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들이 모세처럼 돌아서서 하나님을 마주하면, 하나님께서 그 수건을 벗겨 주십니다.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과 서로 얼굴을 마주보게 됩니다! 그 순간 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새긴 한 조각 돌판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인격적으로 임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 계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우리를 옥죄던 저 낡은 법조문이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 법조문에서 풀려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합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얼굴을 그분의 얼굴빛으로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시고 우리가 그분을 닮아 갈 때, 우리는 메시아를 꼭 닮은 형상으로 변화되고 우리 삶은 점점 더 밝아져서 보다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임재를 누구보다도 갈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가운데 임재하실 때 공동체 가운데 임재하실 때 그분이 직접 사역하시고 그분의 다루심들 안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오히려 그것이 내 욕심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준비하면서 기도해야 할 것은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주님, 주님의 임재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기름부으심이 흘러 넘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말씀을 주십시요. 하나님께서 행하셔야 합니다. 
이런 기도입니다.

주님께 집중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신호를 주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상황들을 보여주시고 무엇으로 예배 가운데 핵심 주제를 삼을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말했을 때 심령이 찔러 쪼개지는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해 보지 못하면 절대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것에 대한 어떤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가운데 행할 때 주님께서 직접 앞서가시며 그분이 직접 행하셨다는 신명기의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머리로는 이해될 지 모르지만 실제적으로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신 1: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개역개정)

제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기도할 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기다리며 사모하며 그분께 집중할 때 내가 할 일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상하게 많은 경우에 내가 직접 행하겠다. 너는 내가 행할 일을 기다리며 보아라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기질상 제가 막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나아갈 때마다 주님은 주님께서 직접 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저보고는 기다리며 그분이 하실 일을 보아라라고 말씀하시니 그만큼 제가 할 일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십니다. 단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나아갈 때 그분이 우리 가운데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힘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그분이 직접 행하시는 은혜로 삽니다. 그것이 너무나 큰 기쁨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여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사시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목도하시는 삶 사시길 바랍니다.

눅 10:18-2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겠느냐? 너희는 뱀과 전갈을 밟고 걸어도 무사히 지날 것이며, 원수의 공격에도 보호받을 것이다. 아무도 너희를 건드릴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승리는 악을 다스리는 너희의 권세에 있지 않고, 너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권세와 너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의 임재에 있다. 너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하시는 일, 바로 그것이 너희가 기뻐해야 할 제목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한없이 기뻐하셨다. (msg)

아멘.
1. 오늘날의 많은 설교자들은 인기를 얻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적인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인기를 얻는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단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들을 남발하여 인기를 얻는다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설교자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진리를 이야기하다보면 충돌이 생기게 되고 비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방은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 받는 비방이어야 하고, 삶으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나는 사람으로 진리를 말할 때 그 진리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이 찔리고 그 사람이 비방을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참 하나님의 사람이며 참 하나님의 설교자입니다.
저는 불편한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불편한 설교를 하는 사람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눅 6:22-23 (msg)
 누군가 너희를 깎아내리거나 내쫓을 때마다, 누군가 내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너희 이름을 더럽히거나 비방할 때마다, 너희는 복을 받은 줄 알아라.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진리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들이 불편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너희는 기뻐해도 좋다. 아예 어린양처럼 뛰어놀아도 좋다! 그들은 싫어하겠지만, 나는 좋아하니 말이다! 온 천국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 또한 너희만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님을 알아라. 내 설교자와 증인들은 언제나 그런 대우를 받았다.

진리를 말함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흥분하고 사람들이 비방한다면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싫어할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정말로 좋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심령을 찔러 쪼개는 설교가 되어야 하고 회개하고 자복하게 만드는 설교여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겉과 속이 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시는 거룩한 처소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정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2. 설교자는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삶으로 말씀을 붙들고 산 것을 설교하는 것만큼 파워있는 것은 없습니다. 난 내가 모르는 것은 설교하지 않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경험한 주의 성령, 나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설교 합니다. 모르는 것을 억지로 풀어 내려는 것만큼 교만한 것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너무 많이 아는 것도 별로 좋을 바 없습니다. 너무 많이 알아서 실천을 어느 한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많이 알면 그만큼 하나님이 더 실천하길 원하시는데 많이 아는 사람 쳐 놓고 한가지라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 별로 못 봤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단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가 지적인 것만 충족시키려는 그런 마음을 불어 넣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리새인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너무 많이 알아서(실상은 아는 것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죠) 어떤 것도 실천하지 못해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가지를 알아도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너 삶의 전부를 드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작은 것 한 가지라도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대부분 너무 큰 것만 기대하다가 정작 주님의 작은 부분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진국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작은 것에 대한 것까지도 사모하는 열정이 있고 마음이 있는 사람이며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치켜세우는 말과 비위를 맞추는 행동으로,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면 화가 있다. 사람의 인정을 받는다고 해서 진리의 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악당 설교자들이 너희 조상의 인정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할 일은, 진실하게 사는 것이지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다. (눅 5:26, msg)
마가복음 1:21-22
그들은 가버나움에 들어갔다. 안식일이 돌아오자, 예수께서 지체하지 않고 회당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가르치며 하루를 보내셨다. 사람들은 종교 학자들처럼 궤변과 인용을 늘어놓지 않는, 아주 솔직하고 확신에 찬 그분의 가르침에 놀랐다.
(MSG)


예수님의 가르침의 특징은 아주 솔직하고 확신에 찬 가르침이었다는 점이다. 솔직하고 확신에 찬 가르침은 진리를 알고 직접 그 삶에 옮겨낸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다. 직접 그 진리대로 살다보니 솔직할 수 밖에 없고 확신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에 비해 종교학자들은 궤변과 인용을 늘어 놓는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바가 없고 어디서 들은바를 마치 자기가 아는 것처럼  전달하는 간접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대로 그대로 행하시고 그대로 사셨다. 그리고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메세지가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명쾌하셨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궤변과 인용을 늘어 놓는 설교를 많이 하는데,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 쳐 놓고 메세지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대로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살며 그것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할 때 그 메세지가 바로 능력이 되며 살아서 운동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많은 신앙의 사람들을 만날 때에도 두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진리를 알고 그대로 살아서 삶으로 풀어내는 사람이며 다른 한 부류는 성령의 이끌림이 없고 그저 육으로 나아가며 어디서 들은 것은 많지만 절대 그 진리대로 살아보지 않으며 말만 잘하는 사람이다. 전자의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많이 아는 사람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를 알더라도 삶에서 직접 실천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인정하며 그분의 주권 속에서 사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적인 갈증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지적인 갈증을 채운 들, 그들이 그 수 많이 들어온 진리를 하나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역시 바리새인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다른 지적인 목마름이 있으면 가차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며 지식적인 욕망만 채우는 굴레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도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말씀에 순종이라는 것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를 듣더라도 그 진리가 삶 속에 어떻게 역사하는지 순종하여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강력을 맛볼 때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난 단 하나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을 보길 원한다.
예전에는 이런 책이 좋다 저런 책이 좋다 그러면 그냥 아무 책이나 읽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책도 이해되지 않아도 읽고. 그 책의 내용이 좋던 안 좋던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와서 느끼는 것은 책이라고 다 좋은 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책이라는 것이 사람의 신앙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세울 수도 있는 강력한 영적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준을 세우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두 가지 정도의 기준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요새 나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아무 주제에 대한 책을 선택해서 읽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됩니다. 하나님이 지금 특별하게 우리 삶 가운데 가르치시기를 원하는 주제에 대한 책들을 사서 그것을 집중적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예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대해 체험을 주시고 그 주제에 대해서 가르치신다 싶으면 그것과 관련된 주제로 나와 있는 책들을 많이 섭렵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주제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생기고 나중에 강의하는데도 이론적 체계를 갖출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지금 가르치시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순종일 수 있겠고, 어떤 사람은 겸손, 경외함, 권리포기 등 여러가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욕심을 내려 놓으시고 그 특별한 주제에 대해 시간을 드리십시요. 하나님이 그 주제에 대해 가르치시기 시작할 때 특별히 그 주제에 대한 통찰력을 주시는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가 넘치고 책을 읽어도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2. 저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탁월한 사람이 쓴 책이라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책은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흘러가기 때문에 저자가 성령 충만하면 글도 우리 가운데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저자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특별히 성령 충만한 삶을 산 사람인가, 신앙이 추상적이지 않으며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강력한 이끌리심을 받으며 살고 있는 사람인가를 따집니다. 성령 충만의 삶을 살고 있거나 산 사람의 글은 읽을수록 영을 새롭게 합니다.
 현재 작가 중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작가는 존 비비어입니다. 존비비어 시리즈는 다 사서 읽으십시요. 여러분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영적으로 성령 충만을 도와줄 것입니다. 
 또한 조이도우슨, 로렌커닝햄, 홍성건 목사님, 손기철 장로님의 책들, 토미 테니의 책 등도 참 좋습니다. 

3. 분별력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책이 사람의 인생을 망칠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고, 너무 어렵거나 성경적 진리를 닮지 않고 그저 이론적 가정을 담고 있는 책은 오히려 영혼을 파괴시킨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 물론, 자기가 모든 것을 감당할 만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면 별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과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축복합니다.
2주전에 4부 예배를 준비하면서 하나님 앞에 머물렀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계시록의 성경구절이었다.
계시록 7장 10절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비전이라는 찬양을 부르며 가장 감동을 받은 부분은 천국에서 보좌에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찬양을 돌리는 장면을 상상할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 
내가 이 땅에서도 너희들에게 존중받고 싶다고. 찬양을 받고 싶다고. 이런 예배를 받고 싶으시다고. 천국에서만 그런 찬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그런 찬양을 받고 싶다고.

그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난 슬퍼서 견딜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찬양 돌린다고 하면서 정작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존중하지도 아니하고 예배하지도 아니하고 경외함이 없다는 그 사실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우리 안에 임하여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천국을 맛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을 이 땅에서도 요한계시록과 같이 맘껏 찬양하며 존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오늘날에 이 땅에서도 정말 천국의 찬양이 흘러나오고 있는가? 
주님은 
현재, 지금, 여기서 찬양을 받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마 5:19-20
옳게 사는 문제에서 너희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MSG)

보통 예수 믿으면 행실은 아무렇게나 해도 하나님이 괜찮다 하시겠지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행위는 어떠했습니까? 겉으로만 행위를 옳게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까지도 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잘못된 점 하나 하나까지도 주님은 거룩하고 정결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사소한 잘못까지도 겉으로는 아니지만 속으로 미워하거나 음란하거나 그런 것까지도 죄로 지적하시며 성결한 삶을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작은 거짓말이라도 그것 때문에 통곡하기까지 지적하시고 회개케 하십니다.

제가 ywam에 있던 시절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주 작은 잘못을 한 것 까지도 눈물 흘리면서 회개한 것들을 보았습니다.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과 비판적인 것까지도 하나님의 지적하심 아래 참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작은 거짓에도 민감하여 참회하고 통회하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말하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겠습니까?
오늘날 왜 그리스도를 전할 때 능력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거짓의 아비들이 증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짓에 사로 잡힌 모습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 말이 어찌 신뢰가 가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행동인 사회적인 윤리의 기준에 못미친다면 이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높은 잣대를 하나님은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회를 선도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거룩하고 정결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윤리의 잣대로도 훨씬 못 미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만 주님은 맞다라고 말씀하십니다.

5장 21절부터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이 있지만 누구든지 마음속으로 화만 내도 살인을 범한거라고 예수님은 더 높은 기준을 보여 주십니다. 이후로도 사람들에 대한 원한의 마음까지도 지적하시고, 겉으로 간음보다 속으로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까지도 영혼을 잃게 되는 문제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죄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과연 구별되고 거룩한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그 정도까지 관여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착각하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령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릴 때, 그분이 우리 삶에 대해 개입하시고 우리의 부정한 모습들을 정결한 모습으로 바꿉니다. 어떻게 보면 괴로울 것 같지만, 참된 자유와 기쁨이 있고 거룩함 가운데 느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겉의 행동은 물론이고 속사람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덮힌 주님의 영광이 가득한 거룩한 신부가 되길 원하십니다.
1. 회개가 상실된 구원의 복음은 제대로 된 구원의 복음이 아닌 것이다. 자기가 철저하게 죄인임을 인식한 후에 구원의 복된 소식이 들릴 때 비로서 우리의 영혼은 기뻐 뛰게 되며 마른뼈와 같이 죽어 있던 영혼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얻는 회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많은 경우에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착각할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는 매 주일 교회에만 참석해 종교적인 의식만 반복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평생을 살 가능성이 많다.
 난 적어도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모른다면 구원받았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구원못받았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기가 구원을 받았는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진실되게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구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한다. 난 최소한 그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안다고 말한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성경적인 것은 구원을 받았는지 우리가 모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사람들은 자기가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찌된 일인지 자기가 구원받았는지도 모르고, 성령이 자기 안에 계시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른 현상이 아니라 책망을 들어야 할 현상인 것이다. 틀린 것을 맞는 것처럼 진리인 것처럼 믿고 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진리를 붙들고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해서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 착각하고 있는 것을 진리로 믿고 살아서는 안된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다.

마태복음  3:2절에 너희 삶을 고쳐라. 하나님 나라가 여기있다
라고 세례 요한은 말하고 있다. 삶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3장 11-12절에 보면 
 내가 이 강에서 세례를 주는 것은 ,너희의 옛 삶을 바꾸어 천국의 삶을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너희 안에 천국의 삶을, 너희 안에 불을, 너희 안에 성령을 발화시켜, 너희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그분께 비하면 나는 잔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은 집을 깨끗이 하실 것이다. 너희 삶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참된 것은 모두 하나님 앞 제자리에 두시고, 거짓된 것은 모두 끄집어 내어 쓰레기와 함께 태워 버리실 것이다.

2. 오늘날의 설교자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만 늘어놓아서는 안된다. 거짓된 복음을 선포해서는 안된다. 삶을 막 살아도 괜찮다. 예수만 있으면 된다. 이것만큼 거짓 복음이 어디있는가?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영혼들에게 심령을 찔러 쪼갬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죄라고, 그것이 잘못된 삶이라고 그것을 놔두었다간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안에 소망이 없음을 절망만이 가득함을 깨닫고 심령의 애통함을 가지고 눈물 흘리는 영혼들에게 예수가 소망이라고 선포할 때 성령께서 그 삶 가운데 역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역사하여 그 안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천국의 삶을, 우리 안에 성령을 발화시켜 우리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신다. 삶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거짓된 것은 모두 끄집어 내어 쓰레기와 함께 태워 버리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부터 온 거룩함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죄악은 그것의 모양이라도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둔하고, 삶에 있어서 행위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그분이 완전히 바꾸어 놓고 거짓된 것은 태워 버리겠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우리 삶 가운데 변화가 없을 수 있다라고 말하거나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변화가 없을수도 있지라고 믿어버린다. 도대체 주님의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
 
3. 회개하라. 내가 생각해서 그냥 이런 것을 회개해야 겠다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될 수 없다. 성령의 찔러 쪼개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영혼의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는 설교자로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검이 우리 가운데 다가올 때 우리의 죄를 보게 했을 때 영혼의 통곡이 나오는 회개가 된다. 그냥 설교자가 아닌 것이다. 세례 요한처럼 또 많은 성경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처럼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설교자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를 구하고 인도하심을 받는 설교자가 필요한 것이다. 또는 우리가 주님 앞에 정직하게 반응했을 때 마음으로 반응할 때 우리의 영이 열릴 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진다. 가식적인 회개 거짓된 회개 이런 것이 회개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회개라는 쇼를 하는 것이다. 그냥 억지로 눈물을 짜면 된다는 식의 회개, 이것만 보이면 하나님이 용납해 주시겠지라고 말하니 변화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그것이 너무 마음에 찔리고 부담이 되어서 그 행동에서 즉각적으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지도자들이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즉각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고치기 보다는 또 진창 속의 수렁에 빠져든다. 그것은 회개 한 것이 아니라, 회개라는 쇼를 보여 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본 많은 교인들은 가짜 회개가 회개인것처럼 생각하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가짜 신앙이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다른 사람들을 죄 속에 몰아 넣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잘못된 신앙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고 그들 또한 그것이 진짜 신앙인것처럼 믿다가 같이 멸망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불이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삶을 태우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리고 영혼의 회개 통곡의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고, 나는 죽고 주님이 사시며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5. 제발 회개하자. 그리고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자. 아멘.
마태복음 1:18-19
예수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렇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사이였다.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령으로 된 일이었으나 요셉은 그 사실을 몰랐다.) 요셉은 마음이 상했지만 점잖은 사람인지라, 마리아에게 욕이 되지 않게 조용히 문제를 매듭지을 참이었다. (MSG)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이해함이 없다. 왜냐하면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의 테두리의 한계속으로 몰아 넣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임신했다. 성령으로 임신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테두리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계시를 받은 사람들로부터 예언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빛이 임하지 않으시니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계시를 깨달을 수도 없고,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서도 이해함이 없는 것이다.

 니고데모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깨닫지 못했다. 오늘날의 많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나 학자들도 성령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 요셉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며, 니고데모와 같이 당대 최고의 학자들도 역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없으면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긴 하지만 전혀 이해함이 없는 것이다.

 요셉은 정혼한 여자가 임신한 것을 보고 아마 자기 인식의 테두리 한계속에서 마리아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이라는 사람은 그래도 성품이 온유한 탓인지 자기 머리로 생각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다. 바리새인들 같았으면 아마 마리아를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자기의 머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며 그것은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돌로 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차라리, 요셉처럼 자신의 생각에 의하면 그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지라도 조용히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하는 태도가 좋지 않을까.

 성령의 역사는 이해되지 않으면 비판을 먼저 하는 자세가 용납되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기도하면서 그것이 진짜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며 분별을 구하는 것이 정상이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돌로 치고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기다렸던 것이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를 마음에 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들의 세력이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에 대해서 말하며 기도했던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선포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냥 그것을 비판하고 정죄했을때 과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책임질 수 있겠는가? 잘못된 것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처리하실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성령에 이끌리어 어떤 메세지를 전했을 때 그것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과제인 것이다.

 신중하게, 그 메세지를 분별하고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아니하며,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캐더린쿨만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성령의 권능이라는 책의 한 부분을 적습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이 경험을 했다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 경험에 관해, 성령님께서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다스리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성령세례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경험 뒤에 이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의지를 완전히 다스리고 있지 않다면 그 경험은 얕고 일과성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다지 영적으로 깊지 않은 사람들이 강력한 영적 집회에서 강하게 사로잡혀 버린 나머지 열광적인 동작으로 끌려 들어가지만, 그들 자신의 성격에는 어떤 변화도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울 시대에 미스바에서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계시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다윗을 잡으려 하여 사울을 따르던 사람들은 선지자들을 뒤흔들었던 동일한 엑스터시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강력한 영적 기도 집회에 참석하고 있고, 어떤 놀라운 경험을 체험하면서도 깊고 영속적인 축복을 여전히 놓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영속적인 축복이 오는 경우는 성령께서 우리의 깊은 곳까지 이르도록 오직 성령께 허락될 때 뿐이며, 이 때 우리 삶의 근본이 변화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경험이 계속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mind)와 뜻(will)을 절대적으로 성령의 다스림 아래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매우 실제적으로 필요로 하는 가르침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단순히 어떤 감정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을 잡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체험에 대해서입니다. 당신이 마음뿐만 아니라, 당신의 의지도 하나님의 뜻에 진정으로 항복하게 될 때, 그것은 하나의 영적 경험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깊고 사나운 파도가 밀려올 때도, 어두운 밤 하늘에 별이 하나도 없을 때도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들과 시험이 찾아 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안전합니다. 눈물이 당신의 눈 앞을 가리고,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진정한 토대는 의지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사역에서 많은 해를 보낸 후,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영의 다스림 아래 두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줄곧 보아왔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되고, 성령 세례받은 것을 자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을 물어 보겠습니다.
 "당신의 의지(뜻)는 오늘 성령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과거에 어떤 경험을 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나는 당신에게 그다지 높은 경험을 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나는 당신에게 그다지 높은 점수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 자신의 의지를 다스리도록 양도해 드린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전 생애를 통치해 주십니다.
 성령이 사람 위에 임하시고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의지를 굴복시키고 그 사람의 생활에서 최고의 권력자가 될 때, 그 사람의 삶은 전생애를 통하여 이 경험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이미 삶에서 최종 결정권을 가지지 않게 되고, 성령께서 그 삶을 통치하시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힘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뜻(의지)은 옆으로 비켜나고, 하나님의 뜻(의지)에 그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 사람은 이렇게 자각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나의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나의 뜻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205-2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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