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도단에서 선교보고 하신 유나오미 선교사님의 말씀...

정말

정말 신나게 웃다가 정말 느끼는것도 많았다.

그리고 눈물도 많이 나왔다.


이 말이 인상깊었다...

선교란 내가 무엇을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곳에 그냥 같이 사는 것...


유나오미 자매님이 더욱더 빛나 보이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늘 동행하기도 하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예수 보다 더 귀한것은 없다는 것을 체험하고 산다는 것이다.

부와 명예, 그 어떤 것도...

2004.01.16 18:28

http://misoga.com/sdata/unaomi.mp3

위의 링크 위에 마우스 오른쪽 버턴 클릭, 다른 이름으로 대상 저장 하여 들으세요.

같은 ywam 에 있던 싱가폴 초윤 자매와 함께 우리 부부는 싱가폴로 갔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였다.
말레이시아에서 기차를 타고 정말 오랜시간 동안 걸려서 싱가폴에 갔다.
초윤의 집이 싱가폴에 있어서 거기에 머물수 있었고 정말 우리에겐 좋은 시간이었다.

초윤은 정말 베풀기 좋아하는 자매이며, 정이 굉장히 많다. 지금도 초윤이 정말 우리 부부에게 얼마나 많은 정을 베풀어 줬고 잘 대해 줬는지를 생각하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

싱가폴 사람들은 참 자신감이 넘쳐 흐르는 사람들이다.
도시 국가로 규모가 굉장히 작지만, 잘 사는 나라이다. 그리고, 문화 수준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다.
선진국들과 우리 나라의 차이는 아마 사람들의 정신적인 수준에 달려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정말 많이 배우고 아는 것도 많지만, 사실, 내부를 보면 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많고, 뉴스를 보면 온통 기업들이 탈세 하고, 부정직한 일을 했다는 소리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윤리 의식을 가지고 질서를 지키며 서로를 돌아보고 존중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지하철은 우리 나라보다 작지만 깨끗했다. 사실, 우리 나라 지하철이 더 좋다.
크리스마스 즈음이라서 그랬는지 온통 싱가폴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장식과 이벤트들로 넘쳤다.
거리마다 백화점마다 교회들과 연합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의미를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나누는 모습은 참 부러웠다.
물론, 상업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싱가폴에는 기독인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이 연합해서 이런 행사들을 기획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부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었다.

우리 나라 교회는 참 많지만 연합이란 것이 무엇인지 본 지 참 오래 되었던 것이 마음 아프다.

위는 센토사라는 섬에서 찍은 사진이다.
인공으로  만든 섬인데, 잘 꾸며져 있고, 관리되고 있었다.


위는 주롱새 공원인데,
쵸윤하고 보경 자매만 갔다. 난 그때 배탈나서 집에서 쉬고 있어서
그런데, 나중에 공원 사진을 보니, 꼭 갔었어야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쵸윤 교회에서 뮤지컬을 보고 나서 한 컷 찍었다. 교회가 뮤지컬을 기획하고 할 정도로 참 역량이 있었다.

쵸윤과 쵸윤 집 근처 동네 바닷가 공원에서 사진 찍었다.
어디를 가든, 근처에 공원이 있고, 사람들이 쉴 만한 곳이 있다.


쵸윤 교회 셀 멤버들이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 받아 갔다.
셀 멤버들이 완전히 가족이다. 연령층도 다양하지만, 셀 멤버 간에 무슨 일이 있던 서로 모여서 격려하고 축하하고 위로하고 사랑한다.
이들이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 지를 보면서 참 많이 부러웠다.
심지어, 쵸윤 졸업식에 이 멤버들이 다 왔다. 싱가폴에서 말레이시아 페낭까지 비행기 타고...

참, 싱가폴에 가게 된 계기도 있다.
인도에 갔을 때, 정말 촌에서 한 크리스챤 부부를 만났는데, 나이가 참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이다. 그 할머니께서 예언해 주셨다. 싱가폴과 영국에 대한 부분을... (아마, 갈 거라고 하신 것 같다.)
싱가폴은 갔으니, 이젠 언젠가 영국에 가게 될 듯...

01



싱가폴이 너무 좋았던 것은
쵸윤의 섬김 때문이었다.
내내 우리를 안내하고 먹을 거 챙겨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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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걸어서 세계로의 노르웨이 편을 보면서 느낀 것을 적어본다.
그 프로그램의 여행가가 이런 말을 하였다.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남녀가 평등하고 서로 도와주는 나라이다라고.

이 말은 why not women? 이라는 책에서도 나와 있다.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치고 남녀가 평등해지지 않는 나라는 없다고 하였다.
특히, 신앙이 성숙할 수록 그 평등성은 더 높아진다고...

노르웨이는 인구당 선교사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이다.
노르웨이의 한 젊은이가 그 나라를 위해 기도했을 때, 노르웨이의 거의 온 국민이 예수를 믿게 되고 부흥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적 시스템이나 원리들이 성경에 많이 가깝게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가장 평등하고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남녀 평등의 원리를 주시지 않았다면
기독교적 원리를 받아들인 이 나라에 어찌 남녀 평등의 조화가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

기독교적 윤리와 사상은
인간을 존중하고 목적적인 존재로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이 시대의 대안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나라도 이 나라의 기독인들이 철저히 기독교적 윤리와 말씀에 의해
하나님 뜻에 부합한 성숙한 기독인이 되어 사회를 보다 평등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넘치는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노르웨이의 사람들의 윤리 의식이 상당히 높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가난이나 인권에 관심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선진국이란 정말 국민의 의식 수준이 틀리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 나라는 배우기는 많이 배웠지만 그 배움 하나에 윤리적인 것들을 실천하고 관심을 가지는 면에서 부족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배울 부분들이 많은 것 같다.

---------------
노르웨이의 미래를 생각하며...
노르웨이가 이런 풍요 속에서 점점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페낭에 있던 노르웨이 자매가 이야기했다.
과거의 기독교적 전통과 윤리의식이 현재의 풍요롭고 평등한 노르웨이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결같이 이야기하는데, 현재의 노르웨이의 풍요 속의 방심으로 인한 기독교 정신의 퇴보가 앞으로의 노르웨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변화시킬 지 걱정이 된다.
012
세계 어느 나라도 문제를 갖고 있지 않은 나라는 없다.
우리는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 이 곳에서 살고 있다.
성경적으로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고 생각해 보면,
이 나라에 태어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아래 있는 것이다.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이 나라를 품을 의무가 한국 기독인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나라뿐만 아니라
가정도 마찬가지다.
왜 다른 가정들도 있는데, 나의 가정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아래 누리며 하나님 뜻을 찾아가길 원하신다.
내가 우리 가정 가운데 태어난 것도
나를 위해서나 우리 가정을 위해서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소명가운데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또 특별히 우리 가운데 주어진 각각의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요셉은 야곱의 가정 가운데 태어났고
애굽으로 팔려갔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새롭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과 민족의 어려움(미래에 닥쳐올 가뭄으로 인한 식량의 부족으로 인한 멸망위기-사실 더욱더 심오한 뜻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을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그를 사용해 특별한 상황 가운데 이끄셨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우리 나라와 각 가정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자세를 가져야 할지에 대한 태도이다.

한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을 위해 보다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편협된 민족주의는 아니다.
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평등하고 다 같은 하나의 가족과 같은 존재이지만, 특별히 이 땅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우린 좀 더 이 나라와 민족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매 순간 마다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지금 이 시간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왜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가?
이것은 어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있고 내가 그 가운데 어떤 일을 해야 할 필요가운데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종류의 생각들...

성경 전반에 흐르고 있는 우리의 생활이나 우리의 지위적 현상에 대한 생각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있다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실천하고자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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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다리집 떡볶이 에서 떡볶이와 오징어 튀김을 먹었다.
떡볶이를 평소에 안 좋아하지만, 참 맛있게 하는 집이다.
포장마차에서 시작해서, 건물도 몇 채 주인이 가지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먹었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장모님 덕에 많이 먹었다.

오늘날 이런 종류의 전도 문구를 본 적이 많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방법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
그리고 4 복음서에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 형벌에 대한 내용도 나와 있다.

그래서, 이런 문구가 오늘날에도 효과적이고 그렇게만 전도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들은 왜 오게 되었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시대에는
유대인들도 여러 계층이 있었다.
사두개인(부활을 안 믿는 사람)도 있고, 바리새인, 열심당원 등 여러 계층이 있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많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때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약자가 억압받는 분위기도 많았고, 여러 곳에서 폭동도 일어나던 상황이었다.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현실적인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할이라고 대부분 믿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무엇이 그 사람들을 일깨워주는 문구였을까?
바로 영적인 가치를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진정한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이려는 회개치 않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회개하라에 대한 개념과,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기술했다.

이 상황은 다음 상황을 보면 왜 특수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초대 교회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들을 받고 각종 기적과 능력들을 행하였다.
4복음서 당시의 배경과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이다.
그래서 어떤 계층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영적인 문제와 구별하여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즉, 영적인 것은 가치있고, 현실적인 것은 가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해, 현실 삶이 형편없게 되었다. 성적 범죄, 도덕적 범죄 갖가지 악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히 영적인 것에 대해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지적했고,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야고보서가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서는 예수천당, 불신 지옥 같은 이야기보다는 훨씬 더 도덕적인 삶, 바른 삶에 대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럼,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삶의 목표의 부재, 물질주의적 가치관, 따뜻한 온정의 갈급함 속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전하셨을까?
다시 한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물론, 어떤 특정 계층에게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문구만이 맞는 것처럼, 그런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의 표현인 것처럼 독선적이어서는 안된다.


예전에 길을 가다가 anti-christian의 한 단체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것을 봤다.
그것은 성경에서 어떤 구절들을 떼서 성경은 온갖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것을 조장하고 있다는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실 한 구절만 떼서 보면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바른 해석 방법이 아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면.
내가 하나님은 돈을 받는 걸 좋아하셔라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고 보자.
그럼 그 증거를 찾을려면 하나님이 돈을 내라는 취지의 말씀하신 구절만 찾으면 된다.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정은 성경에 의해 지지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바른 것일까?
절대 바르지 않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구절이 있는데, 다른 구절 들에는 그 이유가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어려운 계층을 돕는 것이 하나의 이유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나의 해석 즉, "하나님은 돈을 받는 걸 좋아하셔"라는 해석이 제대로 된 것인가?
결코 잘 된 해석이 아니다.

그런데 anti-christian 들은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자기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반감에 대해 성경 구절로 증명하는 식의 전단지를 작성해 나눠주고 있었다.
참 어리석은 일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내가 부끄러웠던 것은, 얼마나 이 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영향력을 주지 못했으면 그렇게 오해하고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생겼냐는 것이다.

이런 해석법은 이단들도 같이 사용한다.
이단 교회들의 지도자들도 기존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거기에 부합하는 성경 구절만 취사선택하여 꿰 맞추니 참 그럴 듯 한 주장이 되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속아 넘어간다.

이런 방법을 연역적 성경 해석 방법이라고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신기한 통찰력을 주기도 한다. 번뜻 떠오르는 생각이 성경 전체를 꿰뚫어 보니까 일치하는 경우, 이럴 땐 맞는 해석이 될 수 있지만, 사실 이런 부분은 성령의 충만한 인도를 받기 전에는 참 힘든 부분이다.

그래서, 이런 위험을 줄여주기 위해 귀납적 방법을 많이 쓴다.
성경의 관련된 모든 구절을 찾아 본다음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드물게, 틀린 경우도 가끔 있지만...

요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할 때, 최대한 시간을 두고 성경 전반에 흐르는 맥락을 보면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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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젼의 사람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이재철 목사님이 하신 설교였었는데, 그분은 아마 이 시대의 가장 훌륭한 목회자중의 한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많은 부분을 공감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설교라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설교가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설교 대상을 생각하기에 한쪽으로 중점이 두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점은 내가 교사였기에 잘 안다.
한 반에도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럴 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 할 때,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그룹은 상대적으로 만족 못하게 가르칠 수 있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교인들의 많은 수가 기본적인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소수의 사람이 뛰어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그들에게 설교를 해야 한다면, 소수의 뛰어난 지식이나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보기엔 너무 쉽고 평이할지라도 난 거기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청중들 대상으로 하여 말하는 사람의 한계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청중의 소수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화자에 대해 저 사람은 뭐 저 정도밖에 설교를 못할까? 왜 그렇게 큰 비젼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할까 편견을 갖기 쉽다.

실제로 목사님들도 이런 종류에 의해 평가 절하되고 그들의 설교가 사람들에 의해 비난되어 지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비난을 하려면, 그 설교가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는지, 그리고 내가 평소에 그 설교자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 설교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비난을 한다면 그건 비난을 위한 비난이며 오히려 죄를 짓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왜 내가 비젼의 사람에 대해 썼냐면,
처음의 그분의 설교를 들을 때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에 대해 약간 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분이 스위스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왜 많은 한국 사람이 스위스 로잔에 있는 YWAM까지 와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왜냐면, 그분의 신념은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 어느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지 구태여 다른 곳에 나가서 배운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에서 하신 말씀이셨다.
그런데, 내 경우에 약간 반감이 든 것은, 한국에서의 현실이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반응하는 삶, 과감히 포기하는 삶에 대해서 가르치지 못했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이나 돈을 들여서 다른 곳에 가서 훈련을 받냐는 것이다.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엄청난 한국 교회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럼 왜 그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을까?

그 동안 우리 교회 중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제시한 사람들이 드물었기 때문이 아닐까 쉽다.

나는 사실 수련회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이 있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련회보다 은혜가 넘치는 삶이다. 수련회 가서는 은혜 충만하면서 돌아온 평상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다면 뭔가 잘못된 경우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에 전혀 하나님에 생각하지 않고, 갈망함도 없던 사람에게는 수련회가 좋은 도화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우지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여 어디를 가서 훈련을 받는 것도 좋은 도화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평소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어디를 가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 알고 평소 삶에 충실하겠지만 말이다.

그럼, 내가 이재철 목사님의 그 부분에 반감을 가진 것은 제대로 된 것일까?
이 설교는 장신대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였다.
아마도 신대원생들에게 현실에 뿌리박힌 하나님과의 날마다의 기름부으심과 교제가 필요해서 특별히 그 취지의 말씀을 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나는 그 목사님께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충분히 성숙하고 본이 되시는 목사님으로 스위스 YWAM 에서 훈련받는 사람들을 평가 절하할 생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른 설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라 생각된다.

귀납적 방법으로 설교를 듣는 사람의 자세, 비단, 성경 해석하는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오해 하지 않고 바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 같다.
(물론, 귀납적 방법이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류를 최소한으로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 사람에게만 한정된 건 아니지만,
내가 상대방을 잘 알면 그 사람과 충분한 교제를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간에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묻어난다.
이런 자세들이 우리 가운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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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의 원동력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제시한 것이
만약 부를 가지게 되었다면, 그건 자기 자신을 위해 쓰라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쓰고 흘려보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였다.

사실, 이것이 한국 교회에 무척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혹시 돈을 많이 가지게 된다면, 이 돈은 과연 나를 위해 쓰라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주시는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잘나서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가?
이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런 기회를 주셔서 그런 것이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부라는 것은 흘러서 모든 사람이 부족함이 없도록 사용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많이 가진 자는 나눠 주어서, 사회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계층들(고아, 과부 등)은 부를 나눠 받아서 평균되게 하는 것, 이런 것을 우리 사회에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적 개념과 다르다. 사회주의는 원척적으로 평균적인 부를 추구하지만, 성경적 원리는 가진 것을 자발적으로 나눠주는 원리다.

구약에도 보면, 밭을 소유한 사람이 다 추수하지 말고 일부를 남겨서 가난한 자들이 그것들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원리들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준 율법에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다.

십일조 같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에서 봉사해 소득이 없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든 사람이 십일조를 하도록 권장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부를 더욱더 갖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욕심을 제어하며 한번 자신의 부가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좋은 취지의 제도이다.
물론, 십일조는 정말 성경적으로 쓰여져야 한다. 오늘날 교회들이 교회 건물을 크게 짓는데만 신경쓰고 진정한 성경의 의미의 십일조를 사용하지 못해서, 많은 기독인들이 반감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성경적 부흥은 우선 우리가 가진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왔고, 공동체를 돌보며 서로 돕는 것에서 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한다면 이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단지 그 사람들이 부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교회에서는 가르쳐야 하고, 많은 부를 가지지 못한 사람도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부를 떼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연습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진 것을 서로 나누어 그 나눔의 기쁨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장되는 데 있다.

한 사람이 많이 가진다면 그것은 그 사람만의 기쁨이 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여러 사람과 나눌 때 그 부는 여러 사람의 기쁨이 된다.

천국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이야기 할 때, 외국의 크리스챤들은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장 큰 믿음의 방해 요소로 꼽는다.

따라서 부흥은 가장 큰 문제가 조금씩 고쳐질 때 오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질주의적인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서, 물질을 얻고자 해서 하나님 보다 물질적인 복을 더 간구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물질을 여러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낼 때 부흥은 다시 오게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는 것들이 많이 보인다.
뜨거운 주의 사람들이 이 나라가운데 많아 지고 있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새로운 부흥의 물결이 이 나라가운데 점점 확장되고 있는 것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변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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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겸 형제님이 나눠준 시편 말씀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
무엇이 복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봤던 시간들...

다른 무엇보다도,
다른 어떤 환경보다도

하나님을 알고 그 분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 내게 복이라.
이 구절이 성경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복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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