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레1:1-3;요4:22-24;롬12:1-2;히13:15-16


오늘 우리는 교회와 신학에서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하는 문제 제기에 다시 직면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예수 믿고 세례 받고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성도로 부름심을 받았고, 그리스도인은 평생 예배자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예배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서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이며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예배는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소원성취를 하기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 반대급부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원하는 그 무엇을 받아내려는 어떤 ‘주고받는 거래’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또 기회 있는 대로 자주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정작 ‘예배가 무엇이고,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예배의 본질과 예배의 형식과 예배의 역사와 그 변천에 관해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읽은 성경의 분문 말씀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예배의 책’으로 알려져 있는 레위기의 첫 머리인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1장 1절 이하에서, 예배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면 누구에게나 개방되고 허락된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이요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하나님께 예배(예물)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에 어떤 신분, 계급, 학식의 유무, 성별 등의 차별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원칙은 예배는 누구나 드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도록(열납하시도록)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그럼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그 원리와 정신과 규칙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보면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제사)는 드리는 데, 많은 경우에 잘 못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싫어하고 미워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다소 과격하다고 할 정도로 책망하였습니다(예컨대, 사1:10-17;암5:21-24; 미6:6-8; 말1:6-10 등).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예배를 비판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너희가 드리는 그런 예배를 계속 드리려면, 차라리 두 번 다시는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제사보다 인애”를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호6:6). 잠언서에서도, “제사 드리는 것 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을 여호와계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잠21;3). 사무엘 예언자는 “번제와 다른 제사보다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며, “제사보다는 순종”이 더 낫다고 말씀했습니다(삼상15:22). 이런 말씀을 다 찾아서 소개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없는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는 잘못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예배는 순서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예배자의 정신과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제물이 먼저가 아니고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이 점을 우리는 오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예배자의 마음과 태도가 예배 그 자체나 어떤 예물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의 머니이다.”라고 했습니다(렘12:2). 오늘 우리도 교회당에 모여 예배는 자주 드리고, 입으로는 주님을 찾지만 마음은 멀지 않은지 마땅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며 세상을 향한 증언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예배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예배는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며, 초월에 대한 승인이며, 하나님의 자유활동에 대한 우리의 전적인 의존이다.” 예배는 오늘도 우리가 성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창조주시며 이 세상 역사의 주인이시고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고 인정하며, 그 하나님을 만나며 찬양하고 경배하고 감사하면서, 그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며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오늘 아침 본문 요한복음 4장 22절 이하에서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과 대화하면서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배는 드리지만 왜 예배를 드리는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방 종교에서 이방인들이 드리는 제사(예배)는 귀신들(다이모니오이스, 즉 to demons)에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10:20). 참 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귀신에게 드리는 줄도 모르고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끔직한 일이며,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 주위에서 보면 과학문명이 발전된 21세기에 아직도 삶은 돼지머리를 갖다놓고 거기에 절하고 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영적으로 무지하고 불쌍한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언덕을 방문했을 때, 그 주변에 많은 제단들이 있는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도 보았다고 합니다(행17:23). 옛날에만 있던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안다고 하지만, 혹시라도 알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는 경우는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예배는 “장소”가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은 참된 예배와 본질적인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육신하셔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그 곳이 진정한 예배의 자리이고 그 곳이 교회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알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가축을 제물로 잡아 그 피를 드리는 모세의 율법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와 만민의 죄를 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자신의 피를 흘려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 예배를 폐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배의 진정한 본질을 확증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히7:27-28;9:11-14;10:10-18). 그래서 우리는 이제 바울 사도가 로마서 12장 1절 이하에서 전하는 말씀대로, 더 이상 죽은 제물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 세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첫째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NLT: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둘째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선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참 예배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과 삶의 변화와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4장 23절로 가서 보면, 예수님은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영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영과 진리로)”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엔 프뉴마티 카이 엔 알레데이아, in spirit and in truth)”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이해하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수가성 여인이 한 번 더 물어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영안에서 그고 진리 안에서”드리는 예배입니까? 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없고, 수가 성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 그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찾아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안에서 예배드리라고 한 것은, 바꾸어 표현하면 예배는 하나님(즉, 영) 안에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는 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고,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참된 예배는 내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없는 예배는 잘못된 예배입니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안에”라는 말씀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요14:20;15:4;17:21 등).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키며(요14:6), 진리는 언제나 빛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요1;4 이하).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기본 정신은 이미 구약 레위기의 제사법에서도 드러나 있는 원리입니다. 특히 레위기 1-7장에 있는 레위기 5대 제사는 “예수님이 말씀한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이 레위기 5대 제사법에 나타난 예배의 정신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의 예배와 연결하여 잠시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모세 율법인 레위제사법의 첫째는 번제입니다. 번제는 예배자가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잡아서 제사장이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 제물을 제단에서 완전히 불살라 연기로써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제사입니다. 피를 뿌리는 것은 죄(원죄)를 사하는 의미입니다. 번제의 핵심은 대신 희생을 당한 제물을 통해 예배자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자의 자기위탁이며 자기부인의 정신입니다. 나와 내게 속한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며, 나의 주인이라는 고백이고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번제의 제사를 온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하는 예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영안에서” 즉 하나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의미이며, 번제의 예배입니다. 번제의 예배는 내가 주인노릇 하던 삶에서 이제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배정신이 오늘 우리의 예배에서도 살아있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는 소제입니다. 소제는 가축을 제물로 드리는 피 제사가 아니고, 곡식이나 처음 익은 열매를 예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의 제물로는 특히 “고운 밀가루”를 드리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밀가루로 만든 빵(떡)을 드리는 것이 소제의 핵심입니다. 소제의 정신은 그러므로 예배자가 마치 고운 밀가루가 되고 떡이 되는 것 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요6:35,51). 소제는 바로 성육신의 제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본받아 이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소제는 자기희생과 봉사의 정신입니다. 소제의 예배는 그러므로 이기주의적인 삶에서 이타주의적인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진리 안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과 진리 안에서”드리는 예배는 무엇보다 번제와 소제의 정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번제와 소제는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예배의 가장 기본이며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모든 헌신예배는 사실 번제와 소제의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레위제사법은 때에 따라드리는 다른 세 가지 종류의 제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번제와 소제에 따라오는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화목제는 감사할 때와 서원이 이루어 졌을 때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화목제의 특징은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으로 제물을 드린 후, 남은 제물을 가지고 가족과 이웃과 함께 잔치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정신은 나눔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복과 은사와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얼마나 나누어 주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누는 삶이 곧 예배라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사도행전의 교회가 부흥한 비결 중에도 서로 나눔이 있었습니다(행4:32 이하).

넷째는 속죄제입니다. 속죄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부지중에(육신이 연약하여) 죄를 지었을 경우, 그 죄를 깨달았을 때 속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때로는 원하지 않는 죄를 범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시간에 우리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참 예배자의 태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까지 말했습니다(딤전1:15). 언제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침 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눅18:9-14 참조).

다섯째는, 속건제입니다. 속건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소유나 이웃의 소유를 침해한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율법은 손해를 끼친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 소유주에게 갚고, 속건제물을 드려 그 죄를 용서받도록 하였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의 경우가 이 속건제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 들였고, 예수님의 구원의 선언을 듣고 감격하여, 자신의 소유를 팔아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거나 손해를 끼친 경우에는 4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속건제 예배의 정신이며 예배자의 삶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부모님과 창조세계와 국가와 이웃과 여러분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신세를 지고 빚을 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언제나 빚을 갚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예배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구약의 예언자들이 잘못된 예배에 대해 과격할 정도로 책망한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언자들이 거짓 예배에 대해 책망한 것은 성전에서 드리는 경건한 예배와 일상의 생활이 너무나 괴리된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예배가 일상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 백 번, 수 천 번 예배를 드려도, 예배자의 인격과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경건한 예배의식에는 참석하는데 그 때 뿐이고, 하나님 없는 가정생활, 하나님 없는 직장생활, 하나님 없는 학교생활, 하나님 없는 사회생활, 하나님 없는 경제생활, 하나님 없는 정치생활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예배고, 이런 것이 거짓 예배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늘 21세기 현대 예배를 위협하는 네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사상과 함께 침투하는 이방 종교들의 영성과 예식의 영향입니다. 예컨대, 우리 한국교회 예배에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들과 불교나 유교적인 요소들이 침투하고 있거나 침투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스라엘의 예배에는 바알 종교가 언제나 큰 위협이었고, 신약시대 이후에는 영지주의 사상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신앙과 생활이 유리된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생활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구별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알지 못하고 드리는 습관적인 예배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왜 예배를 드리는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모르고 드리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예배자의 신앙성장과 생활의 변화가 없거나, 너무 느리게 진행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예수 믿는 다는 것,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세속주의의 영향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예배도 오늘 21세기 세속문화의 한 유형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배도 오늘 현대인의 취향과 입맛에 맞도록 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예배의 요구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가 현대인의 종교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된 예배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기의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든지, 하나님이 싫어하고 미워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되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마다 다소 긴장감을 느끼고, 어느 정도 위기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하나님이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는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드리는 예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는 예배순서나 형식이 큰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배자의 정신과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예배가 아니라, 예배자의 인격과 일상의 삶을 통하여 죄에 매여 종노릇 하던 과거에서 돌아서는 새로운 변화가 있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예배자의 삶이 빛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예배를 드리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히브리서 13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시69:30-31 참조).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호14:2 비교). 오직 선을 행함(여기서는 특히 친절한 언행)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예배)를 기뻐하느니라.” 여기서 찬송은 예배순서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러한 일상의 찬양과 평소에 친절한 언행과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된 예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바르게 되면 , 우리 가정도 바르게 되고, 우리 교회, 우리 학교, 우리 사회, 우리나라도 바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출처 : http://pcts.ac.kr/suggestion/sub_2_1_view.asp?seq=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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