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도우슨의 중보 기도 원칙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1. 하나님 찬양과 감사
2. 회개
3. 내 생각 내려 놓기
4. 성령께서 나를 주장하시도록 초청
5. 사단의 권세 차단
6. 잠잠히 기다리기.

뭐 이런 단계입니다. 번역한데에 따라서, 3,4,5번 같은 경우 순서를 바꾸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세 가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음성 또는 내 음성, 사단의 음성입니다.
그러니 음성듣기에 있어 성령께서만 말씀하시도록 성령의 임재를 구하고 내 음성과 사단의 음성을 차단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간단하죠?

잠잠히 기다릴 때 우리 안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떠오릅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분석하는 것이죠.
때로는 주님이 우리의 상태를 지적하실 수도 있고, 누구를 위해 어떤 영역을 위해 기도할 것을 떠올리게도 하실 수도 있으며, 어떤 일을 행할 것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정을 위해서 마인드맵이 사용될 때 훨씬 효과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큰 그림을 가장 큰 주제로 하여
구체적인 것들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리더들이 공동체를 운영할 때나 어떤 모임을 인도할 때
방향성을 미리 가지고 가는데 유용하겠죠!!!

또는 하루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을 실천하는데도 유용할 수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적었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잘 생각해 보시고 적용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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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1-2
나 바울은, 우리의 산소망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특별한 임무를 맡은 사도입니다. 나는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믿음 안에서 나의 아들 된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온갖 좋은 선물이 그대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MSG)

디모데 전서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특별한 임무를 맡은 사도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라고 말하고 있으며 수신자인 디모데에게도 믿음 안에서 나의 아들 된 디모데라고 말합니다.
결국 바울의 머릿속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만들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가게 되었고, 디모데도 그리스도 때문에 동일하게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빌레몬서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에서 오네시모라는 빌레몬의 종이 나옵니다.
그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주인의 돈을 훔쳐서 달아났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물론이요, 세상적으로 봐도 아무런 유익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있던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을 만나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듣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듣습니다. 그리고 차츰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편지안에 오네시모라는 무익하던 종이 그리스도를 만나서 하나님 계획 안에 있게 되고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향해 아무리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 뛰어 들어 하나님과 더불어 나가던 사람이 아닌, 사단의 계획 아래로 자신을 맡겨 파멸로 가던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과 상관없던 자들입니다. 무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유익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고 생명을 가지는 사람들이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실 일들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 비젼을 주십니다.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유익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리더가 되는 첫 걸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3절의 내용과 같이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하시는 일에 뛰어들었다. 바로 그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자기 힘으로 바로 서려고 애쓰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 세워 주실 것을 신뢰했다." (MSG)

사단의 계획을 따르던 것을 벗어나 돌이켜(이것이 회개이죠)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획 아래로 뛰어드는 것(이걸 중생이라고 하죠 새로 태어남입니다. 다시 태어남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 아래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받았고, 디모데도 마찬가지로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되고 바울과 연결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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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부의 리더들과 리더쉽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리더쉽과 관련되어 좋은 책도 많이 있습니다. 좋은 교재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책만 보게 되는 것이지 성경 자체를 많이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리더쉽을 배울 수 있는 성경의 각 책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입니다.
여기 저기서 짜집기해서 리더쉽을 공부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의 각 권에서 나타내고 있는 주제를 그 권 통째로 보면서 배우는 것은 많은 유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더쉽에 대해서 배울 때 성경의 인물을 통해 배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딤전후, 디도서 같은 경우는 아예 주제를 리더쉽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듣고 배우는데 참 유용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제 그 내용들을 하나씩 나눠 보려고 합니다.
메시지 성경을 통독하고 이번에는 정독하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 메시지 성경을 읽으면서 보내는 시간들이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 놀라운 계획들이 얼마나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YWAM SBS에서 공부하면서 또는 신대원에서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면서 겨우 겨우 알아냈던 그 말씀을 이해함이 메시지 성경을 통해 놀랍게도 정확하며 쉽고 문맥을 따라 설명되어 있다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솔직히, 사역자인 저로서는 그만큼 할 역할이 줄어든 것이죠.
성경을 읽으면서 얻었던 통찰들이 메시지 성경을 통해 놀랍게 전개되어 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사역자 없이도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 뜻을 알고 자발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자라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임을 생각해 볼 때 메시지 성경은 참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령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자라게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계획 아래 사역자는 도구가 될 뿐이지요.
저는 성경도 가장 쉽게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역자 없이도 성경을 읽고 누구나 구원의 진리를 알 수 있도록.
그런 의미에서 메시지 성경 자체가 주는 의미는 너무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이 사이트에 방문하시는 분들은
메시지 성경을 통독 및 정독하시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고백하며 결단하시는 분들 되었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우리 가운데 명확하게 계시하셔서 사랑으로 더욱더 깊어지는 사람들 되길 기도합니다.

메시지 신약 상세보기
유진 피터슨 지음 | 복있는사람 펴냄
『메시지 신약』은 유진 피터슨이 저술한 것이다. 평생을 원어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가르쳐 온 학자이자 목회자로 살아온 저자의 모든 것이 녹아든 평생의 결실이다.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읽는 성경이다. 한...
선악과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 조차 없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의도적으로라도 인식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살겠죠.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중요한 것은 선악과를 만드신 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창조주이시고 세상의 주관자이므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 그 분에게서 부터 비롯된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선악과 자체만 바라보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게 만드는 유용한 도구를 사단은 이용하여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 자체가 줄 수 있는 이익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로마서 7장은 율법도 선악과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지 성경 7:8-12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 기억 못하십니까? 나는 너무도 잘 기억합니다. 율법 조문은 처음 시작할 때는 대단히 멋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어떻게 되었던가요? 그 명령을 죄가 왜곡하여 유혹이 되게 만들었고, 그래서 결국 "금지된 열매"라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율법 조문이 나를 안내해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유혹하는 일에 사용되어 버린 것입니다. 율법 조문이라는 장신구가 붙어 있지 않았을 때는 죄가 그저 따분하고 생기 없어 보였을 뿐, 나는 그것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가 율법 조문을 가져다가 장신구로 삼고 자신을 꾸미자, 나는 그것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나를 생명으로 안내해야 할 그 명령이, 도리어 나를 넘어뜨리는 일, 나를 곤두박질 치게 하는 일에 사용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죄는 생기가 넘치게 되었으나 나는 완전히 생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율법 조문 자체는 하나님께서 상식으로 여기시는 것으로서, 각 명령은 모두 건전하고 거룩한 권고입니다.

율법도 하는 역할이 율법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선생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쪽으로 인도될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선악과를 이용하여 선악과 자체만 집중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무너뜨리는 도구로 썼던 것처럼, 율법도 똑같이 사단이 그 의미를 왜곡하여 사람을 거기에 얽매이는 역할로 잘못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율법이 진정으로 지시하고자 했던 것, 선악과가 진정으로 지시하고자 했던 것, 바로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 분과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즉, 선악과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도구였으며, 선악과를 볼 때마다 선악과 이외의 그 넓은 에덴 동산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구나라고 하나님 사랑에 빠져드는 그 아름다운 관계의 도구였습니다. 율법도 원래는 그런 역할을 담당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재하시면서 일어나는 사건들, 그 자체만 바라보고 맞네 틀리네 너무 하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역시 선악과 자체만 보는 것이고 율법 자체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바라보지 못하며 눈이 어두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로 만드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모든 율법이 이루어지게 되고 모든 목표가 완성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뛰어넘는 아니, 율법 깊이 감추어진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이 내 삶을 아름답게 빚어가실 것을 알 수 있다면 모든 율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은혜가 시작됩니다. 비로서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온갖 서류를 다 구비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면, 인격적 신뢰가 들어설 여지는 아예 사라지고 약속은 냉혹한 계약으로 바뀌고 맙니다.! (롬 4:13-15 중, 메시지 성경)

하나님과의 관계는 계약서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계약서 없이 그분을 믿고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3:14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 독자는 알아 들으라. )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

13:15 지붕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있는 세간을 꺼내려 내려 오지 말며

13:16 밭에 있는 사람은 겉옷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 가지 말아라.

13:17 이런 때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13:18 이런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13:19 그 때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쳐 올 터인데, 이런 재난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또 앞으로도다시 없을 것이다.

13:20 주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 살아 남을 사람은하나도 없다. 그러나 주께서는 뽑으신 백성들을 위하여 그 기간을줄여 주셨다."

 

재난이 다가오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재난이 다가올 때 가장 피해를 입는 계층이 어느 계층인가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마가 다가올 때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은 저지대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침수가 잘 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즉, 침수가 잘 되는 걸 알면서도 그 지역에 살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질병이 돌 때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치료를 잘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플루로 인해 인도가 어느 나라보다 피해를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문지상에 보면 그 나라는 치료 시설이 열악하여서 방치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런 피해가 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재앙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결국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에 편중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계층에 골고루 경각심을 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 계층에 피해를 입는 방식으로 심판이 이루어진다면 누가 하나님의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의 생각없는 비판에 대해서 감히 반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일컫는 행동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어리석은 행동일 뿐입니다.

 

위에 적은 마가복음에서도 불의한 사람들이 벌이는 행동에 대한 파괴적인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군인에 의해 자행되는 성전에 우상을 세우는 일이라든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행동에 대한 이미 이루어진 예언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이 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런 행동들이 결국 약자들에게 가장 피해가 갈 수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히, 더 고통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이 고통의 기간을 줄여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일으키고 악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의 결과를 수습하시고 선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쓰나미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생각의 깊이가 얕음을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구는 인간이 지구를 잘 보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에너지의 분배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한쪽으로 지구 에너지가 몰리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것이 지각의 얕은 부분을 통해 분출하게 되고, 그 영향으로 쓰나미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약한 지반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쓰나미의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으켰습니까? 선한 하나님을 왜 불의한 하나님으로 몰고 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어두운 눈이,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이 죄악을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이 죄로 인해 가슴 아프고 절망 적인 현상들을 선으로 바꾸길 원하시고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결국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것이 주님의 심판이니 뭐니에 대한 판단을 하지 말고, 그저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이 어려운 현실이 빨리 그치고 여러모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줄도록, 고통의 기간이 짧아지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빌레몬서 1:1-3 (현대어 성경본)

1: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바울과 믿음의 형제 디모데가 우리의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1:2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 여러분과 압비아 자매와 나처럼 십자가의 군인이 된 아킵보도 함께 읽어 주시오.

1:3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빌레몬서는 옥중서신의 하나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쓴 편지입니다.

감옥은 고난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의를 위해 일하다가 육체적 감옥에 갇힐 때도 있을 것이고, 마음의 감옥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좌절하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적을 분명히 하고 도리어 맡은 바 본분을 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걱정해 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몸과 마음이 상할 뿐입니다. 그럴 때 도리어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결과를 맺습니다.

바울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상관없이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 낼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은 더욱더 빛을 발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래는 신문기사입니다.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암투병 숨기고 강단지킨 토목학계 거목 영면

http://bit.ly/Q4LBm

자녀가 있다는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blessing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녀가 연약하여서 때때로 병에 걸린다면 그것 때문에 잠도 못자고 늘 신경이 쓰이고 어떻게 해야 건강할지에 대해서 마음 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점들, 고생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가를 더더욱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것은 아마 부모가 되어 본 사람만이 더욱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녀가 아프면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고 안타까워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는 우리들의 아픔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까요? 더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하지 않으실까요?

 

우리는 살면서 너무도 완벽한 모습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뭐든지 잘되고 만사 형통하고 가정에 안 좋은 일도 안 생기고 그런 것이 마치 옳은 것 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가정에 고통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더욱더 마음이 아파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죄악의 고통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사회는 강한 사람 완벽한 사람을 추구하고 그렇게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강한 사람이 되라, 연약하여 지지 말라, 예수 믿는 사람에게 능치 못할 일이 뭐가 있느냐?

 

그러나,

성경은 약한 것을 자랑하라라고 말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그 약함을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약해서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가정에 고통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아픔이 있기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고,

깨진 곳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약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약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매달리고 그 분의 위로함으로 살았습니다. 약속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존재 자체 만으로도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가슴으로 낳은 사람들입니다.

가진 조건이 훌륭해서 사랑받을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분이 낳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장이 여러분들의 심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통 속에 눈물흘리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원합니다.

힘내세요!!!

나이가 점점 들어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새는 주님 앞에 잠잠히 머물면서 생각하면서 입으로 나오는 몇 마디의 기도가 참 좋다라고 느낍니다.
어려서부터 감리교 전통의 교회에서 자라서 기도라하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 열정적으로 주여를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에 많이 익숙해 졌었는데 말이죠.
물론, 저 개인적으로는 힘든 연단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기도를 하면 목이 쉬고, 무릎 꿇고 1시간 정도 기도하면 다리에 쥐나고^^ 그래도,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월드컵 응원에서 고래 고래 고함질러서 목이 쉬어도 기분 좋은 것과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주님 앞에서도 그 정도의 열정을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차라리 미지근한 것보다는 낫지요.

고린도전서 14장 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개역개정)
14:19 nevertheless, in church I would rather speak five words with my mind, in order to instruct others also, than ten thousand words in a tongue.  (NRSV)

방언의 유익은 분명히 있지만, 우리의 지성을 사용해서 충분히 깨달은 몇마디의 말이 오히려 수천마디의 방언의 말보다 더 낫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하면서 바로 바로 우리의 입으로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충분히 묵상하면서 살아서 바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며 습관처럼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순간 순간 떠오르는 것을 기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더 좋은 방법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면서 우리가 깨달은 것으로 기도하는 것이 참 좋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성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용되는 지성은 그 분을 더욱더 알고 그분의 뜻을 우리 마음 속에 새겨서 행동하게 하는 데 참 좋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이라는 것이 순간적으로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원합니다.

대비되는 용어는 five words vs. ten thousand words 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수많은 말씀을 어설프게 아는 것 보다 몇 마디의 말씀이라도 충분히 묵상하여 깨달은 것을 가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것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 보다 한 가지라도 충분히 생각하며 깨달은 것을 전달할 때 힘이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최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준비된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많은 은혜가 촉촉하게 스며들거라고 믿습니다.
한마디라도 진실된 우리 마음 속의 고백이 하늘 보좌를 움직일 것입니다. 또한 향기로운 제사가 될 것입니다.

프리셉트 성경의 데살로니가 후서 개요 부분에 말씀 묵상과 적용 4번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언이나 다른 교리에 대해 여러분이 믿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직접 연구해서 얻은 것입니까? 아니면 책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 준 데서 온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은 지식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때 유행하는" 가르침에 쉽게 설득당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는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닥 좋은 방법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선교단체의 훈련도 좋습니다. 여러 좋은 프로그램도 좋습니다. 여러 좋은 책들도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만큼 확실하게 우리가 부족했던 모든 것을 명백하게 지시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직접 교사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며 기름 부으심이 분명 있습니다.
힘들어도 계속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가시다보면 놀라운 보물들을 찾아내게 될 것입니다.
좋은 집회, 좋은 예배를 찾아다니는 것도 그닥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연구하고 사랑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힘들어도 그 길만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운데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성령님의 기름부으심 가운데 세울 수 있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도 말씀이 없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말씀의 권위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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