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0:1-4
그 기도는 곧 응답되었다.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열두 명을 불러 무르익은 밭으로 보내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과, 상한 심령들을 자상하게 돌보는 능력을 주셨다. 예수께서 보내신 열두 명의 이름은 이렇다. 시몬(사람들은 그를 베드로, 곧 '바위'라고 불렀다.),그의 동생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의 동생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세금 징수원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 가룟 유다(나중에 그분에게 등을 돌린 자다.) (MSG)


하나님의 사람들은 두 가지의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상한 심령들을 자상하게 돌보는 능력입니다.
전자는 한국 교회에서 강조된 부분입니다. 아픈 사람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고,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다지 많이 강조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상한 심령들을 자상하게 돌보는 능력.
예전에 훈련을 받을 때 내적치유 과정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처와 아픔들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느 하나 큰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픔들이 많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눈물이 나기도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서 분노하기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유도 없고, 그렇기에 사람들을 깊게 만나서 나눔 속에 포근함을 느끼는 따뜻함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상한 심령들을 자상하게 돌보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이 깨어져서 집에 돌아가도 그곳이 보금자리가 되지 않고, 직장도 경쟁 사회 속에서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며 따뜻한 정이 없는 이때, 교회 마저 포근하게 감싸안는 성령의 따스함이 넘치지 않는다면 어디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까요?
상한 심령들을 돌보는 그 능력이 한국 교회 가운데 우리 가운데 넘치도록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그 상한 심령들에게 다가가서 나의 사랑을 전해줄까?



마 9:14-17
얼마 후에 요한을 따르는 이들이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으로 몸과 영혼을 엄격히 훈련하는데, 선생님을 따르는 이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즐거운 결혼식 중에는 빵과 포도주를 아끼지 않고 실컷 먹는다. 나중에 허리띠를 졸라맬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겨운 축하의 모닥불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예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멀쩡한 스카프를 잘라서 낡은 작업복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서로 어울리는 천을 찾게 마련이다. 그리고 금이 간 병에는 포도주를 담지 않는 법이다."
(MSG)


예전에 대학 다닐 때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툭하면 모 형제 왜 이런 거 안해? 이런 것도 안하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할 수 있냐? 이런 식으로 말을 던지곤 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기쁨입니다. 예수 믿는 기쁨, 예수 믿는 자유함, 성령의 충만하고 풍성한 역사하심 이런 것들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금식 안한다고 정죄하고, 새벽기도 안한다고 정죄하고, 철야 안한다고 정죄하고, 도대체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를 져도 기쁨에서 자발적으로 지는 십자가를 기뻐하시지, 마지 못해서 억지로 하고 남들이 하니까 자기도 할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식의 이끌림은 별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계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힘들었지만 기쁨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몇시간씩 해도 그 기쁨이 충만하였기에 모이기에 힘쓰고 서로 기도하고 예배하는 자유함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회복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신앙생활은 율법적으로 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청년들과 중보기도 모임을 같이 하면서 기도가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 기쁨을 주고 자유함을 주는가를 같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가 흘러가는지 모를정도의 그런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 앞에 반응하는 것,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그분과 교제함의 기쁨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혹, 우리는 이 기쁨을 노예적인 고통으로 바꾸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앞에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선, 그분과 함께 하는 기쁨을 더욱더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마 9:1-8
예수와 제자들은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예수의 고향으로 갔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들것에 실어 데려와서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그들의 담대한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어라, 아들아. 내가 네 죄를 용서한다." 그러자 몇몇 종교 학자들이 수군거렸다. "아니, 저것은 신성모독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왜 이리 수군수군 말이 많으냐? 내가 네 죄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쉽겠느냐? 내가 인자인 것과, 내가 어느쪽이든 행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겠다." 이 말을 하시고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네 자리를 들고 집으로 가거라." 그 사람은 그대로 했다. 무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하나님이 예수께 권한을 주셔서 자기들 가운데서 그렇게 일하신 것을 기뻐했다. (MSG)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바로 죄사함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교제하실 때 영적인 원리들을 드러내시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도,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던 일 중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서도, 풍랑 가운데서도 단순히 현상만 고쳤던 것이 아니라, 영적인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의 교제가 단순히 이 세상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잊고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즐거움을 가지겠지만 그것으로만 끝나선 안되고 모임이 마칠 때는 주님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가 서로를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도록 격려해 주며 헤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시작은 우리의 몸의 욕구로부터 시작되겠지만 그 만남이 깊어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다루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대원에서 만났던 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교육 상담을 전공하셨습니다. 자기와 다른 상담가의 차이가 있답니다. 일반 상담가는 그냥 상담 이론만 실전에 적용시키지만 자신은 기도한답니다. 하나님 성령이 저의 상담을 통해 흘러가서 이 사람의 마음을 영혼을 만져주세요. 저는 이 모습이 우리 가운데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있는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되는 정체성, 영혼을 만지시는 성령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기도하며 사는 모습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 8:28-34
가다라 지방에 일행은 미친 사람 둘과 마주쳤다. 그들은 묘지에서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귀신의 피해자였다. 그들이 너무 오랫동안 그 지역을 공포에 몰아 넣었던 터라, 그 길로 다니는 것을 모두가 우험하게 생각했다. 그들이 예수를 보더니 소리질렀다. "무슨 일로 우리를 힘들게 합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아직 여기에 올 때가 아닙니다!" 저만치 멀리서 돼지 떼가 땅을 파헤치며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악한 귀신들이 예수께 애걸했다. "우리를 이 사람들한테서 내쫓으시려거든, 돼지들 속에 들어가 살게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여기서 나가거라!" 그러자 돼지들이 미쳐서, 우르르 벼랑으로 몰려가더니 바다에 빠져 죽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혼비 백산하여 달아났다. 그들은 미친 사람들과 돼지 떼에게 벌어진 일을 마을 사람 모두에게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돼지 떼가 익사한 것에 화가 났다. 그들은 무리 지어 와서는, 예수께 그곳을 떠나다시는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MSG)

영혼구원의 문제와 경제 논리는 부딪힐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와 관련된 논쟁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돈이면 다른 것들 얼마나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그런데 돈을 쓰면서 그런 일을 하는가?라는 비난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바로 영혼 구원의 문제임을 볼 수 있습니다. 천금을 들이더라도 영혼 구원과 관련된 문제라면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경제논리와 효율성을 따집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은 경제학적인 효율성과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치는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앞에서 경제적 효율성의 문제는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조차 내어 놓는 것이 소중하다는 가르침을 직접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예수님, 이 모습이 어찌 경제적 효율성과 상관이 있을까요?
사랑이 모든 것보다 중요하고 우선적인 가치임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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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8:23-27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배에 오르셨고 제자들도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러던 중에 풍랑이 무섭게 몰아쳤다.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치는데, 예수께서는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급하게 그분을 깨웠다. "주님,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이러다가 빠져 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어째서 너희는 이토록 용기없는 겁쟁이란 말이냐?" 그러더니 일어나셔서 바람에게 잠잠하라, 바다에게 잔잔하라 명령하셨다. "잠잠하여라!" 바다는 고요한 호수처럼 되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눈울 비볐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바람과 바다가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다니!" (MSG)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풍랑이 무섭게 몰아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기도하다가 주님께 집중하면 주님은 이상하게도 침착하시고 평안 가운데 계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럴 때 혼란이 생기죠. 나는 정신없어 죽겠는데, 주님은 그토록 잠잠하고 평안가운데 계시니!!! 그런데 그 주님을 바라보다 보면 내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안정감과 평안이 찾아옵니다.
 제자들이 배 안에 주님이 곤히 주무시고 계시는 모습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면 밖의 풍랑이 무섭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세상의 주관자 되시는데 배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배가 뒤집히거나 침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상황 가운데서 주님이 어떻게 계시는가를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황을 바라보고 계속 그것을 묵상하느니 주님의 얼굴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앞에 잠잠히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주님의 평안이 우리를 감싸며 알 수 없는 힘이 생기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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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8:18-22
예수께서 호기심에 찬 무리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그곳을 벗어나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떠나려는데, 한 종교 학자가 자기도 함께 가도 되는지 물었다. 그는 "어디든지 주님과 함께 가겠습니다."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잘라 말씀하셨다.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묵는 곳은 일류 호텔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던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주님, 부디 며칠 말미를 주십시오. 아버지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예수께서 거절하셨다. "중요한 일이 먼저다. 네 본분은 삶이지 죽음이 아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생명을 좇아라." (MSG)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편입 준비를 하면서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려니 참 많이 힘들었나 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면 참 감동이 됩니다. 고생은 되더라도 그 길이 보람있는 길이며 많은 사람들을 품어주고 살릴 수 있는 길이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를 따르는 일에 대해 예수님은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나를 따라오너라. 생명을 좇아라.
즉 고생하더라도 그길은 생명을 좇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고생을 하더라도 그 길이 보람있고 가치있는 길이라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편하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생명을 살리는 일과 전혀 상관없고 그저 자기 즐거움만 추구하다가 가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주님은 사람의 인생이 고생을 하더라도 생명을 좇는 삶을 살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고생의 길이라도 그 길이 생명을 주는 길이기에 기쁨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때문에 우리 나라가 복된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생은 하더라도 가치 있는 일을 좇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특히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그들에게 생명의 빛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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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8:14-17
일행은 베드로의 집 앞에 와 있었다. 예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니, 베드로의 장모가 몸져누웠는데 열이 불덩이 같았다. 예수께서 그녀의 손을 만지자 열이 떨어졌다. 그녀는 곧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그분을 위해 저녁을 준비했다. 그날 저녁, 사람들이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마음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구해 주셨고, 몸이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이사야의 유명한 설교를 성취하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아픔을 당하셨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MSG)


최근 두 명의 형제와 함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정 가운데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아픔이 느껴져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다들 아픔을 가지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 아픔을 나누고 싶고 위로받고 싶지만 어떤 곳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가 편하지 않은 그런 답답함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치유 사역을 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치유 사역을 하면 그 사람의 아픔이 자신에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 날 몇 일을 그 아픔 때문에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중보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어떤 무너진 부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아픔들이 느껴져서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도 마음이 아픈 사람, 육신의 질병으로 아픈 사람에게 다가가 그 아픔을 당하셨고 질병을 짊어지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 우리의 아픔과 눈물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본인이 직접 담당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는자와 더불어 눈물을 흘리셨고, 아파하는 자와 더불어 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예수님을 더욱더 알아가는 사람은 그분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고 다른 깨어진 부분을 보면서 눈물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때도 그 아픔을 듣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아파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은 정말 깊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눈물흘리는 그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우리도 그런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 8:1-4
무리의 환호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다. 그때 한 나병환자가 다가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주님, 원하시면 제 몸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며 말씀하셨다. "내가 원한다.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그 즉시 나병의 모든 증상이 깨끗이 사라졌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온 동네에 말하고 다니지 마라.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의 표시를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네 나은 몸을 조용히 보여라. 네 말이 아니라, 깨끗해져서 감사하는 네 삶이 내가 한 일을 증거할 것이다." (MSG)

교역자 수련회도 있었고, 이사관계로 묵상을 올리지 못했네요. ^^

1. 내가 원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선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모습 속에 드러난 성품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습니까? 삶에서 저주 받았다고 느껴지는 그런 비참한 상황 가운데 있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은 고치시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상황을 바로잡길 원하시고 치료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오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 병에 나의 이 문제에 관심이 없으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자녀의 고통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내가 원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시간속에서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빠른 응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깨끗해져서 감사하는 삶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거룩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로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떠듭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실천에 옮겨지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주께 받은 은혜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감사를 제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으로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제가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겠지요.

두 가지를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의 문제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해결하시길 원하신다는 것이고, 해결 그 이후에 우리의 삶으로 옮겨져서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시고 자식들이 부모님 뭘로 갚을까요 그러면 부모님은 이렇게 말하죠. 그저 너희들이 삶 속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그 이상이겠지요^^

좋은 하루 되세요.

마 7:7-12
하나님과 흥정하지 마라. 솔직하게 말씀드려라. 필요한 것을 구하여라. 우리는 쫓고 쫓기는 게임이나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 아이가 빵을 달라고 하는데, 톱밥을 주면서 아이를 속이겠느냐? 아이가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살아 있는 뱀을 접시에 담아 아이에게 겁을 주겠느냐? 너희가 아무리 악해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자기 자식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킨다. 그렇다면, 너희를 사랑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낫지 않으시겠느냐? 여기, 간단하지만 유용한 행동 지침이 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지 자문해 보아라. 그리고 너희가 먼저 그들에게 그것을 해주어라. 하나님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설교를 다 합한 결론이 이것이다. (MSG)

1) 하나님과 흥정하지마라. 솔직하게 말씀드려라. 필요한 것을 구하여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기도의 자세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그냥 필요한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되는데, 꼭 비비꼬아서 어렵게 말하기도 합니다. 진심이 아닌 말을 늘어 놓기도 합니다. 뭐 하나님 이런게 필요하긴 하지만, 안 주셔도 되고, 뭐 어찌고 저찌고...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나아가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솔직하게 마음의 소원을 아뢰며 나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또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아이처럼 솔직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겸손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지금 당장 내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말해 보십시요.
2) 사람들이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지 자문하고 먼저 그들에게 그것을 해 주어라.
이 원리는 정말 중요합니다. 리더가 되어 존경받고 싶은 사람은 먼저 자기 리더를 존경하십시요.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사랑하십시요. 선물을 받고 싶으면 먼저 선물을 주십시요. 공동체에 보면 쓸데 없이 욕심만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어떠한 행동도 안하면서 나는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야라고 말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조건 사랑하셨으니, 너희도 그래야 해. 이런 식의 말은 한심스러운 말입니다. 번지수 잘못찾은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도 나를 무조건 사랑해야 해 이런 식으로 말하십니까? 오히려 우리보고 다른 사람들을 그 사랑으로 사랑해라고 말씀하시죠. 제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분명하게 번지수 잘 찾게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먼저 해 주어라. 이것이 모든 설교와 율법의 결론이라고 했습니다. 칭찬받고 싶으면 먼저 상대를 칭찬해 주십시요. 관계도 이런 식으로 적용하고 살기만 한다면 그닥 어렵지 않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용 ^^
마 7:1-6
사람들의 흠을 들추어내거나, 실패를 꼬집거나, 잘못을 비난하지 마라. 너희도 똑같은 대우를 받고 싶지 않거든 말이다. 비판하는 마음은 부메랑이 되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네 이웃의 얼굴에 묻은 얼룩은 보면서, 자칫 네 얼굴의 추한 비웃음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네 얼굴이 멸시로 일그러져 있는데, 어떻게 뻔뻔스럽게 '네가 네 얼굴을 씻어 주겠다'고 말하겠느냐? 이 또한 동네방네에 쇼를 하겠다는 사고방식이며,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보다는 남보다 거룩한 척 연기를 하는 것이다. 네 얼굴의 추한 비웃음부터 닦아 내라. 그러면 네 이웃에게 수건을 건네줄 만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MSG)

제가 못 참는 것 중의 하나가 자기도 똑같으면서 다른 사람을 같은 제목의 이유로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참 씁쓸한 웃음이 나옵니다.
몇년전에 제가 아는 어떤 형제 하나가 다른 지체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 형제는 그 사람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적했을 때 불같이 화내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너무도 남을 생각하느라 자신에게 그런 모습이 있는지 발견하지 못합니다.
저는 관계에 있어서 많은 부분은 자신에게 가르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허물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흥분하는 자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세가 아닙니다.
혹시 내 안에 그런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며 하루를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거룩하게 나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사람 됩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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