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어느 나라도 문제를 갖고 있지 않은 나라는 없다.
우리는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 이 곳에서 살고 있다.
성경적으로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고 생각해 보면,
이 나라에 태어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아래 있는 것이다.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이 나라를 품을 의무가 한국 기독인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나라뿐만 아니라
가정도 마찬가지다.
왜 다른 가정들도 있는데, 나의 가정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아래 누리며 하나님 뜻을 찾아가길 원하신다.
내가 우리 가정 가운데 태어난 것도
나를 위해서나 우리 가정을 위해서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소명가운데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또 특별히 우리 가운데 주어진 각각의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요셉은 야곱의 가정 가운데 태어났고
애굽으로 팔려갔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새롭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과 민족의 어려움(미래에 닥쳐올 가뭄으로 인한 식량의 부족으로 인한 멸망위기-사실 더욱더 심오한 뜻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을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그를 사용해 특별한 상황 가운데 이끄셨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우리 나라와 각 가정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자세를 가져야 할지에 대한 태도이다.

한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을 위해 보다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편협된 민족주의는 아니다.
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평등하고 다 같은 하나의 가족과 같은 존재이지만, 특별히 이 땅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우린 좀 더 이 나라와 민족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매 순간 마다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지금 이 시간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왜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가?
이것은 어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있고 내가 그 가운데 어떤 일을 해야 할 필요가운데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종류의 생각들...

성경 전반에 흐르고 있는 우리의 생활이나 우리의 지위적 현상에 대한 생각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있다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실천하고자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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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런 종류의 전도 문구를 본 적이 많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방법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
그리고 4 복음서에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 형벌에 대한 내용도 나와 있다.

그래서, 이런 문구가 오늘날에도 효과적이고 그렇게만 전도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들은 왜 오게 되었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시대에는
유대인들도 여러 계층이 있었다.
사두개인(부활을 안 믿는 사람)도 있고, 바리새인, 열심당원 등 여러 계층이 있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많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때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약자가 억압받는 분위기도 많았고, 여러 곳에서 폭동도 일어나던 상황이었다.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현실적인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할이라고 대부분 믿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무엇이 그 사람들을 일깨워주는 문구였을까?
바로 영적인 가치를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진정한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이려는 회개치 않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회개하라에 대한 개념과,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기술했다.

이 상황은 다음 상황을 보면 왜 특수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초대 교회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들을 받고 각종 기적과 능력들을 행하였다.
4복음서 당시의 배경과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이다.
그래서 어떤 계층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영적인 문제와 구별하여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즉, 영적인 것은 가치있고, 현실적인 것은 가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해, 현실 삶이 형편없게 되었다. 성적 범죄, 도덕적 범죄 갖가지 악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히 영적인 것에 대해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지적했고,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야고보서가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서는 예수천당, 불신 지옥 같은 이야기보다는 훨씬 더 도덕적인 삶, 바른 삶에 대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럼,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삶의 목표의 부재, 물질주의적 가치관, 따뜻한 온정의 갈급함 속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전하셨을까?
다시 한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물론, 어떤 특정 계층에게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문구만이 맞는 것처럼, 그런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의 표현인 것처럼 독선적이어서는 안된다.


예전에 길을 가다가 anti-christian의 한 단체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것을 봤다.
그것은 성경에서 어떤 구절들을 떼서 성경은 온갖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것을 조장하고 있다는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실 한 구절만 떼서 보면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바른 해석 방법이 아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면.
내가 하나님은 돈을 받는 걸 좋아하셔라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고 보자.
그럼 그 증거를 찾을려면 하나님이 돈을 내라는 취지의 말씀하신 구절만 찾으면 된다.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정은 성경에 의해 지지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바른 것일까?
절대 바르지 않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구절이 있는데, 다른 구절 들에는 그 이유가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어려운 계층을 돕는 것이 하나의 이유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나의 해석 즉, "하나님은 돈을 받는 걸 좋아하셔"라는 해석이 제대로 된 것인가?
결코 잘 된 해석이 아니다.

그런데 anti-christian 들은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자기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반감에 대해 성경 구절로 증명하는 식의 전단지를 작성해 나눠주고 있었다.
참 어리석은 일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내가 부끄러웠던 것은, 얼마나 이 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영향력을 주지 못했으면 그렇게 오해하고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생겼냐는 것이다.

이런 해석법은 이단들도 같이 사용한다.
이단 교회들의 지도자들도 기존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거기에 부합하는 성경 구절만 취사선택하여 꿰 맞추니 참 그럴 듯 한 주장이 되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속아 넘어간다.

이런 방법을 연역적 성경 해석 방법이라고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신기한 통찰력을 주기도 한다. 번뜻 떠오르는 생각이 성경 전체를 꿰뚫어 보니까 일치하는 경우, 이럴 땐 맞는 해석이 될 수 있지만, 사실 이런 부분은 성령의 충만한 인도를 받기 전에는 참 힘든 부분이다.

그래서, 이런 위험을 줄여주기 위해 귀납적 방법을 많이 쓴다.
성경의 관련된 모든 구절을 찾아 본다음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드물게, 틀린 경우도 가끔 있지만...

요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할 때, 최대한 시간을 두고 성경 전반에 흐르는 맥락을 보면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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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젼의 사람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이재철 목사님이 하신 설교였었는데, 그분은 아마 이 시대의 가장 훌륭한 목회자중의 한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많은 부분을 공감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설교라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설교가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설교 대상을 생각하기에 한쪽으로 중점이 두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점은 내가 교사였기에 잘 안다.
한 반에도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럴 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 할 때,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그룹은 상대적으로 만족 못하게 가르칠 수 있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교인들의 많은 수가 기본적인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소수의 사람이 뛰어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그들에게 설교를 해야 한다면, 소수의 뛰어난 지식이나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보기엔 너무 쉽고 평이할지라도 난 거기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청중들 대상으로 하여 말하는 사람의 한계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청중의 소수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화자에 대해 저 사람은 뭐 저 정도밖에 설교를 못할까? 왜 그렇게 큰 비젼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할까 편견을 갖기 쉽다.

실제로 목사님들도 이런 종류에 의해 평가 절하되고 그들의 설교가 사람들에 의해 비난되어 지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비난을 하려면, 그 설교가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는지, 그리고 내가 평소에 그 설교자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 설교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비난을 한다면 그건 비난을 위한 비난이며 오히려 죄를 짓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왜 내가 비젼의 사람에 대해 썼냐면,
처음의 그분의 설교를 들을 때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에 대해 약간 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분이 스위스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왜 많은 한국 사람이 스위스 로잔에 있는 YWAM까지 와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왜냐면, 그분의 신념은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 어느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지 구태여 다른 곳에 나가서 배운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에서 하신 말씀이셨다.
그런데, 내 경우에 약간 반감이 든 것은, 한국에서의 현실이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반응하는 삶, 과감히 포기하는 삶에 대해서 가르치지 못했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이나 돈을 들여서 다른 곳에 가서 훈련을 받냐는 것이다.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엄청난 한국 교회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럼 왜 그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을까?

그 동안 우리 교회 중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제시한 사람들이 드물었기 때문이 아닐까 쉽다.

나는 사실 수련회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이 있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련회보다 은혜가 넘치는 삶이다. 수련회 가서는 은혜 충만하면서 돌아온 평상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다면 뭔가 잘못된 경우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에 전혀 하나님에 생각하지 않고, 갈망함도 없던 사람에게는 수련회가 좋은 도화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우지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여 어디를 가서 훈련을 받는 것도 좋은 도화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평소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어디를 가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 알고 평소 삶에 충실하겠지만 말이다.

그럼, 내가 이재철 목사님의 그 부분에 반감을 가진 것은 제대로 된 것일까?
이 설교는 장신대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였다.
아마도 신대원생들에게 현실에 뿌리박힌 하나님과의 날마다의 기름부으심과 교제가 필요해서 특별히 그 취지의 말씀을 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나는 그 목사님께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충분히 성숙하고 본이 되시는 목사님으로 스위스 YWAM 에서 훈련받는 사람들을 평가 절하할 생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른 설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라 생각된다.

귀납적 방법으로 설교를 듣는 사람의 자세, 비단, 성경 해석하는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오해 하지 않고 바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 같다.
(물론, 귀납적 방법이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류를 최소한으로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 사람에게만 한정된 건 아니지만,
내가 상대방을 잘 알면 그 사람과 충분한 교제를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간에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묻어난다.
이런 자세들이 우리 가운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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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워렌 목사님이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 와서
부흥의 원동력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제시한 것이
만약 부를 가지게 되었다면, 그건 자기 자신을 위해 쓰라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쓰고 흘려보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였다.

사실, 이것이 한국 교회에 무척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혹시 돈을 많이 가지게 된다면, 이 돈은 과연 나를 위해 쓰라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주시는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잘나서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가?
이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런 기회를 주셔서 그런 것이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부라는 것은 흘러서 모든 사람이 부족함이 없도록 사용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많이 가진 자는 나눠 주어서, 사회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계층들(고아, 과부 등)은 부를 나눠 받아서 평균되게 하는 것, 이런 것을 우리 사회에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적 개념과 다르다. 사회주의는 원척적으로 평균적인 부를 추구하지만, 성경적 원리는 가진 것을 자발적으로 나눠주는 원리다.

구약에도 보면, 밭을 소유한 사람이 다 추수하지 말고 일부를 남겨서 가난한 자들이 그것들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원리들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준 율법에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다.

십일조 같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에서 봉사해 소득이 없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든 사람이 십일조를 하도록 권장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부를 더욱더 갖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욕심을 제어하며 한번 자신의 부가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좋은 취지의 제도이다.
물론, 십일조는 정말 성경적으로 쓰여져야 한다. 오늘날 교회들이 교회 건물을 크게 짓는데만 신경쓰고 진정한 성경의 의미의 십일조를 사용하지 못해서, 많은 기독인들이 반감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성경적 부흥은 우선 우리가 가진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왔고, 공동체를 돌보며 서로 돕는 것에서 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한다면 이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단지 그 사람들이 부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교회에서는 가르쳐야 하고, 많은 부를 가지지 못한 사람도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부를 떼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연습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진 것을 서로 나누어 그 나눔의 기쁨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장되는 데 있다.

한 사람이 많이 가진다면 그것은 그 사람만의 기쁨이 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여러 사람과 나눌 때 그 부는 여러 사람의 기쁨이 된다.

천국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이야기 할 때, 외국의 크리스챤들은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장 큰 믿음의 방해 요소로 꼽는다.

따라서 부흥은 가장 큰 문제가 조금씩 고쳐질 때 오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질주의적인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서, 물질을 얻고자 해서 하나님 보다 물질적인 복을 더 간구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물질을 여러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낼 때 부흥은 다시 오게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는 것들이 많이 보인다.
뜨거운 주의 사람들이 이 나라가운데 많아 지고 있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새로운 부흥의 물결이 이 나라가운데 점점 확장되고 있는 것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변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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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Littleton - 사진에서 보는 오른쪽 분이시다.
YWAM 에서 예언의 은사를 가지신 분이신데, 이 분과 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많다.
이 분이 한국에 오시기 전에, 난 bedts( http://bedts.org ) 를 하고 있었다. 2004년이었고...
그 때 당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미국으로 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곳은 전략적(strategic)인 곳과 연관되어 있으며
높은 곳(high place)과 관련되어 있을 것을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그 때 당시 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더 알길 원한다는 마음을 많이 주셨었고 그에 관련된 책도 읽고 있었다.

난 그것에 대해 확증을 받길 원했는데, 그 때 제프가 와서 예언을 해 줬다.
잘 들어 보면, 이륙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널 들어올릴 것이다. 너는 전략을 세우길 좋아한다. 등 많은 것이 일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때 많이 놀랐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아래는 미국 가기전에 썼던 글들...


V015.wav  (옆의 파일이 제프가 해 줬던 예언을 녹음한 것이다.)



콜로라도 dts에 가기까지  /written by 장선기 (씨앗2호판 20Mar05, special)



2004년 4월 16일

여호수아 1:9 절 말씀 주시다.
-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2004년 4월 21일

오늘 야자 가운데 dts에 대한 생각이 들어 해외 베이스를 검색하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내가 관심 갔던 것은 커플들도 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가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들었고, 해외 한국인 dts는 아니며 내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그쳤다면 그냥 생각들이 접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서 보경 자매랑 통화 하면서 놀랐다. 보경 자매도 오늘 해외 dts(제주 열방대학 링크되어있는 해외 dts 검색)를 생각하며 검색하고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역시 똑같이 커플에 대한 정보를 보면서....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의 생각의 확신을 주셨던 경우를 돌아보아 나가는 것이 맞다는 확신 가운데 거할 수 있었다.
거기다 더 놀라웠던 것은 나의 그동안 기도 제목이 누가 나를 calling 한다면 하나님 제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겠습니다 였는데 보경 자매가 나에게 calling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아무튼 너무 놀라서 나는 정말 흥분했고 곧 기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보경 자매와 전화 끊은다음 하나님께 물어보았다.
"하나님 정말 이것이 맞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번 맞다는 말씀을 하여 주셨다.
그리고 어떤 base로 가야 할 지 기도해야 겠다는 것과 앞으로 결혼 일정에 대해서도 기도하며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4년 4월 23일

오늘 내내 난 사단이 주는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 두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들... 그리고 잘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들에 시달렸다.
보통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겠다는 주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포기란 쉽지 않은 부분이다.
하지만, 오늘 bedts 찬양 시간에 하나님은 잔인하게도(?) 계속 너가 어느 곳에 가든치 요동치 않을 것이다. 주의 팔이 너를 붙들리라(찬송가 464장), 주는 평화,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등의 찬양을 통해 어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요동치 아니하리라, 나의 강한 팔이 너를 붙들리라.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너의 도움이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며 계속 말씀하셨다.  내내 눈물만 나왔다.
그리고 창세기 12장 1절로 2절 말씀을 주셨다.
"여호와께서 선기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계획하심을 믿는다.


2004. 4. 26.

We are living in an incredible season of harvest right now. Regions of the world once considered impenetrable strongholds of darkness are responding to the Gospel at phenomenal rates.
콜로라도 dts 홈페이지에 있는 말이다.
언젠가 교회를 가면서 보경과 하나님께서 이제는 추수할 일꾼을 보내시는구나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우리는 그 도구로 사용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놀랍다...^^ 기대된다.


2004. 5. 18.

오랫동안 기도해왔던 것은 bedts 기간 동안 강사님을 통해 나에게 calling의 확증을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좀 웃긴 발상이다.
강사님이 여러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강의를 하는데 나만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도 그렇고... 그러나, 아버지 사랑 강의의 강사님이 이번에 사정이 생겨 예언의 은사가 있으신 분으로 바뀌어서 뭔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기수는 예언을 안한다고 미리 언질을 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가 없었는데, 강의 하루 지나 느닷없이 다음날에 예언을 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 차례는 토요일이 되었고 난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였다.
강사이신 제프 장로님을 통해 dts에 대한 확증을 달라고 하였다.
은근히 외국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면 했다. 처음에 예언 기도 받을 때는 잘 몰랐다.
하지만 자리에 들어와 생각해 보니 놀랄만한 부분이 있었다.
나에게 전략을 세우길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난 전략 dts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고,
내가 많은 부분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부분을 말씀하셨고 활주로에서 이륙하는 부분에 대한 표현이 있었다. 너무도 놀랬고, 내가 앞으로의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일들을 나눴던 사람들도
나의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너무 놀랐다고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정말 놀라우며 선하시다. ㅠ.ㅠ


2004. 5. 18.

제프 장로님의 예언 중 “사랑이 너를 들어올리게 될 것이다”에 대한 부분
[예수 우리의 복음이라는 헨리나우웬의 책을 읽다가]
중대한 고비에 온전히 반응하지 못한 사람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아라'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1-22)
예수님은 이 청년을 사랑하셨다. 그리고 내가 보는 바로는 그를 제자로 곁에 두고 싶어하셨다. 그러나 그 청년의 삶은 너무 복잡했다. 걱정할 일이 너무 많았고 챙겨야 할 사무가 너무 많았고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자기 관심사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실망하고 풀이 죽어 예수님 곁을 떠났다.
오늘밤 나는, 예수께서 사랑의 눈빛으로 나를 보시며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좇으라고 부르실 때 "예" 할 수 있을 만큼 내 삶이 단순해지기를 위해 기도하고 싶다. 그 순간을 놓친다는 것은 예수님과 나 자신에게 슬픈 일일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 진정한 내 자리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다른 부분
이 이야기는 '전부'에서 '무'로 단걸음에 도약할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사랑의 방향으로 계속 작은 발걸음을 이어갈 것을 말하고 있다.
부자 청년의 비극은 부를 포기할 마음이 없었던 데 있지 않다. 누군들 그러고 싶겠는가?
그의 진정한 비극은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 관계야말로 예수님도 바라시던 바였고 그 자신도 바라던 바였다.
문제는 부에 초연한 태도가 아니라 사랑의 음성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것이다.
초연함이란 더 큰 집착의 당연한 귀결에 지나지 않는다.
풍성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초청받았는데 그까짓 얼마 안되는 소유물로 걱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분은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물고기를 주시며 빵도 먹고 남을 만큼 넘치게 주시는 분이 아니던가?

부자 청년이 예수님 말씀대로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른 제자들처럼 그 또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얼마나 큰 손해인가!
우리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시리라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사랑의 음성에 따른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도전이다.


2004. 6. 19.

무언가 모르는 막막한 두려움...
사단이 주는 마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두려운 상황가운데서 담대함을 훈련시키기 위해 이 두려움들을 연단의 기회로 사용하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목적이 이끄는 삶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은 계속 나의 상황 가운데 두려움에 대한 부분들을 말씀하신다.
우연히 책을 봐도 두려움에 대한 부분... 강의를 들어도 꼭 두려움에 대한 부분이 나오고...
말씀을 묵상해도 두려운 상황 가운데 사도들이 성령받고 담대해졌는가를 보여주고...
어제 문희곤 목사님의 강의 중에 우리의 편견에 대한 부분을 말씀하셨다.
가나안을 들어가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미 머리속에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겼던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낙 자손을 두려워하여 꺼려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대함으로 나아갔던 두명의 정탐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담대했다는 것...
편견을 버리며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는 것... 이 부분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이 부분을 마음에 새겼다면 나는 두려움 가운데 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 가운데 내가 무엇을 이루고 지금까지 살았다는 나의 교만과 자아가 강해서 진정한 담대함과 강함이 없나부다.
나 자신은 약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강해지며 하나님 앞에 연단받아 성령 가운데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담대함을 연단받자...


2004. 8. 28

bedts 찬양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하셨다. 나에게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부분에 대한 마음과 내 마음속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서 특히 내게 크게 들렸던 것은
바로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하나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이라는 분명하고도 강한 메시지였다. 나의 사명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확증시켜 주신 주님...
그 주님의 말씀속에 나는 잠잠하고 평안함과 감격할 수 밖에 없었다.


2004. 9. 5

어제 dts 때의 찬양이었고 오늘 예배의 찬양이었다.
나의 지금 주위의 모습들을 보면 어려움이 많은 듯 보인다.
어머니 건강, 결혼 준비, dts, 학교일들, 미국가는 문제 등...
이런 문제들 가운데 자칫 지치고 힘들 수도 있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찬양 가운데 나에게 말씀하셨다.
"선기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너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겠니?
너의 상황들이 힘들고 어려울찌라도 오직 나만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겠니?" 라고 물으셨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자꾸 눈물이 나왔다.
하나님은 믿음 가운데 나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시다.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여도 일어날 수 있는 힘... 바로 하나님께 있다.


2005. 2. 2

[하나님의 인도하심]
지난해를 돌아다본다.
하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셨던 과정들...
제프 장로님이 원래 예언 안하시기로 했다가 예언 해 주신 일이며...
어느 dts를 가야할 지 고민하고 있을 때 경순이가 한국에 와서 콜로라도 dts 추천해 줬던 일이며...
꿈 속에서 고지대의 모습을 보여 주셨고...
콜로라도 strategy frontier 홈페이지에 들어갔을 때
어느 주일 오후 우리 두 사람이 차를 몰고 갔을 때 나눴던 이야기의 구절이 콜로라도 dts 홈페이지에 나와 있었다는 것들...(2004.4.26.에 쓴 글 참조)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 보내겠다고 말씀하시며,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하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곳으로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던 일...

[어려움들]
그냥 한국에 머물면서 여러 분들이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했을 때.
부모님들의 걱정들....

[하나님의 신실하심]
dts 합격...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이 모든 것들을 이기고 끝까지 소망을 붙들기 위해 노력하려고 했던 것.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며.
결국...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그분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단,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변치 않으며 흔들리지 않을 때...
숱한 유혹과 나를 넘어지게 하려는 것들에 대해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하려고 했던 것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는다.
난 그의 손의 양이라.


2005. 2. 5

^^;;;
오늘밤 유달리 잠이 안오네...
하나님 아버지...
저를 향한 주의 뜻을 제가 잃어버리지 않게 하여 주세요...
믿음이란...
저에게 주신 뜻을 제가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드는 거라고 말씀하셨죠...
아브라함처럼, 노아처럼, 예수님처럼...

이 믿음의 길 가운데 하나님 풍성함을 주세요...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더욱더 알기를 원합니다.
내 평생 소원인거 아시죠?

deeper and deeper
아직도 제 귀를 울리고 있는 이 음성들...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서 더 깊이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며
그 사랑안에 잠기어 있는 저를 기대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저를 이끄시는 삶을 기대하며...
주를 바라봅니다.

아버지만이 나의 사랑이십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신실하십니다.

아버지... 그 아름다운 주의 영광을 제가 바라봅니다.
아버지 나라의 그 날까지...
아버지와 더욱더 친밀함을 가져서
그날에는 어색하지 않게 하여 주세요... ㅎㅎㅎ...

아버지... 제가 사랑하는 거 아시죠?
항상 넘어지고...
마음을 끝까지 잘 못지키지만...
이번에는 꼭 잘 지키고 싶네요...
아버지... 저를 붙들어 주세요...
오직 주의 은혜만이 저를 붙드실 수 있는 거 제가 압니다.
저의 삶을 통해 주 영광만이 드러나길 원합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 사랑이 저를 들어올립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제게 보여주신 장면이 떠오르네요...
저를 안으시고 끝없는 파도위를 날아간 모습...
그 포근하고 따뜻한 그 품...

아버지... 그 사랑에 저를 계속 품어주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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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내려놓음의 문제입니다.
권리포기란 말로 많이 불리고 있지만, 내려 놓음이란 말이 더더욱 좋은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면,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 것이므로, 내게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그럼 제 안에 있는 내려놓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의 문제:
사실, 가난하게 살거나, 불편하게 살거나 하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이 어찌보면 저에게는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거나, 고생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런 삶을 어느덧 추구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막연한 반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소위, 돈을 많이 가진 자들에 대한 반감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것에 대한 반감들...

과연 이런 행동이 옳은 것일까요?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와도 교제를 나누셨고, 아시다시피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부자 청년에게도 안타까운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그럼, 우리의 반응은 어찌해야 할까요?
이 사회 구조 간에는 너무나 큰 서로간의 갈등과 대립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이들과, 나이 드신 분들과의 대립,
보수 주의 진영과, 진보 주의 진영의 대립,
부자와 가난한 자들과의 대립...

서로가 서로를 이해 못하고 서로 자기의 생각들이 옳다고 하죠.
어느 것에도 답은 없습니다.

단지, 요구되는 것은 상대방을 편견없이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고,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행동에 대해 같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예수님을 만나고 삭개오는 삶이 변화되었고, 잘못된 삶에서 돌이키게 되었듯이,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는 삶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함과 사랑으로 인해 마음을 열게 된 상태에서 잘못의 교정이 이루어졌던 것이지, 편견이나 어떤 비난에 의해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을 바라보던지 간에, 그 사람에 대한 편견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바라봐주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여 행동의 변화가 나타나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겠죠.

내려 놓음에 대해 좋은 일화를 소개하죠.
예수전도단의 홍OO 형제님이 bedts 강의 때 이런 강의를 하셨습니다.
형제님은 외국에 강의가 있어서 누추한 여인숙에 묵을 때에도 마치 자기 집인양 편안하게 누리고, 혹시 좋은 호텔에서 묵을지라도 마차 자기 집인양 편안하게 누린다고...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저는, 누추한 곳에서 잘 누릴 수는 있어도, 풍부함에 있을 때는 잘 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환경에 있던지 간에, 하나님안에서 잘 누리고, 또한 무엇을 풍요롭게 받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 잘 알고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내려 놓음의 좋은 실천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00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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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는 두 장 밖에 되지 않지만 놀라운 책입니다.
작은데, 성경에 들어가 있는 것은 뭔가 놀라운게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개인적으로 갖게 합니다.

학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제 1차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지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정말 열심히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에스라나 느헤미야를 읽어보시면 알 수 있죠...
그들이 잠도 잘 안 자면서 열심히 노력했죠...
그런데, 갑자기 이들이 성전 짓는 것을 멈추기 시작합니다. 14년 정도 동안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학개 2장 4절 5절에 보면 하나님이 계속 마음을 굳게하라고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성전 짓기를 멈춘 이유 중에 하나가 두려움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라에 보면 성전 짓는 것을 중단하게 된 이유가 나오는데, 그 당시 예루살렘 지역에 머물러 살던 사마리아인들이나 여러 이방인들의 박해가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 짓기를 중단하고 그들의 눈을 돌려 현실적인 만족에 안주하기 시작합니다.
학개 1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전은 황폐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은 집에 거주하고 있고, 1장 6절에 보면 이들이 자기 자신의 만족과 필요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노력은 많은 것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삶은 우리에게 참 의미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말씀을 어떤 분이 성전 건축하는데 이용하며 마음의 일종의 죄책감을 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성전 건축이 우리의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성전 건축에 힘쓰라고...

하지만, 사실 학개를 인용하기엔 무리가 있는 말이죠...
학개 당시 사람들이 성전 건축에 마음이 많고 실제로 힘썼지만 두려움이 그것을 계속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거죠.

좌우지간,
그리고,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지은 성전을 보면서 규모가 보잘것 없음에 대해 실망을 느꼈습니다.(2:3)
하지만, 하나님은 성전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면 그 안에 얼마나 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이전 성전에 비해 초라하지만, 하나님은 그 영광이 더 클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7, 2:9)

저는 많은 기독인들이 선교사나 아니면 그런 쪽으로 풀타임으로 하면 헌신된 사람이고 그냥 직장에 머물러 있으면 뭔가 부족한 듯이 느끼는 그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부족해 보여도, 다시 짓고 있는 이스라엘 성전 같이 초라해 보여도 그 안에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시고 임재하시면 그것이 얼마나 크고 천지를 진동시키는 영광이 있는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외면적인 거대함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냐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 있게 하시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하루 하루를 하나님께 함께 거하는 것. 이것이 하나의 부흥의 원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두려움의 문제로 돌아가면...

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내가 함께 한다. 용기를 가져라. 내가 함께 한다. (1:13, 2:4) 그리고 하나님은 그 영광스러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9)

전 학개를 보면서 바울의 삶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오로지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모든 두려움과 고통들을 능히 감당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인 상황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거대함이나 이 세상의 부나 명예 등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영적인 의미를 잊기 쉽고,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함에 대해 잊어버린채 살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고, 그 영광의 풍성함이 얼마나 클지 생각한다면 어떤 것도 우리를 매이게 만들지 못하며, 우린 하나님의 자유함속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 가운데 풍성하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흘러 나오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학개는 이 외에도 다른 굉장한 의미가 있지만
저에게는 위에 적은 부분의 의미들이 많이 다가왔습니다.

이곳에 어떤 자매가 나눈 이야기가 많이 저에게 의미를 주어서 적어봅니다.

그 자매가 생일을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림을 하나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그건 결혼식 장면인데, 저 끝에 예수님이 신랑(주례자 앞)의 위치에 있고 그 자매는 드레스를 입고 한 걸음 한걸음 예수님이 서 계신곳으로 다가가는 그런 그림이랍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예수님 있는 그 곳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일일까요.
삶의 고통과 여러 가지 일들로 힘들지만, 그것을 이기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생각만해도 우리에게 소망과 힘을 줍니다.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2006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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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룻기 teaching을 그룹별로 했습니다.
처음에 룻기를 읽었을 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몰라서 참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가르치긴 해야 하는데 뭘 초점을 맞추고 가르쳐야 하는지...
아무리 성경을 보고 또 보아도 룻이나 나오미의 삶-물론 좋은 점도 많지만-이 아주 하나님과 친밀한 상태였다고 보여지지도 않고...
자라면서 룻기를 읽었을 때 룻과 보아스의 러브 스토리를 들으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구나 생각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더욱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룻기는 사사기의 일부분인데
사사기는 죄의 순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따르다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의 길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서 구원하시자만 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떠나고 또 심판받고 부르짖고 또 구원임하고... 계속 그런 스토리입니다.

룻의 시어머니는 나오미입니다.
나오미의 이름의 의미는 pleasant(기쁨)입니다.
하지만 유다 가문의 나오미와 남편은 모압땅으로 갑니다.
모압민족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잘못된 관계속에 태생된 민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모압자손은 절대 하나님의 공회에 들어올 수 없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오미은 그 잘못된 땅으로 가게 됩니다. 왜냐면 먹을 것을 찾아서지요...
하지만 그 땅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남편도 죽고 아들들은 하나님이 율법속에서 주신 이방여인들과 결혼했고 아들들마저 죽어버립니다.
나오미의 삶을 보면 참 비참하고 힘든 우리의 모습들이 떠올라집니다.
힘겨운 삶 속에서 무엇을 찾아 헤매지만 많은 것을 실패한 사람의 모습...
희망없음...
나오미 아들들의 이름도 참 재미있습니다.
말론의 의미는 -sicky 이고 기룐의 의미는 -failure 입니다.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도 나오미 자신의 처지를 반영한 이름을 지었으니 얼마나 나오미의 삶이 힘들고 괴로웠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룻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의 민족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로부터 멸시받고 따돌림당하는 그런 민족에다가 더구나 혼자 되었던 모습들...
그의 삶도 보면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룻의 동서는 오르바입니다. 오르바의 뜻은 neck 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의 의미는 자신의 생각대로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교만함 결국 그 교만함이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우상을 만들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룻의 이름은 친밀감입니다. friendship

룻은 나오미에게 시어머니가 가는 곳은 설령 죽음이라도 무조건 따르겠다고 합니다.
저자는 유달리 둘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시로 하나님을 떠나고 그랬던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룻처럼 하나님에 대한 친밀감을 끝까지 유지하길 원했습니다.

어떤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꼭 붙들고 나가는 것 이것이 룻기의 큰 하나니의 메세지인 것 같습니다.
룻이 나오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갔듯이 말입니다.

한국에 휴대폰 광고중에 좀 섬뜩한 광고가 있었던 것이 기억나는데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의 등에 꼭 달라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
좀 섬뜩하지만...
좌우지간 하나님과 절대 떨어지지 않게 끝까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붙들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인 것 같습니다.

신약도 보면 같은 메세지를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 가지가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 이야기...
예수님이 나의 길은 험한 길인데 그길을 따라 올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들...
어떤 상황 가운데도 힘들어도 하나님을 꼭 붙드는 것...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저의 상황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곳 말레이시아의 생활은 생각보다 많이 힘듭니다.
날씨가 더워서 머리도 아프고... 환경은 열악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건강적인 부분들도 있고... (더 나눌 기회가 있겠지요...)

두번 째 중요한 메세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입니다.
보아스가 나타나는데요... 보아스는 나오미의 친척입니다. 친척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12번 정도 나오는데요... 그 의미는 구원자 입니다.
나오미는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삶의 씁쓸함입니다.
만약에 나오미의 삶에 룻의 삶에 보아스(구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삶의 고통의 악순환은 어떻게 되었을 까요?
아마 계속 고통과 아픔속에서 희망없음 속에서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아스가 나타나서 그들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나오미의 삶은 마라에서 나오미로 바뀌었습니다. 씁쓸함에서 기쁨으로...

나오미는 한편 죄책감도 가지고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왜냐면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통해 그의 삶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죄의 굴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자... 즉 하나님,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이 이야기는 신약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와 굉장히 연관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삶에 희망없이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4:5~ 이야기)
그래서 예수님 외에 다른 곳에서 만족을 찾을려고 남자를 여러번 바꿨습니다.
만약 그 여인이 진정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은 남편이 되어서 계속 함께 했겠지요...
인생에 피곤해서 그렇게 있을 때, 희망없이 다른 곳에서 해결을 찾을려고 했을 때, 결국은 실패했을 때,
예수님이 찾아 왔습니다. 내가 영원한 생수를 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나에게 해답이 있다.
그 여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바로 그 redeemer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룻기는 희망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바로 소망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끝까지 친밀감을 유지하라는 메세지를 닮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오미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룻은 이방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구원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결국 룻기 마지막 장에 보면 룻의 자손을 통해 다윗이 나오고
마태복음 1장에서 보듯이 다윗의 자손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러브스토리...

나오미와 룻과의 관계와,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더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22 -이 부분은 저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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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의 정말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소망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를 하나님은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희망과 우리의 위로이십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받은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자
선기 드림...
200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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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샬롬의 상태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함으로 인해 죄에 빠져 들게 되면서 그들은 자신의 상태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장 아름다운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이후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받은 존귀한 자라는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꾸 유혹아래 빠져들게 되었다.
이때 이후로, 사람은 자신의 관점이나 자신의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자신의 행위로 모든 것을 용납하고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죄를 지은 이후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이 생각하기에 수치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가리기 시작하였다.(3장 7절)
바로 여기서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바로 인간 중심적 사고 방식이 들어가게 된다. 선악과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자신이 착한 행위를 하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생각들... -들이 도처에 사로잡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을 하나님 대신으로 놓게 되며 나중에 나아가 바벨탑 사건에서 그 극치를 맛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죄에 대해 문책하시지만, 그 죄를 이기고 해결할 수 있는 구원의 약속을 보여 주신다.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가 직접 해 입은 무화과 나무잎의 행위로 나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아래 직접 피 흘림이 있는 구원으로 나아가는 가죽옷인 것이다.(21절)
하나님은 결국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주시고 자기를 제약하기로 결정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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