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는 의식적으로 사람들을 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또는 내가 본받아야 할 사람, 내가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

성경을 볼 때도 이런 의식이 작용합니다.
아브라함, 요셉, 다윗 등을 보면 본받아야 하고
하갈, 이스마엘, 에서 등을 보면 본받지 말아야 하겠다라는 생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안에 있는 개성적이고 다양적인 것이 무시되거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해야지 하는 기준에 벗어나게 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절망 가운데 사로잡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리는 신앙의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끊임없이 긍정을 외치고, 큰 소리로 기도하고,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교회 봉사에 몰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웃고...
혹시 이런 모습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또는 이런 모습이 신앙의 표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 듣게 되는데,
부모가 기대하던 이상적인 자식의 모습을 지니지 못해 끊임없이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자녀들을 보게 되고
교회에서 기대하는 이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지니지 못한 것 같아 절망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하나님은 과연 사람을 차별하셨던가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존중받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았고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그 과정속에 아브라함 등의 우리가 신앙적으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선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로로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선택은 과연 그 사람들의 어떤 행동적 뛰어남이었을까요?
그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적인 인류를 향한 사랑의 선택 중 일부였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선택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과정 동안 많은 사람들이 조연으로 보여지는 과정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버려졌던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보면 뛰어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도 실체를 멀리서 희미하게 보았다라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멀리서 보고 기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구약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명백히 보지 못하였던 것이지요.
약간의 비약을 더하자면,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나 하갈 같은 사람이나 그닥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신약으로 가면
이제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백히 압니다.
따라서, 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죠.
우리가 좋게 보던 아브라함 같은 사람도
우리가 안 좋게 보던 하갈과 같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제는 모두 다 하나님 안에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이런 구분들이 존재하지 아니하고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격이 이러하든, 저러하든 신앙의 바람직한 표준이 이러이러한 모습을 지녀야하든, 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며 상처주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한 가족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성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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