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인들이 날로 줄어가는 현실 속에서 많은 논의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기독교는 침체되어 가고 있는가? 라는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소재를 밝히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선조들의 죄악을 회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 데, 한국 역사 속에서 선조들이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힘들다.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회개해야 한다라는 주장도 많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이런 논리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유다가 멸망당하는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힘든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질고를 지는 것이다라는 속담을 유행시켜며 책임회피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8:19 그런데 너희는, 왜 그 아들이 아버지의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 본문에 대해 박윤선의 주석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위의 2절 말씀으로 돌아가서 유대인들의 그릇된 사상을 지적한다.  그들은, 그 현재 당면한 고난이 저희의 죄값이 아니고 선조의 죄 값이라고 하며 스스로 의로운 체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속은 태도이다. 에스겔은, 여기서 누구든지 율법을 행하면 선조의 죄와는 상관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하나님은 철저히 조상들의 죄와 현재 사람들의 죄를 분리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18:20 죄를 지은 영혼, 바로 그 사람이 죽을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의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가 아들의 죄에 대한 벌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의인의 의도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이 시대에 악과 그에 대한 징계가 있는 것은 아마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리어 어떤 비난을 받게 된다면 우리의 잘못이 있지는 않는지 돌이켜 보고 마음을 겸비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게 나아가는 자세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역자입니다. 청년부를 섬기고 있는데, 항상 무언가 잘 안될 때마다 다른 조건들이나 상황들을 보고 그것을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때 물론 여러 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상황을 통해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뜻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 자체가 꼭 나아지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점검은 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혹시 리더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를 겸비하면서 엎드리어 점검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다른 원인들을 살펴보는 것은 우선 순위를 잘 설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더욱더 용기와 격려를 해 주시는 것은 에스겔서 다음 구절입니다.

18:21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에서 떠나 돌이켜서, 나의 율례를 다 지키고 법과 의를 실천하면, 그는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18:22 그가 지은 모든 죄악을, 내가 다시는 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킨 의 때문에 살 것이다.
사도행전 5장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29절에 보면 베드로와 사도들은 공회 앞에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합니다.

30절부터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의 삶 속에 어떻게 하셨는지를 그들이 체험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MSG에서는 31절을 하나님은 예수를 높이셨다. 이스라엘에게 죄 용서와 변화된 삶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죄 가운데 허덕이다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생명력 없는 삶에서 구원하시고, 허무함과 절망 가운데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changend life를 주셨습니다.

 

32절에 사도들은 바로 이일에 우리들이 증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더불어, 성령께서도 이일에 대해 더욱더 확실하게 체험하도록 도와 주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용서함과 변화된 삶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선교현장에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수를 오직 사랑하며 예배하며 사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죄용서함과 변화된 삶이 무엇인지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예수를 생명의 주로 붙들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다시 한 번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따르며 살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사람들의 어떤 말이 나의 삶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삶을 사는 믿음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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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이 대안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영육간에 많은 아픔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여러가지 환경 속에서 아픔을 겪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에는 많은 균열이 있고,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곳저곳 우리는 찾아다닙니다.

조금이라도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해 돌아다닙니다.

무언가 혜안을 가진 현자들을 만나기 위해 애쓰기도 합니다.

 

사회적인 갈등과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문제 해결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사람입니다.

다른 곳에서 문제 해결을 찾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으로 인한 성령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서 찾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참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어떻게 너 삶 가운데 그런 것들이 해결되었는가? 어떻게 사회속에서 그런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대안을 제시했지?라고 물을 것입니다.

4: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의 답변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됩니다.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해결 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이름으로만 영육이 구원되고 사회가 구원될 수 있습니다.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렇다면,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끼고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비밀을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사회에 항상 뒤쳐지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선도해 나가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으며, 개인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그 해결 방법을 분명히 제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문제에 허덕여 헤어나오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앉으십시요. 그리고 그 분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성령께서는 오순절 날에 임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냐면, 성령의 역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이루어진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태초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창조가 시작되었고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때는 어떻습니까? 이미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기로 작정하셨고, 또한 성령을 받을 은혜의 때입니다. 이미 하늘문이 열렸으므로 우리는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구해야 할 것입니다.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홀연히라는 말은 영어로 suddenly입니다. 역시,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대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임하시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언가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닌 것으로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 노력해서 성령이 임한 것 같다고 느낄 때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노력으로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무언가 외부적으로 초월적으로 오는 현상을 느낄 때, 바로 신비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를 고백하게 됩니다.

 하늘로부터도 마찬가지의 맥락입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도 역시 초자연적인 현상을 나타내어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더욱더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개인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방언을 한 적이 있는데, 방언이라는 것이 나의 노력과 의지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시점을 계기로 인위적이지 않은 방언을 말합니다.) 개그 프로를 보시면 개그맨들이 외국 말을 그냥 만들어서 말하는 장면들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하늘로부터 온 방언이 아니라 내가 만든 방언입니다. 이런 방언을 말하면서 성령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suddenly라는 표현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방언을 진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뜻과 상관없이 suddenly 별안간 하게 되었다면, 여러분에게는 성령이 임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방언이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성령은 with us, in me 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교회에도 계시고, 집에도 계시고, 이 나라에도 계시고, 전세계에도 계십니다. 옆에 계신다는 의미이죠. 그러나, in me는 또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n me는 내 옆에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다는 의미이지요. with us는 우리 곁에 계시며 공동체적으로 우리를 이끄는 내 옆에 따라다니는 helper의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불이라는 것도 with us의 개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갈라져서 각 사람에게 임하였다는 말은 with us에서 in me로 된다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with us는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in me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능력들을 존재적으로 도와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내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과 내 곁에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도 역사하시길 원합니다. 공동체를 도우시는 영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또한 역사하시는 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성령께서 도와주십시요라는 기도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성령님 내 안에 오시옵소서 다스려 주십시요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임한 성령이 없으면 단지 구경꾼으로서의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저, 공동체에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만 보는 현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성령으로 인해 능력있게 서 가는데, 자신은 허무함을 느끼거나 그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왜 이렇게 능력없이 서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바로 with us와 in me로 구분되어 역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성령에 의한 신비적인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이제까지 우리 힘으로만 살고 우리 생각들로만 살고 우리 의지로만 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육체적 힘으로만 살았다면, 이제는 성령의 도우심이 거기에 더해집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의 외부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에 초자연적인 힘이 더해져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예전까지는 내가 아는 언어만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혀에 또한 나의 혀를 통제하는 뇌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더해지니 다른 언어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넘어선 무언가의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이것이 무엇인가? 내 힘으로는 절대 안되는데, 무언가 초월적 존재가 내 안에 있어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는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2:1-4절까지는 성령이 공동체에 임함으로부터 -> 개인적으로 임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둘 다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무디는 19세기 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부흥사였다.
무디는 부흥사에게 필요한 대중성과 구원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무디를 성공적인 부흥사로 만든 것은 성령체험이었다.


시카고에 사라 쿡(Sarah Cooke)이라는 성령 충만한 여전도자는 무디의 설교를 듣고는

“거친 돌 가운데 있는 다이아몬드”라고 평가했다. 그의 설교는 불타는 열정이 있었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쿡은 무디에게 가서

“나는 당신이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했다.

무디는 이 말이 거슬렸지만 매주 금요일 오후에 그녀를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후 무디는 쿡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성령세례를 사모하기 시작했다.

밤을 세워가며 마루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성령세례를 간구하였다.

어느날 뉴욕으로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그가 간구하던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다.

너무 강한 성령의 역사에 무디는 “이제 그만! 오 주여, 이것으로 충분합니다”고 외칠 정도였다.

이후부터 무디의 설교는 달라졌다. 무디는 “나는 다시 설교하러 갔다.

설교 자체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나 수 백명씩 회개하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온 세상을 준다고 해도 내가 이 축복된 경험을 하기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무디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무디의 사역이 성공한 비밀은 바로 성령의 역사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개된 비밀이다.

문제는 이 비밀을 얼마나 믿고 자신의 것으로 하는가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만한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신다.

만일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면,

우리는 우리의 특권 이하로 살고 있는 것이다 -무디-

 

 

☞ 무디의 성령 세례
1871년 10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화재인 시카고 대화재로 대도시 하나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또한 그것은 D. L. 무디가 힘들여 쌓아 놓은 모든 사역이 한순간에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화재는 파웰 홀(Farwell Hall), 무디가 담임하고 있던 일리노이 스트리트 교회(Illinois Street Church), 그의 집과 재산을 송두리째 앗아 갔다.
그러나 필생의 사역이 완전히 허물어진 거기서부터, 하나님은 더욱더 훌륭한 일꾼을 일으킬 작정이셨다. 평소에 무디의 기도 제목은 주의 영으로 충만함을 입는 것이었는데, 화재 후에도 이 기도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회심 후 중생의 체험이 있은 지 꼭 16년만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성령의 강력한 능력에 휩싸였다. 나는 하나님께 당신의 손을 멈추어 달라고 간청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그분의 사랑을 경험했다.”
그 후 무디는 똑같은 설교, 똑같은 방식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면, 이제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나왔다. 섬기는 자는 바뀐 게 없었다. 이것에 대해 무디는 “나에게 온 세상을 다 준다 할지라도 이제는 축복을 경험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세상 부귀영화는 저울에 달린 조그만 먼지와 같다”라고 고백했다. 섬김에 필요한 성령을 구하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D. L. 무디의 Secret Power」/ D. L. 무디

 출처 : 생명의 삶 6월 3일자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과 가룟 유다는 별반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고 부르신 제자도 있었고 나를 따르라 하신 제자도 있었고, 신기한 일을 보여주시면서 초청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영적인 원리가 있었을 수는 있지만, 제자들의 삶을 보면 육적인 데 초점을 맞춘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기적을 바라고, 먹을 것을 채워주고, 정치적으로 무언가 되어 보려는 욕심들이 전반적으로 지배했음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과의 차이점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에게 꾸짖기 보다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면서 점점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끄시려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계속 육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삶이 중요한 것이야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계속 그 점을 지적하시면서 도전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육적인 욕구에만 자신의 목적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가룟유다라 볼 수 있습니다.

 

회개는 메타노이아로 방향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켜 옳은 방향으로 행동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메타멜로마이, 그냥 단순히 내적인 뉘우침만 합니다. 그리고 행동을 돌이키며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한 사람하고 이런이야기를 했습니다.

난 적어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어도 예수님의 용서를 구했다면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점에서 가룟 유다나 우리나 별반 다름이 없다. 가룟 유다가 죽기전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생각해 보았다면, 오히려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의미를 기억하지 못했다.

 

죄에 대해서 지적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기억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육적인 것만 추구하다가는 가룟 유다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출발은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같았지만, 나중은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보여주시고 그 죄를 정결케 하셔서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적해 주시는 것에 대해 우리의 영과 육이 성령의 충만함에 사로잡히도록 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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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을 때는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하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메세지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질책과 심판의 메세지도 있습니다.

그런 구절들을 그냥 읽는 것 하고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질책을 하시며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가를 생각하고 읽는 것 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하나님은 꾸짖으실 때 하나님이 아파하시면서 꾸짖으시는 그 마음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우, 호세아 선지자의 경우

그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질책하시는 하나님 속에 사랑의 눈물이 담겨 있음을

몸으로 깨달았던 선지자입니다.

 

오늘날 회개하라 하는 메세지 속에 사랑을 담지 않고, 아픔의 눈물을 담지 않고 이야기해도 안되겠고,

들으면서 그 메세지 속에 있는 하나님 마음의 아픔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그냥 들어도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마음으로 읽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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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안타까움이 많이 묻어 있는 책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세상의 즐거움을 따라 살려고 하고, 사역자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에 힘드니, 세상으로 많이 가는 현실의 아픔이 묻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을 보면 대조가 강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디모데에게 2절에 너는 항상 말씀을 전파하라, 그것이 때가 좋던지 안 좋던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대로 꾸준히 행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 4절에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하는지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받지 않고 관심도 없고 자기 욕심만 채워줄 것들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길로 간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5절에서

그러나, 그러나 너는 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얼마나 슬픈 마음이 담겨 있습니까?

그러나, 너는 그 길로 가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바울 사도의 간절한 마음 말입니다.

 

4장 9절 이하로 보면

세상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디모데도 바울도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 둘 씩 하나님 곁을 떠나 세상으로 가는 사역자 말입니다. 그 속에서 바울은 얼마나 안타까움을 느꼈습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그러나 너만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애절한 마음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마음도 이와 같으리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를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부탁을 하시죠.

그러나, 너는, 너만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다 떠나고 사람들이 배신해도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사랑의 마음을 지키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 구절이 나오는 장면은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했고, 베드로가 드디어 고넬료가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의 장면에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베드로는 10:29절에 고넬료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 이야기해 주십시요.

고넬료는 자기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일을 말합니다.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고, 이웃을 도운 것을 기억하시고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오셨습니다. 우리가 다 모였습니다.

 

여기서 참 놀라운 것은

고넬료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MSG 번역을 보면

베드로님,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우리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신 무엇이든지 듣기 위해 준비되어 있고, 지금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습니다.

 

베드로 앞에 있다라는 인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그 모습은 참 놀랍습니다.

 

항상 모임들 가운데, 예배 가운데

저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곳에 계십니다.

 

이런 말씀을 자주 환기시켜 주시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록 어떤 모임에 와 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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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사역자들이 누가 좋고 누가 안 좋고 이런 것들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이 사역자는 농담을 잘해, 이 사역자는 말을 참 잘 해, 이 사역자는 내가 보기엔 이래 이런 식으로 말들을 많이 만듭니다.

이런 점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4:6절을 보면 기록한 말씀 밖으로 라는 의미를 MSG 번역에 보면 from God's point of view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문맥과 상관없이 기록한 말씀 밖으로 가지 말라 이렇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앞 뒤 문맥을 살펴보면 사람을 보고 판단할 때 기준이 바로 from God's point of view 라는 것입니다.

기록한 말씀이라는 것은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text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배운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화내게 하고 비판합니다. 이런 사람을 볼 때 뭐 저런 이상한 인간이 다 있어? 이런 식으로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실까라는 측면에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저를 정말 열받게 해서 저 사람의 버릇을 고쳐 놔야겠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분을 어떻게 바라보실까 생각하니 오히려 저 분을 축복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기도하라라는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God's point of view입니다.

 

교인들이 사역자를 볼 때도 God's point of view로 보면 달라집니다. 오히려 더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복음에 사로잡힌 사역자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역자와 비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사역자들끼리 누가 능력이 좋고 나쁘고 이런 눈으로 사역자들을 교인들이 비교하길 원하시겠습니까?

 

오늘날, 유명한 사역자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이 좋네 저 사람이 좋네, 뭐 사람 마음이니 다 그럴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우리는 모두 다 능력이 있던 없던 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같이 만들어 나가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을 비판하기 보다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4:2절에 그냥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역자들에게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판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쓰다 보니 정작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하고 사는 때가 너무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도 잘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이라면 저 분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실까 생각을 많이 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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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yworld.com/view/20090421n12738

 

위의 링크 기사를 보고 마음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월드비전의 1:1 후원결연하고 왔습니다.

http://worldvision.or.kr

 

혹시 생각 있으신 분들도 한 달 30000원으로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수 있도록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교회 1000만 성도라 하는데,

그 중의 반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나 경제적 능력이 되는 사람들일텐데

한 사람 당 한 명씩 1:1 결연하면

500만명은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무튼, 국제 NGO가 있어서 또한 한국 NGO가 있어서

구호 사업에 앞장 서 주시는 것을 보며

참 많이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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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에 있을 때 노르웨이의 젊은 부부를 만났었습니다.

오토바이 타는 것을 좋아한 20대의 젊은 부부입니다.

신혼 여행차 말레이시아에 왔다가 SBS를 해 볼까 해서 SBS를 한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면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 북한을 돕기 위한 운동도 하고

북한에 물품도 보내고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시 선진국은 선진국이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해 봤습니다.

노르웨이하고 북한하고 어떻게 보면 연결이 안되는데,

그 먼 나라에서도 북한의 구호에 관심을 가지는데

나는 어떠한가 라는 생각에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세계 여러나라의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실제적인 도움을 줄 때

선진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한국이 국제적인 어려움에 기여하는 것이

별로 안되는 걸 보고 안타까움을 많이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그 분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라는 걸 많이 느낍니다.

 

돈을 쌓아두고 부동산 불리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특히 기독인들이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지배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돈에 지배당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가진 것으로 베풀며 사는 일들이 많아졌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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