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어떤 목사님을 본 적이 있는데, 싫다는 사람 억지로 잡아두고 그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라고 강요하여 고백을 이끌어냈고, 그러면서 이제 당신은 영생 받았으니 기뻐하라고 말하는 분을 보았다. 난 그 주변에 있으면서 그 강요당한 사람의 찡그리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 주어지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인가?

오늘날, 이런 모습들이 얼마나 기독교를 무례한 하나의 단순한 종교로 만들고, 이런 과정을 통해 기독교인화된 사람들의 변화되지 않은 즉, 중생(regeneration)되지 않은, 도덕적으로 문제있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기독교인들을 양성해 왔는지 모른다.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이 영생에 대해 언급한 구절은 요한복음 17:3절(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이 유일하다면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의 성경적 의미는 단순히 믿는 다는 고백이 아니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맺는 관계이며, 삶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영생이다. 영생이라는 것은 사후 세계를 믿는 사람들이나 또한 있다고 심증적으로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있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개념이다.
기독교에서 영생을 사실 너무도 단순화 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이야기하면 되는 것처럼 공식화하여 말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삶 속에서나 사회적으로 어떤 행동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아도 믿으니까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왜냐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곧 영생을 통행증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겨지는 개념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라스 윌라드는 이런 개념을 거부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영생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사실, 예수를 믿는 다고 이야기할 때, 성경에서는 예수를 성도들의 신랑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성도들을 신부라고 표현하고 있다. 결혼의 관계와 같이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를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혼 서약을 할 때, 신부측에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신랑을 믿고 따르며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취지의 서약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주로 영접하기로 한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를 주로 믿습니까? 믿습니다. 이런 형식적인 고백보다는(물론, 진심이 담겨 있는 고백이라면 상관없다.)
예수를 주로 따르기로 고백하십니까? 어떤 어려움이나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따르시겠습니까? 또한, 예수가 보여주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길을 따르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따른 고백이 더욱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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