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6
하나님께 입맛이 당기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분은 너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식이요 음료다. (MSG)

 한 해가 시작될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합니다. tv를 보다보니 부자되세요라는 말을 많이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 있을 때도 신년만 되면 중국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온통 복을 기원하는 종이 같은 것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복은 아마도 돈이 되겠지요. 돈의 복, 건강의 복, 자녀 출세의 복, 운수 대통의 복 등등 여러가지 복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입맛이 당기는 너희는 복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식이요 음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부분을 통틀어 보면 하나님을 복으로 삼는 사람, 즉 그 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눔을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자기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하나님이 채워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교제 보다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그 분만을 가장 큰 복으로 여기며 그 분을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게 사랑할 수 있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 그 분을 신뢰하며 그분과 깊은 교제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우리는 입맛이 당기는 걸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 그 분 자체를 신뢰하는 마음이 생긴 걸까요? ^^;;;
그러니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신겁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의 상황 가운데 너희에게 이런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죠.
 즉, 사람들이 저보고 너는 이런 면에서 복 받았다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선기야 너 이런 면에서 복 받았다라는 것이 정말 많이 틀립니다. 사람들로부터 그런 평가를 받아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 주신 참 복이 무엇인지 발견하여 감사를 드리는 한 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내 삶 가운데 드러나시고 그 분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는 삶 다시한번 다짐해 봅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마 5:4-5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만족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모든 것의 당당한 주인이 된다. (MSG)

 
 마태복음은 구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언의 성취에 대한 부분이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 습니다. 그래서 기억하셔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동안 스스로 해 보려고 했는데, 결국 좌절과 절망 뿐이지 않느냐?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하시겠다. 하나님이 직접 구원하시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시다. 즉, 예수님이 직접 너희들 가운데 가르치시고 위로하시고 함께 하시겠다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기억해야 마태복음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8복의 내용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본문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는 부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러분, 애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애통해야 하나님 앞에서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약간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애통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너희가 그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그 속에서도 어려움과 핍박을 겪어서 혹시 애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인생의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여 그 속에서 하나님 뜻이 어디 있는지 애통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고 위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봐야 올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패커도 이런 해석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데,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도 그런 잃어버린 양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너희들 이렇지? 힘들지? 이런 너희들에게 이제는 복이 있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나에게 왔기 때문이고, 나의 품에 안길 수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율법주의로 바꾸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내가 너희를 이제 품에 안겠다. 주인없는 목자처럼 방황하는 너희를 내가 직접 안겠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구절들을 우리는 이러이러 해야 합니다. 복 받기 위해 이러이러 해야 합니다.라고 바꾸면 또 악순환인 은혜를 율법주의로 바꾸는 역할밖에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 가운데 힘드시고, 어떤 사람도 여러분 곁에 없다고 느끼십니까? 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과정 가운데 아무도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 없습니까? 그래서 애통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정하시고 품에 안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떤 음성보다 격려보다, 하나님의 격려와 인정을 받을 때 우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품겠다. 걱정하지 마렴. 너희들은 내가 인정하는자야. 힘내렴.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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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에 갑자기 반주자가 못 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땜방 전문 사역자(^^;;;)인 저는 긴급 투입되었습니다.
찬양 인도만 했었지 반주는 하지 않았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신디로 반주를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손이 내 손이 아니더군요. 부드럽게 움직이는 신들린 손놀림이었는데...
한참을 그렇게 반주를 했습니다.

본당 앞에 여자 전도사님 두 분이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하고 있더군요.
찬양을 열심히 하시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두 분이 서로 이야기하면서 공평 하신 하나님을 말하며 찬양했답니다. 감사하면서...

내용인즉슨
장** 전도사님, 찬양인도도 잘하고 반주도 잘하고 등등...
이야기를 하시다가
하나님은 얼마나 공평하셔요?
우리 장 도사님 키도 작으시고 머리도 빠지시고 계시고
정말 하나님은 공평하시죠!!!

두분이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더 깊이 예배로 나아갔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서 눈가에는 습기가 가득찼습니다. ㅠ.ㅠ
마 5:1-3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으로 인해 큰 무리가 몰려드는 것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셨다. 예수께 배우고, 그분께 인생을 건 사람들도 함께 올라갔다. 조용한 곳에 이르자, 예수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산행에 함께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이렇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있다.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MSG)

오늘은 두 가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플로이드 맥클랑은 하나님을 우리가 볼 수 없으니 하나님이 어떠신 분이신지 직접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플로이드 맥클랑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타내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 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모아 놓은 것이 성경이지요. 성경을 읽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습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라는 책에서 저자인 문희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수다쟁이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잘 모르겠다면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신 분이셨습니다. 태초부터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을 하셨으며 그 이후로도 계속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제자들을 시간만 나면 끊임없이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시고, 직접 해설도 하시고,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말씀도 하시고, 제자들이 서로 싸울 때는 그것을 지적하시기도 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또한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수다쟁이라는 표현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으시며 우리를 성장시키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가 이미 만들어 놓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물론, 자녀가 아버지 앞에 그 모든 것을 말씀드리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시려고 하고 가르치시려고 하는 것들을 듣는 것은 어떨까요? 산으로 올라갔을 때 예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을 사람들은 듣습니다. 2010년 한 해 우리는 우리는 각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먼저 예수님이 앉으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조금만 눈을 들어보면 예수님이 저기 계신 것이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여 먼저 듣는 것은 어떻습니까? 너무 우리의 말이 많았고 우리의 생각이 많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쓰임 받는 많은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의 계획을 물어보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들을 깊게 생각하며 그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2. 마태복음 1장에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을 때 그 이름을 예수-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고 지으라고 천사가 말합니다. 사람들은 계속 실패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볼려고 했을 때 잘 살았던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죄악의 수렁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모습을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직접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려고 하셨습니다. 그 이름이  예수, 하나님 그분 자신이 직접 구원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사람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인간으로 이 땅 가운데 사시면서 제자들과 더불어 배고픔과 아픔들 모든 고난들을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시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면서 예수님도 똑같은 그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함께 하니까 이 시간들 가운데 힘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 그분의 삶을 의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우리 혼자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겨 드리며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살아보라고, 그럴 때 우리 삶에 영원한 기쁨과 생명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있다.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작아질 수록, 작아져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뜻을 내려 놓고 우리의 힘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그분의 생각과 뜻이 우리 가운데 자리 잡도록 하고 그분의 이끄심대로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 때 그 분의 다스림은 커지며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복이 충만하게 넘칠 것입니다.

 2010년 한 해 하나님께 맡깁시다. 우리의 작음을 인정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계획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께 맡겨 드립시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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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18-25
고기잡이는 그들의 평소 직업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가자. 내가 너희를 새로운 어부가 되게 하겠다. 잉어와 가물치 대신에 사람을 낚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대로 그물을 놓아두고 그분을 따라갔다.(중략) 예수께서 거기서부터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예수께서는 회당을 집회 장소로 삼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가 그분의 주제였다. 바로 지금,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질병과 잘못된 생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리아 전 지역에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정신 질환, 정서 질환, 신체 질환 할 것 없이 아픈 사람이면 누구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쳐 주셨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행렬은 끝이 없었다. (MSG)

 그리스도인들의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고, 완전한 신으로 오셨습니다. 여기에 신학적인 의미가 많이 있지만 별로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안 좋아하는지라(^^;;;), 좌우지간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말은 그분이 참된 인간의 길이 무엇인가, 즉 example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본이 되는 인간상을 마음에 두고 그 사람을 닮아가려고 합니다. 그 말 뜻에는 우리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마음 속에 이상적인 인간을 놓는 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사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닮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시지? 어떻게 그분을 닮아가느냐? 라고 말하지만, 히브리서에서는 그분이 인간으로 우리가 겪는 고통을 똑같이 겪으시고 참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행동 하나 하나를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원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분이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그 분은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하나되셔서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혼자 거하셨던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같이 계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원리 중 하나는 바로 공동체성입니다. 같이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실망했다고 하면서 자기만 신앙 생활 잘 하면 되지 이러면서 혼자 신앙 생활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공동체를 통해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 창조 때부터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리더 중에서도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리더가 있습니다. 자기가 다 할 줄 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일을 맡겨 주지도 아니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 분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할 줄 알아도, 부족해 보여도 사람들을 세우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실 일들이 놀랍도록 확장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 지금의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 고생 충분히 이해하고 격려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위를 혼자만 누리시고 계시고 혼자 다 일을 하려고 하신다면 같이 가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직장 가운데서도 일정 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성장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교회 가운데서도 자기가 정말 잘해도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너가 해 볼래? 하면서 기회를 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속터지는 일들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큰 감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연말 시상식을 보면서 어떤 여배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동안 철저히 무명으로 있었던 저에게 모 작가님께서 나를 선택하여 주셔서 기회를 주셨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작가님은 작년인지 재작년에도 어떤 여배우의 고백 속에서 언급되었던 분이셨습니다. 항상 기존의 인기있는 사람들만 찾는 제작 현실 속에서 과감하게 신인들에게 기회를 주시는 그 작가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같이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더 나눌 것이 많지만 너무 길면 읽기에 화 날 수도 있으니,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기회를 줬던 것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면서 그들이 성장하도록 도우라고 부탁하십니다.
 2010년 한 해는 나 자신만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흘려 보내며 그들 또한 하나님 안에서 제자로 성장하여 하나님 나라에 유용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은 어떨까요? 비단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유용한 사람들이 계속 생겨나도록 돕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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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4:12-17
예수께서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예수께서는 고향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기슭에 자리한 호숫가 마을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이로써 이사야의 설교가 성취되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 이방 사람들의 중심지인 갈릴리, 평생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칠흑같이 어두운, 죽음의 땅에 앉았던 그들이 해 돋는 것을 보았다. (MSG)


 2010년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신대원을 졸업하고 전임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길, 낯설은 길, 상처받고 깨어진 곳에 들어가는 길이 저에게는 펼쳐져 있습니다. 그럴 때 느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해를 시작하는데 한 해를 힘차고 기대하며 맞이하실 수도 있고, 올 한 해 또 어떤 일이 생길지, 어떤 낯설은 환경 속에서 적응해야 할 지 긴장 되시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과 만나서 어떤 긴장 관계에 들어가야 할지, 또 나는 어떤 식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지. 이런 생각도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요한이 체포되자마자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사실 요한은 동역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도왔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요한이 체포가 되었고, 이제 모든 사역은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하게 되셨습니다. 그럴 때 사실은 나에게 익숙한 환경 속에서 그냥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분의 새로운 발걸음을 고향 땅 나사렛을 떠나,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고 예비하심이 있던 그 소외되고 상처받은 주변 땅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말씀이 바로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복이 되게 하겠다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익숙한 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면서 그 곳에서 울고 웃었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그 곳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성장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항상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익숙한 곳에 물들어서 어떤 믿음의 발걸음도 옮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의지이던 아니던 새로운 곳으로 우리를 옮기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다면, 이전 것은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결정하며 주님의 뜻이 있는 곳에 나의 뜻이 있기를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어떨까요?

 저도 제 맘에 안 드는 곳이라고 생각될 지라도, 올 한 해 그저 주님의 뜻이 있는 곳에서 이전의 생활은 잊어버리고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리라 결심해 보며 하나님 저와 동행하시며 보내시는 곳에 주님의 지혜를 구하며 새로운 시작을 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는 하루로 보낼 생각입니다.

 낯선 곳, 깨어진 곳, 새로운 곳으로 가시는 믿음의 발걸음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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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3학년 2학기에 예배의 실제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예배를 주제에 맞게 기획을 합니다. 저희 팀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저희는 성찬과 세례과 포함된 예배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각각의 말씀 근거와 이론들을 사용해서, 성찬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빵으로 해야 한다. 떡으로 해야 한다. 포도주로 해야 한다. 포도즙으로 해야 한다. 성찬 집례시 까운을 입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 성찬에 이런 멘트를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세례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세례시에 사용되는 물에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세례의 분위기가 유쾌해야 한다. 아니다 엄숙해야 한다. 축제처럼 되어야 한다. 아니다 진지해야 한다. 이런 논쟁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지식과 교회 전통이 어떠했는지에 따라 불붙게 되었습니다.
 이런 후에 어떤 형제님이 말하신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왜 교회가 교단이 분열되는지 이해가 된다고. 왜 서로 사이가 갈라지는지 아주 깊이 느껴진다고... ^^;;;
 사실 교파가 나누어진 것도 아주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본질과는 상관도 없는 것 때문에 교단이 나누어지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ㅠ.ㅠ
 이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12, 13장을 우리는 수없이 읽으면서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4:1-3 그 후에 예수께서 성령께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시험을 받으셨다. 그곳에는 마귀가 대기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밤낮으로 사십 일 동안 금식하며 시험에 대비하셨다. 그러다 보니 허기가 극에 달했고, 마귀는 첫 번째 시험에 그 점을 이용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 돌들한테 말해서 빵 덩이가 되게 해보아라."
4 예수께서 신명기를 인용해 답하셨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말씀이 있어야 한다."
5-6 두 번째 시험으로,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도성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앉혀 놓고 말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뛰어내려 보아라." 마귀는 시편 91편을 인용해 예수를 몰아세웠다. "그분께서 천사들을 시켜 너를 보호하게 하셨다. 천사들이 너를 받아서 발가락 하나 돌에 채이지 않게 할 것이다."
7 예수께서 신명기의 다른 구절을 인용해 응수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8-9 세 번째 시험으로, 마귀는 예수를 거대한 산 정상으로 데려갔다. 마귀는 선심이라도 쓰듯, 지상의 모든 나라와 대단한 영광을 두루 가리켜 보였다. 그러고는 말했다. "전부 네 것이다. 무릎 꿇고 내게 경배하기만 하면 다 네 것이다."
10 예수께서 딱 잘라 거절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리고 세 번째로 신명기를 인용해 쐐기를 박으셨다. "주 너의 하나님, 오직 그분만을 경배하여라. 일편단심으로 그분을 섬겨라."
11 시험은 끝나고 마귀는 떠났다. 대신에 천사들이 와서 예수의 시중을 들었다. (MSG)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번지수를 잘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높은 뜻 교회의 김동호 목사님이 사경회에서 설교한 내용 중의 하나인데, 성경아 남편들아 이러해라 라고 이런 구절이 있으면 아내들이 남편에게 그 말씀 가지고 봐라 이렇게 되어 있지 않느냐라고 말한답니다. 똑같이 성경아 아내들아 이러해라라는 구절이 있으면 꼭 남편들이 아내보고 성경에 이러해라라고 주장한답니다. 이건 번지수를 못찾은 거라는 것이죠.
 아내들아, 라고 했으면 아내가 읽으면서 자기에게 적용하라고 있는거지, 남편들이 아내보고 이렇게 하라라는 말로 훈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꼭 나에게 다가오는 구절이 있으면, 이 구절은 어떤 누가 읽어야 하고 감동받아야 하는 구절인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지요.
 어떤 분과 새벽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부르짖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후에 저와 논쟁이 붙었습니다. 저는 조용하게 묵상 가운데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는 성경에 어디 기도를 조용히 하는 것이 있느냐? 기도는 부르짖어 하는 것이다라고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씀적 근거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성경에는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고난이 많아 차마 입술로는 부르짖지 못하고 꺼이 꺼이 하면서 입이 안 떨어지고 마음속에 깊이 부르짖음으로 기도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숱하게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라는 구절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말 많이 하려고 하지 말고 골방에서 기도하라라는 말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바울이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한 점은 무엇입니까? 또한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성경 구절은 무엇입니까? 디모데가 기도 방법은 무슨 방법이든 상관없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은 또한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숱하게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들으라는 표현들은 무엇입니까? 부르짖는 기도도 좋고 조용히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기도도 좋고 방언으로 하는 기도도 좋고, 일어서서 공격적으로 하는 기도도 좋고, 사단을 대적하며 큰 소리로 선포하는 기도도 좋습니다. ^^;;;
 (참조 : 항상 말씀 논쟁은 본문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만 인용하여서 생깁니다. 올바른 말씀 인용은 문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르짖으라 햇으면 왜 부르짖으라고 했는가?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으면 왜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는가? 등등이죠. 이걸 생각하는 게 올바른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단순히 적혀 있다라고 말하는 식의 말씀 인용은 사실 본질을 잃게 됩니다. 제가 근거로 들은 말씀 구절도 올바른 인용이 아닌 것을 밝혀 둡니다. 그분의 똑같은 논리 구조로 반박했을 뿐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

 결국 신앙에서 우리 각자는 은혜 받았던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가장 잘 아셔서 특별하게 이용하셨던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자기에게 그 방법으로 은혜를 주셨으면 다른 사람도 그런 방식으로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또한 주장하는 것은 신앙의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찬양의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전도단에서 하는 방식의 찬양 집회에서, 어떤 사람은 두란노에서 하는 방식의 찬양 집회에서, 어떤 사람은 기도원에서 북치고 성령께서 춤추게 하는 방식으로 찬양을 할 때 하나님을 깊게 만나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의 통로가 된 것이지 절대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할 때도 자기가 은혜 받은 구절만 보는 것은 참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런 구조가 특히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께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시험을 받으셨는데 사단이 시험했던 방법이 바로 "너는" 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뛰어 내려 보아라, 세상은 전부 네 것이니 내게 경배해라. 사단은 자꾸 너는 이런 존재이다. 너는 높은 존재이다. 너는 세상의 왕이 될 존재이다.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화법을 보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주 너의 하나님, 오직 그분만을 경배하라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모든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느냐를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능히 높은 곳에서 떨어지셔도 천사가 받들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돌을 빵 덩이가 되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경계의 범위,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를 스스로 침범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모든 생각의 관점은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이끄시냐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범위를 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귀는 계속 나 자신을 높이고 인간을 높이고 인간에게 주어진 범위 내에서 하나님이 누리게 하신 것들을 넘어서게 만듭니다. 선악과의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꾸 자신에게 주어진 범위를 떠나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의 모든 근원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세상의 것을 창조한 것인양 범위를 넘어서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사단도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시편 91편을 인용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천사들이 너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자기 맘에 드는 구절이라 취사선택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를 들어야 하고 그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내가 성경책을 넘겨보다가 내 맘에 쏙 드는 말씀만 취사선택하거나, 이건 다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라고 하면서 내 자신의 욕구에 따른 번지수를 잘못 찾아간 말씀을 취한다면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나 자신의 욕심을 내려 놓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가득채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말씀을 읽다가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먼저 하나님 혹시 무엇을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역자이다 보니 의욕에 앞서서 제가 의도한 것을 말씀이라는 도구로 말하는 죄를 범할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분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 나에게 하신 것이면 나에게만 적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전하라고 하시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번지수를 잘 찾아가는 신앙, 주어진 범위와 한계 내에서 하나님의 주권만이 드러나게 하는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2009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며 혹시 나의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은 뒤에 계시고 나 자신만이 빛났던 적은 없었습니까? 나 자신만을 높이게 하는 사단의 전략에 말려 버렸던 적은 없습니까? 오늘 본문의 예수님처럼 하나님만이 드러나시게 하며, 모든 삶의 근원이 하나님만이 되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십자가 뒤로 감추시고 하나님만이 찬양 받으시는 분이 될 수 있도록 2010년을 하나님께 우선적으로 드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가오는 2010년 한 해, 우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만이 인생의 주인 되셔서 우리를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가르치시고 자라게 하시길 원합니다.

 한 해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깊은 묵상이 있는 하루, 감사가 있는 하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마 3:15-17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호하셨다. "내 말대로 하여라.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하나님의 바로잡는 역사가 바로 지금, 이 세례 속에서 하나로 모아지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말씀대로 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셨다. 성령과 더불어 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으로 선택하고 구별한 내 아들, 내 삶의 기쁨이다." (MSG)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가셨습니다. 사실 그 당시 관습으로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제자가 된 것을 의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바울 서신(고린도전서0을 보면 나는 아볼로파다, 게바파다 등등의 논쟁이 있어서 바울이 나는 몇 사람 외에 세례 안 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지극히 겸손하구나 이런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행동이 아니라, 요한이 선생님처럼 비춰지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면서 그 당시 인기있는 지도자였던 요한을 불러서 예수님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사람들은 다들 오, 저 사람이 누구길래 하면서 아마 예수님은 단번에 인기 있는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데에 있음을 알고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저는 요새 영적 권위라는 주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르치셔서 하나님께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이 욕심이라는 것이 많습니다. 교회 내에서 보면 오히려 사역자들보다 뛰어난 성도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모든 면에서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겸손함으로 묵묵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재능이 뛰어나다고 판단하고 겉으로는 잘 따라주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절대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안 보이는 곳에서 쓴 말을 뱉어 놓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삶의 변화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어떤 능력적인 존재인가에 따라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새롭게 하는 역사는 바로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 겸손하게 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섬기라고 말씀하시면 그냥 거기에 순종하여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될때, 놀라운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Matt Redman이 찬양 가사를 통해 고백했듯이 화려한 음악보다 그 모든 조명이 다 꺼지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만날 때 마음의 중심을 드릴 때 바로 나는 참된 예배자로 서 있다는 그 고백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것이 내 성에 차지 않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그 분의 뜻에 따르며 기도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성령이 물 붓듯 부어짐을 경험해 봅니다.

 여러분이 있는 자리,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자리라면 아무리 작은 자리라도 감사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 순종을 제사보다 낫게 여기시며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를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새롭게 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자리만 꿈꾸다가, 남보다 더 우월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성령이 일하시는 그 놀라운 통로가 되지 못하고 평생 자기 힘만으로만 나아가는 안타까움으로 귀결되는 삶을 살았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 3:11-12
내가 이 강에서 세례를 주는 것은, 너희의 옛 삶을 바꾸어 천국의 삶을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너희 안에 천국의 삶을, 너희 안에 불을, 너희 안에 성령을 발화시켜, 너희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그분께 비하면 나는 잔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은 집을 깨끗이 하실 것이다. 너희 삶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참된 것은 모두 하나님 앞 제자리에 두시고, 거짓된 것은 모두 끄집어내어 쓰레기와 함께 태워 버리실 것이다.(MSG)

 변화되고 싶지만 변화되지 않는 시간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때의 안타까움, 또는 변화되고자 하는 마음 조차도 없는 그런 절망감. 이런 것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가득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수련회를 가도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했었어도 왜 그렇게 제 마음은 냉랭하고 삶이 변화되지 않았는지요? 다른 사람들은 생명력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겪으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다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결단도 해 보았으나 또 실패하게 됩니다. 삶은 점점 꼬여 갑니다.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뭔가 해 보려고 이리저리 발버둥치고 삶의 허무함을 해결해 보려고 이곳저곳 기웃거려 보았지만 해결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가복음 4장 16-21절 사이의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시니
그가 나를 택하여,
가나한 사람에게 복된 소식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다.
나를 보내셔서, 갇힌 사람에게 놓임을,
눈먼 사람에게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고,
눌리고 지친 사람을 자유케 하여,
"지금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해!"라고 선포하게 하셨다.(MSG)

자기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 했는데 결국 절망 가운데 사로잡혔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 가운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이제는 너희들이 일하는 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해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라고 선포합니다. 너희들 너무 힘들지? 잘 안 되지? 내가 할께.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냥 맡겨 봐. 언제까지 너희들의 힘만으로 하다가 결국 안되어서 눈물 흘리는 날들만 가득할꺼니? 이렇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1999년은 저에게 참 의미있는 해였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과거의 삶에 실수를 너무도 많이 해서 가슴이 아팠던 해였습니다. 대학생활 때부터 다니던 교회에서도 저에게 다가와서 사랑을 주었던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미성숙하였고, 그리스도인 같지 않았던 저의 모습은 저 자신이 생각하여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절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 오셔서 절 도와주세요. 매일 매일이 눈물이었습니다. 그러길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성령께서 제 삶을 감싸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이 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새벽기도를 나갔었는데 기도제목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속 깊은데서, 선기야, 너가 지금 기도제목을 다 들고 나왔는데, 너를 누가 창조했니? 누가 가장 잘 알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너는 먼저 나한테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들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저는 머리를 망치로 두드려 맞은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이 음성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이 생각은 어디서부터 나왔습니까?
저는 그 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나중에 예수전도단이라는 곳에서 하나님 음성 듣기라는 것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예수전도단 뿐만 아니라, 여러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뜻대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듣고 그 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내 삶을 맞춰가는 삶. 제가 일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고 하나 하나의 계획을 가지시고 인도하시는 삶. 이 삶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너희 안에 천국의 삶을, 너희 안에 불을, 너희 안에 성령을 발화시켜, 너희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그분께 비하면 나는 잔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은 집을 깨끗이 하실 것이다. 너희 삶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참된 것은 모두 하나님 앞 제자리에 두시고, 거짓된 것은 모두 끄집어내어 쓰레기와 함께 태워 버리실 것이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실 때, 바로 진짜의 삶이 시작됩니다.
아직까지 저는 연약한 점이 많고 훈련되어야 할 점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하나 하나 가르치시고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저의 공로가 없는 것입니다. 삶도 조금씩이나마 변화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발버둥쳐도 되지 않았던 그 견고한 삶이 말입니다.
지금도 무너지는 일이 많지만 그래도 기대합니다. 하나 하나 다루실 주님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쓰레기들이 다 태워지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한 사람 되길 소원하며 그분을 전하는 사람 되길 원합니다.

2009년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성령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신앙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기도합시다.
하나님 내 삶 가운데 말씀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심을 알게 하시옵소서. 성령님 오시옵소서. 행하소서.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과 대화하길 원합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인도받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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