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저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많이 만나봤습니다. 자기가 구원받았는지 못받았는지 그걸 누가 알겠느냐 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치심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추상적인 신앙은 항상 발전을 저해합니다. 성경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신앙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구체적이이시며 실제적으로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대부분 이론에만 그치는 신앙으로 만족하고 거기에 머물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인쳐주신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도장을 찍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그것에 대한 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오늘은 성령 충만한 집회에 가 보니 구원받은 거 같고, 내일은 일상의 삶 가운데 무너지니 구원받지 못한 거 같고. 이런 생활이 반복됩니다.
흔히, 많은 신앙의 선배라는 사람들은 그냥 믿어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구원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으니 믿으라고. 그러나, 안 믿겨지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말로만 믿는다고 그게 믿어집니까? 저는 그런 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안 믿겨지는데 어떻게 믿으란 말입니까?
성령 받은 것에 대해서도 믿으라고 합니다. 말로만 믿는다 믿는다를 반복한다고 해서 믿어집니까?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순간은 선포함으로써 확신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나 또 시간이 지나면 의심이 들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의심의 구름이 벗어지고 절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가운데 거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이 확증 도장을 찍어주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구원받았는지 의심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직접 너가 구원받은 거 확실하다. 맞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그분께 직접 들을 때 그동안 그토록 해결되지 않았던 믿음의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고 어떤 의심도 들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성령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세례는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과 동일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으로 내 영이 충만해져서 거기서 하나님의 권능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사역을 위해선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사역이 바리새적인 사역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적인 사역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을 때 흘러나올 때 바로 은혜의 의한 사역, 내가 중심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이끄는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직접 너 가운데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주었다라고 인쳐주실 때 의심없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의 인치심을 우리는 들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임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속에 깊게 들어갈 때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주님의 임재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전부가 되시고 주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갈 때, 성령의 인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성경의 표현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것을 추상적으로 규명하는데, 그 사람들이 성령의 인치심을 경험해 본 일이 없으니 그것을 추상적으로 기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에 대해서 기록한 책 중 학자의 이론으로만 그저 적어 놓은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읽으면서 이 분은 목사님이시긴 하지만, 성령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구나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에 비해 손기철 장로님 같은 분은 참 성령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성령님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성령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고 성경이 성령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어떤 것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캐더린 쿨만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령의 권능 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제가 위에 적은 내용에 대한 부분이 있어 그대로 적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거듭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가진 어휘로는 우리가 경험한 것을 묘사할 만한 말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 성령께서 그 사건(transaction)위에 인치셨을 때, 그분의 영(성령)은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과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되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태어난 것을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너무나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180p.


우리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을 받았으며,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치심을 받은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며, 우리 자신들에게 뭔가 장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치심을 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 때문이고, 성령께서 친히 그것을 인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치심을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감정이 아닙니다. 당신이 잘못된 환상 아래서 수고하지 않도록 그것을 확실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결코 어떤 감정이 아닙니다. 믿는 자 안에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받아들여 졌음을 증거하고 계시는 성령의 임재하심입니다. (191p.)

정죄감에서 벗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내적인 상처에서 벗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옆에서 당신에게 정죄감이 없다, 너의 상처를 하나님이 치유하길 원하신다라고 해도 믿고는 싶고 감사는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처리되진 않습니다. 완전히 신뢰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깊은 임재 가운데 그분이 선언하시는 것을 듣게 되면 일순간에 모든 속박과 얽매임과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그분이 선언하시는 것을 들으십시요. 그런 인치심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구하는대로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주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속으로는 믿지 못하며 겉으로만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러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분께 내 삶을 다 맡기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때를 가르쳐 주시고 그 때 구하면 뭐든지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느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제 안에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구해봐라.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구했는데 바로 하나님의 신령한 은사가 제 안에 바로 임했습니다. 그걸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가 그 이후에 그냥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건 이후에 저는 믿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뒤에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무엇을 구하라고 하시고, 그것에 대한 믿음을 주시며 그것을 그 때 바로 구하면 즉시로 이루어지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손기철 장로님의 책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이 분도 똑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한 성령님이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을 구하는 것이며 그 분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때를 가르쳐 주실 때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며 믿음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구하는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안 이루어지는 것은 아직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믿음을 연습시키십니다. 즉, 하나님을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신뢰하는 법을 연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어떻게 생기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그대로 순종했을 때 그 분과 동행했을 때 차츰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따라가기 시작했을 때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런 동행의 삶이 지속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구하라는 신호를 주십니다. 구했을 때 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처음부터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부터 연습하여 믿음이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어야, 그리고 듣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신뢰가 쌓이게 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고, 담대함으로 자녀의 권세로 주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뜻대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알므로 아버지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하심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십시요. 그럴 때 믿음이 자라고 그럴 때 그분이 내 삶 가운데 가르치시고 공급하시는 때를 알게 되며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게 될 것입니다.

축복합니다. ~~

한 달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 나라를 생각해 보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아픕니다. 이 나라의 곳곳에 있는 죄악들, 이 죄악들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에 퍼진 분노와 낙망과 절망감,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들, 타락. 어느 하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더더구나 가슴 아픈 것은 이런 죄악들을 범하면서도 마음에 담대함을 얻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듯이, 곳곳에 이 나라를 위해 중보하는 하나님의 정결한 사람들이 소수이지만 있다는 것이 많은 위로가 됩니다. 그들이 이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중보하는 모습이야 말로 우리 나라에 큰 희망과 빛이 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우리 모두는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가 임할 것입니다.

저는 온갖 이론과 온갖 추측보다도 제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이 그분의 마음을 전달하여 주는 것을 더욱더 신뢰합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곳곳에 사람들을 일깨우시며 기도의 자리로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금 그리스도의 젊은 군사들이 일어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마음을 드리는 놀라운 역사가 이 땅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며 죄악의 길 가운데 빠져 들어서 소망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영혼들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여,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땅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 되게 하여 주십시요.


  유명한 목회자 중의 한 분은 오늘날에도 나타나는 기적적인 은사가 중요하냐?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적적인 은사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것을 어떤 동영상을 통해 보았습니다. 물론, 오늘날 무분별하게 행해지고 있는 성령의 능력만 강조하는 일부 사람들에 대한 경계의 말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한국 교회에 젊은이들에 대해 많은 좋은 영향력을 준다고 생각하고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평소 논점 일탈의 오류가 종종 있으신 분으로 정성껏 설교를 준비하시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분의 잘못만은 아니겠죠.  아마 너무 바쁜 삶이 문제가 될 수 있겠고 이런 현상은 많은 한국 목회자의 한계이겠죠. 저도 이런 면에서 자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놀라운 복음에 대한 말씀은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기적적인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을 안할까요? 물론, 몇몇의 신비주의에 빠져 계시고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해당이 되겠지만,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를 구하라라고 말씀하는 많은 분들이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큰 은혜며 기적입니다. 거기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무엇을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더 풍성한 삶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을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의 부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입니다. 더 풍성한 삶은 철저하게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실 성령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을 때,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죄인을 용서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셔서 성령의 능력가운데 평생을 사신 분이시고, 예수님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신후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령은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오게하는 능력의 근원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보고 내가 행한 일을 너희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1-12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그것이 전부여서 행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굳어지고 어떤 하나님의 말씀도 들을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려서 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가장 중요한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지요. 복음이 중요하다고 해서 기적적인 현상이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논의 전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보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할 것이고 그보다 큰 일도 하게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맨 위에서 언급한 목사님을 향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분도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더 알게 되길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확실한 분이시니, 성령님을 더욱더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되어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되길 원합니다. 모르면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겸손이며, 하나님의 역사와 권능을 자신의 한계적 배경과 경험이라는 테두리 아래 제한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에게 대하여 젖먹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말해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전부이시며, 성령 하나님에 이끌리어 우리는 이 세상을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런 특권과 은혜가 넘치길 바랍니다.

예전에 성령 사역을 하던 곳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 강사님께서는 오늘은 사역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강사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의 신비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지적하셨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비적인 은사를 구하는 것에 대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에는 방언, 예언 같은 많은 신령한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부분을 메세지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꾸준히 신뢰하십시오. 흔들림 없이 소망하십시오. 아낌없이 사랑하십시오. 이 세 가지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중요한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14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사랑에 달려 있다는 듯이, 온 힘을 다해 사랑의 삶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선물을 열심히 구하십시오.


 결국 신령한 은사의 전제 조건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령한 은사에 대한 기대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전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혀 없는 사람은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살아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별로 체험의 경험이 없고,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해 그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론의 하나님에 그치는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명확하게 오늘날도 기적 속에서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살아계심의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젖먹이와 같다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단단한 것을 먹을 수 없는, 이야기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젖먹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를 받고 싶어서 간절함이 많은 사람들에게 저는 한 가지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라. 하나님이 너의 전부가 되기를 사모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신령한 은사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때에 따라 실제적으로 임하게 될 것이다.

 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항상 양손만 바라봅니다. 아무 선물도 사 오질 않자 문을 꽝 닫고 들어가서 아버지에게는 관심도 없습니다. 이런 아들보다는 아버지가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아도 아버지 자체가 좋아서 달려들어 안기는 자식에게 아버지는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만을 더욱더 사모했을 때 알아서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청하는 기도, 좋습니다. 강청해도, 오랫동안 기도해도 받을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평생 신앙을 오해합니다. 하나님 은혜가 뭔지도 모르고 한 5년 기도해야 하나님이 주신다 이런 생각 속에서 평생 신앙 자체를 미친 듯이 구해야만 주시는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삶을 마치게 됩니다. 제가 보기엔 답답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단단히 모르고. 그러나, 하나님은 불쌍히 여겨서 그 기도를 들어주심을 보고 그게 신앙의 전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그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자기가 뭘 미친듯이 해야 얻는다라고 생각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신앙인 것입니다.

 강청하는 기도보다 훨씬 바람직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자 힘쓰고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때를 따라 공급하심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십시오. 우리의 삶 가운데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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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짖는 개들, 곧 참견하기 좋아하는 종교인들, 시끄럽기만 하고 실속은 없는 자들을 피하십시오. 그들이 관심 갖는 것은 온통 겉모습뿐입니다. 나는 그들을, 수술하기 좋아하는 할례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진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이 사역을 부지런히 하고, 우리가 늘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소리를 공중에 가득 채우는 사람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대단한 자격 조건들을 내세운다 해도, 우리 노력으로는 이 일을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배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합법적으로 태어나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엘리트 지파인 베냐민 출신의 이스라엘 사람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엄격하고 독실하게 준수했고, 내 종교의 순수성을 열렬히 수호하면서, 심지어 교회를 박해하기까지 했으며,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낱낱이 지켰습니다.

 나는 저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조건들을, 내가 명예로이 여겼던 다른 모든 것과 함께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내던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전에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내 삶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내 주님으로 직접 아는 고귀한 특권에 비하면, 내가 전에 보탬이 된다고 여겼던 모든 것은 하찮은 것, 곧 개똥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품고, 또한 그분 품에 안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데서 오는 강력한 힘, 곧 하나님의 의를 얻고 나서부터는, 나열된 규칙이나 지키는 하찮고 시시한 의는 조금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죽기까지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나는 그 모든 하찮은 것을 버렸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빌립보서 3:2-11, MSG)

삶에서 안 무너지고 싶지만 무너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니, 많이 있습니다. 죄 가운데 피흘리기까지 싸움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무너질 때가 있으며, 그런 것들이 자책이 되고 정죄감 속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질까봐 두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다윗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주의 기름부으심, 임재가 사라질까봐 걱정했던 것입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처절하게 기도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특히,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생각하며 그 안에서 살고 있을 때 무너짐은 타격을 많이 줍니다. 이러다가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거두어지지는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긴 절망과 낙망의 터널을 지나기도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복입니다.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속을 썩이고 부모가 이렇게 해야 바른 삶이야라고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잘못된 길로 가는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입장에서 아이를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이가 잘못했다고 뉘우치는 모습 속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고 더 사랑하는 마음이 많이 듭니다.
심지어, 육신의 부모가 그럴진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무너졌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다른 어떤 좋은 말도 우리에게 격려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속에서 잠잠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예수 그리스도는 나 같은 죄인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실까를 생각해 보면 생각보다 그런 절망의 터널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가운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에게 보내어 심판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자신들의 모습을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모세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서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살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장대 높이 불뱀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 놋뱀을 본 자마다 살게 되었습니다. (민 21장)
놋뱀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소망함이 없다고 느껴질 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요.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의미, 그 사랑을 느껴보십시요. 그럴 때, 우리 가운데 다시금 회복케 하시고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멋진 사람은 그리스도를 잘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분께 우리의 나약함과 절망까지도 맡겨 드리며 그 분을 의지하는 연습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는 어떠하겠느냐? 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축복합니다.~~

갈 4:29-30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육적인 욕망에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자녀입니다. 즉 육으로 난 자녀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말씀대로 고난과 역경 가운데 기다리면서 말씀이 이루어져 나은 자녀입니다. 이삭을 바로 성령의 자녀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육의 자녀와 성령의 자녀의 대립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마엘처럼 신앙생활의 결과가 육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온다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결국 순종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따른 생각뿐입니다. 교회 봉사를 하면서도 자기를 은연중에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찬양 인도자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찬양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곡이 성도들을 기쁘게 하겠다라는 자기의 생각으로 콘티를 짜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찬양을 인도하는 자는 성도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그런 곡을 부르면 좋아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그 곡이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며 회개 가운데 이끌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곡을 하라고 하시면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콘티를 짜는 사람들이 영으로 인도하는 찬양 인도자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찬양 인도를 해 왔습니다. 해 오면서 육에 이끌려 찬양 인도를 해 온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에 이끌려 찬양 인도를 하기 위해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과연 어떤 곡으로 찬양을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성도들에게 무엇을 전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만 운행하시고 하나님이 하시옵소서. 기다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한 번의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콘티를 놓고 일주일 동안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내 생각대로 성도들이 이런 곡에 감동받으니 이렇게 인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영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에 철저히 순종하고 그분께 주권을 맡겨드려야 하니, 그렇게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길은 어떻게 보면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란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포기했으니 이제는 철저히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그 말씀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 우리 삶 가운데 이삭이라는 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 성령의 법 이삭과 육의 법 이스마엘이 언제나 싸우게 됩니다. 교회가 바로 세워지지 않는 이유는 성령의 법을 따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기다리며 순종하지 않고 육에 이끌려 육신의 생각대로 교회를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의 점검을 하지 않는 이상 한국 교회가 바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으로 설교하는 사람이 있고 영으로 설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설교하는 사람들 중에 성도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이 기뻐했을 것과 같은 비슷한 상황입니다. 뭔가 기쁨은 있지만 그 기쁨은 참된 기쁨이 아니라 곧 근심이 됩니다. 곧 죄악으로 연결되어 생명수가 끊어지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설교하는 사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며 그분의 기름부으심과 임재가 역사하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통로로 내어 주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때로는 강한 메세지를 전달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회개가 바로 생명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정말 필요합니다. 구원의 메세지에 회개가 절대로 빠질 수가 없습니다. 회개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며 자신이 죄인임을 처절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죄 용서를 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깨달은 사람은 다시는 그 죄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에 감히 그 죄를 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는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오는 메세지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다가 정작 그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하도록 초청하는 것이 성령님께서 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분명 육으로 사는 사람은 영으로 사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그것은 사단의 전략입니다. 왜냐하면 영으로 메세지가 선포되고 예배가 드려질 때 악한 영이 비로서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죄도 반복되다 보면 죄가 편해집니다. 우리의 선한 양심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한 권세가 기생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악한 영과 더불어 살던 육의 사람은 드디어 그 속에서 악한 영이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안절부절하게 되고 두려움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이 실체를 드러내느라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안에 있는 실체를 드러내고 쪼개려고 하기 때문에 악한 영이 소유를 주장하면서 두려움을 계속해서 불어 넣는 일들이 성령의 역사가 강한 집회 가운데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의 권세를 예수 이름으로 결박하시고 성령의 검으로 쫓아 낼 때 비로서 우리 가운데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육으로 살고 있습니까? 가장 많이 듣고 있는 소리가 내 자신의 소리입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이 영으로 살고 있습니까?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우리의 영을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신앙 생활을 하면 이스마엘처럼 내어 쫓기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육으로 살던 사람들의 결말은 다 그와 같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 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그 결말이 내어 쫓김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으로 인도받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그것을 내버려 두지 마십시요. 확신이 없는데도 구원받았다라고 믿고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어디있습니까? 그러다가 구원받지 못했으면 어쩌시렵니까?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우리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구체적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지 못했지만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구원받지 못했다고 느끼신다면 이제는 그것을 방치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다고 그 분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려 달라고 적극적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신 분들.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시는지 확신하지 못하시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시는 분들 괜찮다고 생각하고 내버려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그런 신앙의 회의적인 데 자신을 방임하여 인생 끝나는 날까지 갈등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내 가운데 오심을 확실히 가르쳐 달라고, 그분의 음성을 들려달라고 간절히 그 분을 찾으십시요.
 저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이며 살아서 역사하는 신앙이 되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는 그런 역사가 모든 그리스도인들가운데 오기를 소망합니다. 생명을 얻으신 분은 더 풍성히 얻도록 성령을 구하시고, 그렇지 못하신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확실히 내 안에 있음을 보여 달라고 구하십시요.

 주님은 살아계셔서 오늘도 우리 삶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우리가 영으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우리 모두 영으로 사는 사람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며 그분이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다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믿음으로 구하면(받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신뢰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고, 더 좋은 표현은 사랑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믿음을 사랑과 동일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믿음 좋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간절하다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면 믿음으로 구하라. 히브리서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말로만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데 말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실제로 믿지 못하는데 그걸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마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며 하나님 뜻을 구하면서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대로 세상을 향해 중보하면서 그 기도가 능력이 있는 기도가 되고 믿음으로 담대한 선포의 기도가 되기 때문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믿음이 없어서 기도를 해도 소극적인 기도, 선포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냥 입에 맴도는 기도, 하나님의 은사를 사모하지도 않을 뿐더러 관심도 없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가득 불어넣습니다. 그래서 마치 은사를 구하면 뭔가 내 삶이 무당처럼 될 것을 걱정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압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 분을 갈망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충만하며 더욱더 하나님과 친밀함을 사모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려는 갈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해 거룩과 성결을 사모하게 되고, 그럼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충만하게 역사하시며,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흘러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친밀함 가운데 더 풍성함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름부으심 없이 신앙생활 하면 종교적이 되고 율법적이 됩니다. 율법적으로 육적인 것을 죽이려고 하니 시간이 오래 지나도 신앙생활에 많은 투자를 한 것 같지만 변화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성령을 강조합니다. 영으로 육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은혜로 사는 삶이란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아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십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영이 임하여 계신다,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은 인격적인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것은 마치 커피숍에 탁자 맞은편에 서로가 서로의 눈빛을 보고 이야기를 하며 주고 받는 대화가 있듯이 대화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하니, 삶에 어떤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이 다루시는지 영적인 눈이 열리지 못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비로서 말씀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고 하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영혼에 깊은 임팩트를 주는 꿈틀거리며 나의 전존재를 지배하는 변화시키는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셨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해 예전에 귀납적이니, 연역적이니 주제별 성경공부니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저는 가장 최고의 것이 성령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는 것이라고 블로그에 적은 바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말씀이 살아서 연결되고 영적으로 임팩트를 주는 말씀이 되며 마른뼈와 같은 사람들이 생수를 공급받고 비로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나며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연결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같이 동역하며 그 나라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요엘서의 예언처럼 오늘날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에게 폭발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왜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것을 더욱더 추구하며 따라갑니다. 사회는 악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폭발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세대에서도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있었던 사람이 있었지만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시대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시키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갈망함으로 넘치는 사람에게 기름부으심을 폭발적으로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할 때 그 분이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의 영이 가르치시는 것을 모르고 신앙생활이 수동적인 생활, 종교적인 생활로 가득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기름부으심이 모든 것을 가르친다고 그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놀라운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영으로 말씀하시는 대로 주 안에 거하면 요일 2:28절에 우리로 주께서 나타나실 때에 담대함을 얻어 부끄럽지 않는 사람으로 준비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름부으심을 사모하십시요. 기름부으심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부터 불덩이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감싸며 진동속에 전율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영적인 것들을 열어주셔서 우리의 입의 말속에 성령을 담으시며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들의 심령을 찔러 쪼개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랑 즉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이 자라게 되겠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부터 그 분과 교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일상의 작은 삶 가운데서 기도 생활 가운데 하나님 내 가운데 무엇을 말씀하길 원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내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을 순종으로 반응할 때 그분이 우리 삶 가운데 행하시는 것을 직접 체험할 때 말씀이 실제로 육신의 삶 가운데 임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점점 신뢰함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애를 할 때도 상대를 신뢰하게 되는 것은 상대가 말한 것을 실제로 실천하였을 때 상대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인생을 약속할만한 신뢰가 싹터 결혼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말씀속에 나타난 진리가 우리 삶 가운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믿음이 싹트고 믿음이 자라서 열매 맺으며 주님의 보좌 앞에 담대함으로 친밀함으로 나아가 능히 그 보좌를 흔들며 우리 가운데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 바로 믿음의 시작이며, 영적인 여행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믿음의 여정을 시작함에 있어 성령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넘치길 축복합니다.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적었습니다. ^^)

살전 2: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개역개정)
though we might have made demands as apostles of Christ. But we were gentle among you, like a nurse tenderly caring for her own children.(NRSV)


 우리는 영적 권위자 하면 무섭고 딱딱하고 무엇을 정죄하고 꾸짖는 사람의 모습을 많이 떠올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모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권위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행사하지 않기 때문에 왜곡된 권위 행사를 하기 쉬우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이미지도 또한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들은 사역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도 그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겠거니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서로와의 관계를 통해 영적인 것들을 추론하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서로와의 관계가 온전해야 그리스도와 성도의 사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곡된 권위의 행사 관계는 가장 큰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써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지만, 도리어 부드러운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에 바탕을 둔 권위 행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권위 행사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독단적인 폭군과 같은 모습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영적 권위자가 내뱉는 사랑 없는 말 속에 사람들은 영혼의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결국 사랑 없는 영적 권위자가 사람들을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권위는 철저하게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자신이 영적 권위자인 경우 항상 확인해야 할 것이 나에게 주신 이 권위의 행사가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인가를 항상 확인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권위를 행사하지 않거나 하나님 앞에 다시금 자신을 점검한 후 권위 행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저도 항상 체크하는 것이 있습니다. 난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나의 자녀처럼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으려고 수시로 결정합니다. 누군가의 행동에 대해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이런 점을 지적하려고 하다가도 내 마음이 아직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싶으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내 마음이 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지적하고 훈계하기도 합니다.

 사랑에 바탕을 둔 영적 권위 행사 모두가 염두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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