 소원은 주님을 더욱더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며, 그것이 바로 저의 영혼이 자유케 되는 것이며
주님과 함께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아버지, 사랑으로 죽게 하여 주십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제 안에 부어지고
그리스도의 심장이 이식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버지 마음 품어 섬기게 하여 주십시요.

영혼 구원과 영혼 가운데 풍성히 부어지는 주의 은혜를 위해
주의 은혜의 복음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 되게 하여 주십시요.

은혜의 복음을 담을 수 있도록 큰 은혜 내려 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머물러 있음이 제게 가장 행복한 시간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그 친밀함 가운데 더욱더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그리스도가 내 삶에 전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찬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004년에 Jeff는 저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사람이며 전략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것은 저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더 알기 원하고 더 친밀하길 원하고 더 순종하길 원하고 더 믿음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것...

요새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예언이 많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제 안에 전략가적인 은사가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저에게 전략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 많이 떠올리게 하시고 공부하게 하시며, 영혼 구원과 성장을 위한 하나의 코치로 세우시길 원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혜에 담기길 원하십니다. 이 지혜라는 것은 태초부터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창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지혜에 담아서 세상에 풀어 내는 것, 영혼들에게 다가가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창조적인 전략들이 제 안에 맘껏 풀어지길 소망해 봅니다.

내가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할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성령께서 내 안에 충만케 역사하시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순간 순간마다 나의 죄의 욕구들은 나를 잡아서 무너뜨리려고 온갖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기도하면서 주님께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할수록 그분의 임재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순간적인 욕망에 져서 그분의 임재가 조금이라도 사라진다면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길 힘을 주시도록 날마다 기도하길 원하고 성령께서 도우시길 원하는 바램뿐입니다.

나의 약함을 알고 주님의 강함을 알아 그분께만 의지하는 겸손함이 나의 삶을 온통 휩쓸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모든 것으로 존귀케 되실 주님, 그분이 살아서 역사하시며 나의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분에게로 복속시키시고 비밀한 일들을 계시하시며 그분의 말을 내 입에 둔다고 말씀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부어질 때 나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하여 갈바를 모른다고 했으니, 오직 주의 뜻이 부어져서 갈 바를 명확하게 알고 사도바울처럼 그 푯대를 향해 날마다 달려가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부활에 동참하는 자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온전히 존귀케 되길 원합니다.

주님만이 내 삶에 전부되길 원합니다.

사무엘상은 엘리 대제사장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엘리 대제사장은 변함없는 종교적 행위를 합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대하여 가르침을 주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이야기를 전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엘리 대제사장은 눈이 어두웠습니다.
심지어 한나라는 여인이 성전에서 기도하느라 울먹이면서 술취한 사람의 모습을 보였는데, 영적으로 무지한 엘리 대제사장은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느라 그런 모습을 보이는지 술취해서 그러는지 구분을 하지 못합니다. (사무엘상 1:13-14)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모습인지 그렇지 않은지 영적으로 닫혀져 있으니 볼 것을 못 보고 보지 못할 것만 보고, 평소 자신이 관심 있어한 세상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니,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볼 때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관심사로 투영하여서 보니 오히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핍박하고 멸시하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엘리 대제사장은 두 아들의 범죄 행위를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두 아들은 제사장 직분을 행하면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자기들이 탐하여 가지고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같이 성적인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의 죄를 약한 수준에서 경계하였을 뿐 금하지 않았습니다.(삼상 3:13)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들은 죄를 타협하지 않습니다. 작은 죄악이라도 그것이 얼마나 주님의 임재에 직결되는 문제인가를 생각하기에 그 죄의 모습에 대해 철저한 회개가 뒷받침됩니다. 작은 죄라도 우리 마음속에 호리라도 남은 것이 있다면 주님의 영이 그만큼 충만하게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얼마나 주님의 영에 대해서 사모하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길 사모합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질까봐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할 것은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질까봐 그것때문에 근심하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사건은 점점 진행되어 엘리와 그 두 아들에 대한 심판으로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대적하여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 없이 전쟁에 나갔다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죽임을 당한 군사가 4천명이 되었습니다.(삼상 4:2)
백성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패한 요인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4:3)
과거 광야 생활 때 여호와의 언약궤와 같이 한 전쟁의 승리를 기억했습니다. 그때 승리를 하였구나라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짊어지고 와서 블레셋 사람들과 다시 한 번 전쟁을 치루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만했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으니 우리는 승리하였다라고 기고만장하고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궤에는 정작 중요한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죄악된 사람들이 아무리 종교적 행위를 해도 거룩함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쟁에서 패하여 여호와의 언약궤 마저 뺏겨 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엘리 가문에 내려지게 됩니다.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이 전부가 되는 삶, 그리스도가 전부가 되는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의 거룩함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에서 종교적인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찬양을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일순간 감정적으로 평안함을 느낀다해도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와 함께 함으로 느꼈던 승리의 기쁨을 하나님이 진짜 함께 계셔서 힘을 주시는구나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궤에도 계시지 않고 우리의 종교적 행위에도 계시지 않으며 주님의 거룩함이 있는 곳에 주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죄인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뿌려지며 그 안에서 새로워진 피조물이 되었습니까? 거룩한 성전이 되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내 자아가 죽고 나의 욕심이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전부가 되신다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거하실 것이며 그분이 우리 삶 가운데 직접 일하는 역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서로 하나가 되고 사랑하라 하셔서 그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연합 운동을 많이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야 할 점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 되느냐는 것이다. 억지로 하나 되려고 하다보니 문제가 많이 생긴다. 사상이 틀리고 생각들도 틀린데 억지로 하나 되는 운동을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결국 하나 되지 않고 하나되려는 운동이 오히려 하나됨을 방해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2. 주님께서는 하나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됨은 이렇게 이루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7:23절에 보면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즉, 하나가 되려면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모든 기독인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계신 사람이 있고 그리스도가 계신 것처럼 위장하는 신앙인도 존재한다.

3. 그리스도가 어떻게 계시는가? 그것은 바로 성령으로 계시게 된다. 신기하게도 서로 만나본 일도 없는 사람이 성령에 이끌리어 하나되는 경우들을 우리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이 누구를 만나라고 하시고 연락하라고 하셔서 서로 연락할 때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됨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억지로 하나되려는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배경에서 자랐던 사람이 전혀 다른 곳에서 신앙 생활 했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것이다.

4. 뭐든지 억지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자기 의만 내세우고 자기 자랑만 내세우고 자기 뜻대로 하려다가 실패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님께 집중할 때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셔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 그럴 때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1.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 왔다. 그리고 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보면 이런 여자는 돌로치라 명하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할꺼냐고 묻는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땅에다가 글씨를 쓰신 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신다.
예수님의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라는 말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다 떠나고 예수님과 여자만 남는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2.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사실이 있다. 죄 지은 사람이 당당하게 니가 뭔데 나를 정죄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다. 잘못을 범하고도, 죄를 짓고도 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니가 뭔데 나를 정죄하냐? 너도 그렇지 않느냐?라는 논리를 펴면서 이 구절을 당당하게 이용한다. 간음한 여인이 니가 뭔데 나를 정죄해? 이러면서 당당하게 나온다면 올바른 태도인가?
 성경을 제발 자기 입맛에 맞도록 자신을 옹호할 목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행동중의 하나이다.

3. 주님은 간음한 여인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주님이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성경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둘이 있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신 그 분이 죄를 사하겠다라는 말은 무엇인가? 바로 그 분이 직접 죄의 댓가를 지불하시겠다라는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손가락으로 무엇을 쓰셨을까? 풀리지 않을 논쟁이 있는 구절이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를 생각하시면서 하나님, 내가 이 여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을 테니 이 여자를 살려주십시요. 라는 마음을 담아서 땅에다가 글씨를 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4. 주님은 이 땅에다가 글씨를 쓰신다. 죽어가는 이 땅의 사람들에다가 살리기 위한 글씨를 쓰시는 것이다. 내가 대가를 치룰 테니 이제 생명 가운데 나아오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고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주의 영이 이끌리는 대로 가는 풍성한 인생을 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 밭에다가 어떤 글씨를 새길까? 너는 이제 내 소유된 사람이다.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고, 나로 인해서 구원받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라. 영원히 나와 교제하는 그 생명의 충만함으로 가득하여라는 글씨를 쓰시지 않으실까?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직접 모세의 돌판에 글씨를 쓰셨듯이, 지금은 우리의 마음 밭에 하나님 사랑의 글씨를 쓰신다.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새생명을 얻기를 원하시는 그 사랑의 글씨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함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 다들 환경 탓, 자신의 능력 탓 여러가지 이유를 댑니다.
이런 조건들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생명력이 없고 자유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자유함이 없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죄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31에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남의 종이 된 적이 없으므로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느냐라고 반문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8:34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자유로움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살면서 저의 상황의 문제 때문에 제가 매인 것 같고 자유함이 없는 것 같이 느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죄의 문제였습니다.
죄가 해결되면 영혼이 놓임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자유가 있어서 우리의 육신이 비록 상황 가운데 어려움에 처해도 영은 날로 새롭고 하나님의 자유가 우리 가운데 찾아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36절에 보면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여러분,
죄의 문제를 해결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의 자유가 찾아옵니다.
상황을 해결한다고 자유가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억압과 얽매임은 죄 때문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죄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라고 선포하고 죄 사함을 주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지금 혹시 내 삶에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앉으셔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해 보십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의 죄를 씻어 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요.
그 순간 그토록 해결되지 않았던 나의 자유함 없음이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어려움이 많고 혼돈스럽다 보니 미혹의 영도 그만큼 역사하는 힘이 큰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럴 때일수록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제대로 인도함을 받는지 알수 있을까요? 이것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사람인지를 아는 기준으로도 중요하고 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으로 제대로 인도받고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기준은 요일 3:10절에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리라.

요한일서의 배경속에는 오늘날과 같은 온갖 사상들이 난무하고 미혹케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는 같은 상황들이 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요한 사도는 분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구별하는 기준은.
1.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
2.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그 안에 부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를 행하려고 하고, 형제를 사랑하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과정 속에서 이것을 바로 분별의 기준으로 삼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세상을 향한 사랑이 안 느껴지고 정죄하는 마음이 많이 들 때는 제대로 인도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많이 들고, 거룩함과 정직함에 대한 하나님의 성품들이 제 안에 그 음성과 더불어 같이 나타날 때는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취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미혹케 되는 일들이 종종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너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있느냐? 거룩함과 정결함이 있느냐?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에 대한 기준을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성품에 타당해야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을 향해 보이는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아멘.

어느 집회 때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어떤 지체가 방언을 받았음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비단 저만 그런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분도, 사역을 인도하셨던 분도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받던 이 지체가 입을 꾹 다물고 어떤 기도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믿음의 행위를 보이는 것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 보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행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주에 휴가라서 모 교회에 수요 예배에 참석했었는데 거기서 목사님이 드신 예화입니다.
지리산에 어느 사역하시는 분이 있는데, 여러 곳에 성도들의 집이 흩어져 있고 심방을 가려면 개울도 건너야 하고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내일 심방을 가기로 결정했는데 그 집에 가려면 개울도 건너야 하고 비가 많이 와서 날씨가 좋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심방 전날에 비가 많이 왔습니다. 이 분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내일 심방 가길 원합니다. 하나님 날씨가 좋을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밖에 나가 보니 먹구름이 끼었답니다. 비가 올 것 같아서 집에 가서 우산을 챙겨가려고 아내에게 우산 달라고 했답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고 믿음으로 선포했는데, 다음날 우산을 들고 나오는 일이 과연 믿음으로 기도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낳게 합니다.

하나님 음성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해 볼 때, 처음에는 그런 것이 나의 생각이 아닐까라는데 집중하느라 시도도 못해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으니 나는 믿음의 행위를 보일 것이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말씀하십시요.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성경과 하나님의 성품과 타당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바로 실천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놀랍지만 일상적인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전도단에서 훈련을 받으면 묵상 강의 때 장미꽃을 나눠 줍니다. 장미꽃을 보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보는 시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당혹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장미꽃을 통해 말씀하셔야 할 이유가 있는가? 왜 이런 걸 사용하지? 이상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그 살아계시는 증거가 온 천지 만물을 통해 선포가 되고 있는데, 장미꽃을 통해 말씀하지 못하실 이유가 뭐가 있는가? (롬 1:20)
난 장미꽃을 보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그냥 생각해 볼 것이고 들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적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을 것이다. 라고 믿음의 행위를 보이는 사람에게 영적인 눈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십시요. 소경을 고칠 때도 진흙 덩어리를 눈에 붙이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믿음의 행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소경은 실로암 연못까지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여리고성 무너질 때도 돌라고 하였습니다. 성 주위를 믿음을 가지고 돌았을 때 성이 무너졌습니다.
사도행전 3장은 구걸하는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고치는데, 7절에보면 그를 오른손으로 잡아 일으켰다라고 되어있고 그 순간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걷지 못하는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대신 믿음을 보이면서 잡아 일으킵니다. (지붕 뚫고 아픈 친구를 내려보낸 친구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의 모습이지요.)

믿음은 믿음의 행위를 수반할 것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믿음의 행위를 보일 때 비로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인내함으로 신뢰함으로 믿음의 길을 달려가십시요.

축복합니다.
 행실(또는 행위)를 강조하지 않는 사람 쳐 놓고 제대로 된 복음주의자는 없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니 행실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복음이 행실까지도 변화시키며 완전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행위를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성령의 인도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라가는데, 성령께서는 행위를 바꾸시길 원합니다. 어두움의 영에 사로잡혀서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하고 사망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에서부터 변화시켜, 빛의 자녀같이 그 품위를 갖추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행위에서도 많은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행위에서 좋은 모습이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에 인도하심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자신의 행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빛의 자녀같이 나타나느냐 행위에 있어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느냐를 보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지를 분명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행위에 대해서 절대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들이 주장하기는 하지만, 저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행위가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아래 내버려 두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위 또는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길 원하십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사람들의 행실로 말미암음입니다. 사랑이 많다던가 가난한 사람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가진다던가, 낮아짐과 섬김, 정직함, 진실됨 이런 모습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선포되고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사역자들도 행실을 강조하지 않는 사역자는 제대로 된 사역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행실이 바르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사역 가운데 많은 책망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한 행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으므로 빛의 자녀같이 행실에 있어서도 깨끗하고 정결함을 가지길 원함을 많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바꾸게 되는 것의 근본적인 작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행위를 이렇게 바꾸면 하나님이 복 주시겠지 이런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성령께서 직접 책망을 하시고 권면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아래 우리 자신을 맡겨 그분의 계획하심 가운데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맞는 사람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행위를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행위를 바꾸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우리의 행위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행위를 뜯어 고칩니다. 메세지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신데, 성령에 의해 우리 행위 뿐만 아니라 마음의 모든 숨은 죄악과 잘못된 생각까지도 다 끌어내어 불 가운데 태워 버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 고치려 했고 그것은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위선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마음의 생각까지도 뜯어 고치시고 마음의 진실함에서 행위의 진실함으로 연결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오히려 바리새인들보다 행위에 있어서 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온전히 들어가서 역사하는 사람은 행위가 이전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작은 거짓에도 마음이 아파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주변의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3-9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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