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상반절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온전한 자들 중에서...
성경에는 사람들을 분류하여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온전한 자들이라고 말한 것은 온전하지 못한 자들의 그룹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온전한 자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영적인 실체에 대해 지식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부류들이 많지만 실체에 접근하는 부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온전한 자들이라고 여기서 적은 것은 영적인 실체를 알고 있어서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온전한 자들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온전한 자들은 앞뒤 문맥을 보면 세상의 지혜, 사람의 지혜와 대립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지혜는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
사람이란 존재는 끊임없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하길 원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사람의 지혜의 특성이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에서 사람의 지혜를 말할 때는 그 사람의 지혜가 결국 파멸로 이끄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보라. 사람의 지혜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나아가는가?

역사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상적인 수준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꿔왔다.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사람의 지혜, 한 사람의 지혜로는 모자라서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면 어느 정도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다수의 사람들의 현자들을 모아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지혜는 바벨탑을 하늘까지 이르게 하여 사람들에게 정해진 운명, 한계된 운명을 개척하려는 노력은 좋은 결과를 맺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지혜를 모아도 그것이 전혀 알 수 없는 부분, 생각하지도 않았던 부분에 균열을 불러 일으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결국 알 수 없는 존재이고, 알기를 원하다가 죽는 존재인 것이라는 결론을 빨리 내린 사람은 현명한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영역을 향한 사람의 노력은 고린도 사회에서도 계속된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는 것은 고린도 사회에서도 그랬고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그랬지만 하나의 힘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알 수 없는 부분의 것들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힘이 된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나라의 사람들이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 와서 느끼는 것은 충격이며 두려움이다.
물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긴 하지만,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서 알지 못하는 것들을 시도하다가 다친 경험들이 많기 때문에 쉽사리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의 두려움을 제거하기란 쉽지 않다.

좌우지간, 알 수 없는 영역에서 고상해 보이는 부분이 어떤 영역인가 그것이 바로 영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고린도 사회, 특히 철학적인 지식으로 무장했던 헬라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영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영지라는 것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많은 팬들을 얻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결국 영적 실체에 존재하지 못했으니 이런 사람들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지혜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면 그들이 오해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실체에 접근하지 않은 사람에게 지혜를 이야기할 때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받아들이는 지혜는 결국 왜곡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온전한 자들 가운데 지혜는 말해 질 수 있는 것이며,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지혜는 쉽사리 말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가 말해 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깨닫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껍데기를 가지고서는 그들이 처음부터 갖지 못했던 지혜의 실체는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껍데기는 어떻게 깨어지는가?
외부에서의 충격들에 의해서 깨어진다.

여기서 지혜는 영적인 실체를 이야기한다고 했으니
외부의 충격들에 의해서 깨어지기 위해선, 영적인 충격들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 영적인 충격들, 실체의 부분들이 두드리는 망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자에 의해서라든가, 아니면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깨뜨리는 것에 의해 껍데기가 깨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외부의 충격, 즉, 하나님 말씀의 은혜에 의해서 사람들은 지혜를 알게 되며
그 지혜를 소유하여 온전한 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말하는 것은 어리석게 들리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온전한 자들 중에서의 지혜를 말한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2:6 하반절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신학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시대에 따라서 주된 사상적 조류가 있습니다.
사상적 조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세계의 갈급한 면들을 채워주기 때문에 조류가 되는 것입니다.
변증법적 원리도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正) 이라는 시대의 조류가 있었다고 할 때, 사람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반()으로의 지향일 수도 있고 다운 그레이드되는 반()으로의 지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좌우지간 시대의 조류가 새로 탄생을 할 때에는 무언가 불만족스러웠던 것들, 가려웠던 것들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대의 조류가 되기 위해서는 또한 그 시대의 조류를 만드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처음의 시대의 조류가 되는 과정에서 출발점을 만드는 사람을 선각자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설파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인기를 얻게 되고 그 시대에서 유명해 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고전 2:6절에서도 온전한 자들 중의 지혜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세상의 지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또한 이 시대의 현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이 시대의 지혜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 자체는 본질적으로 일시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답답해 왔던 것을 풀어주는 지혜이기 때문에, 또는 시대라는 곳에 발붙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서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인식때문에 그것이 현 시점에서는 영원할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렇고 언제나 지속 가능한 지혜, 시대를 여러번 반복해도 남아 있게 되는 사람들의 사상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없어질 지혜라는 표현을 2:6절에서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없어질 지혜를 찾아야 할까요?

세상 지혜, 세상에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지혜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세력있는자들(통치자들의 지혜) 즉, 현자들의 지혜...
그것이 영원할까요?

그런데 영원하다고 믿고 사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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