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집에서 느낌표를 봤습니다.
베트남을 찾아가서 어떤 소녀의 심장병을 고쳐주려는 이야기인데
참 감명깊었습니다.
그 소녀는 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심장병을 갖고 산다네요.
항상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감명을 줍니다.
왜냐면 생명을 살리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외국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도 도처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죽음의 그늘에서부터 벗어나 생명을 주는 모든 활동은 가치있고 참 소중한 일인 것 같습니다.

프리덤 라이터스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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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인종끼리의 갈등에서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치며 남을 죽이는 환경 속에서 자랄 수 밖에 없는 아이들.
생존이 가장  큰 그들의 당면한 문제인 그들.
그래서, 더더욱 죽음이라는 것과 친한 그들.
그들에게 한 여교사가 삶의 희망을 줍니다.
죽음이라는 절망을 생명의 희망으로 바꾸어 줍니다.
그들이 그 교사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변하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요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하신다는 의미의 구절이죠.
어둠의 세력은 죽이고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죠.

저는 이런 생명을 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작은 제 주변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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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취재파일 4321을 보다가
나이드신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 방송 됐다.
그 취재 동기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식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자신의 생활비를 벌고자 했던 할머니들의 이야기였는데, 화재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다루면서 또한 그 세대들의 인생을 다루었다.

본인들은 자식들을 키우면서 배우지도 못하고 그 산업화의 물결속에서 악착같이 돈을 버시고 자식들을 위해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병에도 불구하고 돈 벌이도 되지 않는 한달에 단돈 20만원 정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하시는 그 할머니들...
그 돈들을 또한 자신을 위해서 다 쓰지도 않고 자식 이름으로 꼬박꼬박 적금을 드시는 그 할머니들...

이러한 모습들이 한국의 어머니들에게서 나타나는 사실이 못내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부모님에게 효도는 커녕 부담만 드리고 자식 노릇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부모님은 저를 위해 그 분들의 인생을 희생하셨는데, 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그 분들은 본인들이 먹고 쓰는 것들도 아까워하시면서 자식들을 위해 퍼주시는데, 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제 인생도 제대로 하나 해결하지 못하며,
저만의 이기적인 생각과 결단의 길이 제 주변에 많은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아 참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
이 분들의 삶을 위로하시고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들이 늘 넘치게 해 주시구요,
건강하도록 붙들어 주세요.
이 땅의 많은 부모들에게 더욱더 힘 주시고, 그들의 희생의 삶, 섬김의 삶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값진 삶인지
많은 자녀된 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항상 감사하게 하시고, 더욱더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개인적으로 수업을 듣지는 못했지만, 아주 존경하는 모 교수님이 정년퇴임을 맞이했습니다.
정년퇴임 소감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사역할 수 있었고 이런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시면서 울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것이 아니었는가를 돌아보셨습니다.

전,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뼈저리게 많이 공감했습니다.
저 또한 평소 그런 걸 너무나 느껴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길을 간다고, 너무나 희생을 하는 제 주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무너지고, 어찌할 수 없어 하나님만을 불러봅니다.
만약 저 혼자만 고생하는 것이라면 그 고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와 가까운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그래 보지만, 괴로운 건 괴로운 것입니다.

난 정말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 고통 절망 속에서 방학이 끝날 무렵 저녁에 하늘을 보았습니다.
천국 소망이 갑자기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웃음이 피식 나왔습니다.

고통 가운데 웃음이 나오는 건 왜일까요?

상황이 어렵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더라도
예수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하나님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좌우지간, 변함없이 이 두가지에서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약한 것이 자랑이 됩니다.
예수가 자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덮고 나는 사라지고 그분의 은혜안에 제가 있습니다.
그분만이 드러납니다. ^^;;;

오늘 밤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골목에서 어떤 한 할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전화 있느냐고 물으면서 나한테 전화를 집에다 걸어달라고 말하면서
아파서 그런다고 가족한테 데리고 와 달라고 전해달라고 하셨다.

전화를 걸었는데,
아마 자식 쯤 되는 것 같은 데 무지 퉁명한 목소리로 묻는 것이다.
"노인네가 아파요? 얼마나 아파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노인네라는 말이다.

자기 부모보고 노인네라고 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 쥐어박고 싶다.
존경의 말로 대하진 못할 망정
늙었다고 그렇게 비아냥거리고 낮춤식의 말로 쉽게 말하는 사람들...
지네들은 안 늙나.
더더욱 황당 했던 것은 그냥 성의없이 전화를 툭 끊어버리는 무례함.
최소한 정중하게 말이라도 하던가.

왜 이리 버릇없고 막되먹은 사람들이 늘어가는지...

-_-;;;

보통 차를 운전하고 갈 때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특히, 혼자 차를 몰고 갈 경우(매우 드문 일이기는 하나)만큼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때도 드문 것 같다.
차를 몰고 화천으로 내려가던 중 들었던 생각이
요새 경제가 어렵고 그래도 옛날보다는 낫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신문에 학생들이 점심 준비해 올 형편이 못 되어 수돗물로 배를 채웠느니 하는 기사들이 종종 나오곤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기사는 찾아 볼 수 없다.
왜냐면, 국가의 무료 급식 지원 제도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렵더라도 밥을 굶어야 되는 환경 속에 있는 사람은 옛날만큼은 많지 않다.

예전엔 컴퓨터 성능이 지금과 비교해 봐야 아무리 떨어진 것이라도
있는 것 자체로 부러움을 받았었는데
요새는 컴퓨터 없는 집 드물고, 인터넷 안되는 집 별로 없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 수준은 옛날보다 높아졌고
복지 수준도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그러다보니 자꾸 우리들의 눈은 잘 사는 특정 계층에 초점을 맞추게 되어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감사가 없어지고 우리의 처지가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 때가 많이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체감하는 힘든 상황들은 분명 존재하리라 생각하지만, 확실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많지 않은가 생각된다.

우리가 힘들었을 때 어려웠을 때를 생각해 보면서
감사를 찾아보는 것이 어떻게 보면 완적 막힌 보수적인 사고 방식이라고 낙인찍히기 쉬운 이 시대
그래도 감사하다고 웃음 지어 보는 것은 어떨까?

학력 부풀리기 또는 위조의 기사가 많이 나오는 이때이다.
물론, 거기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에게 잘못은 있겠지만,
사회적인 잘못도 분명 크다.
실력보다도 그 사람의 간판을 보며 판단하려는 사회.
참... 별로다.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사다, 선교사다 이런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인정받는다.
그래서, 그런 타이틀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목회자의 삶을 살더라도
선교사적인 삶을 살더라도 뭔가 자유하지 못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가르치기에 능한 사람도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는 어느 교단 출신이냐 어느 신대원 출신이냐를 먼저 따진다.
그 이후에야 그 사람은 인정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냥 무시 당하게 된다.

어떤 운동에서는 각 가지 사회 영역에서 선교사라는 용어를 쓴다.
통일 분야에서 헌신할 사람은 통일 선교사, 직장 생활에서는 직장 선교사 등등...
이런 용어를 써야 한다는 것이
내적으로 그런 한국 기독인들의 압박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한국 기독인들이
풀타임으로 헌신하고 전임으로 사역하면 신앙이 좋고
그렇지 못하면 안 좋다는 그런 사고 방식에 사로 잡혀 있다.

지금 현재,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도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자유함이 있을텐데.
믿으면 믿을 수록 사회적인 관습이나 시선들에
얽매어져 자유가 없어지는 비극은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

이름을 날리기 보다는
묵묵히 살아서 숨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길 원한다.

나 자신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그런 면들이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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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와서 한 학기를 돌아보며 생각을 정리해 보게 되는데,
신대원 와서 가장 복된 것 중의 하나는 박동현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교제를 가질 기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만나서 개인적 교제를 가지고 싶다.

첨부 파일은 사경회 때 특강을 하셨던 박교수님 원고이다.
박교수님 홈페이지( http://dhpark.net/ ) 들어가도 다운 받을 수 있다.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도록 했으니, 이 곳에 강의 했던 원고를 올려 놓아도 큰 실례가 아닐 듯 하는 희망을 갖고 올려 놓는다.
기회가 되시는 분들은 박교수님 홈페이지에 들어가셔서 설교 원고나 기타 다른 자료들도 읽어보시면 좋을 듯...

하나님 오늘 뉴스를 보다가 남북 철도길이 일시적으로나마 열리게 된 걸 보았네요.
이걸 보면서... 제 머릿속에 스쳐갔던 것은
얼마나 한국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남북이 하나되길 기도했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중보기도 모임에서 부르짖는 수많은 기도의 사람들과
항상 남북 통일이 기도의 제목이었던 수 많은 한국 교회들...
드러나진 않지만, 갈려진 남북의 현실에 가슴 아파하면서 골방에서 기도하며 눈물흘린 수많은 이땅의 기독인들...
이 모습들이 하나 하나 스쳐가더군요.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공부하면 공부할 수록
이 땅의 모든 역사를 움직여가시는 거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무릎꿇을 수 밖에 없고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 나라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이런 희망의 모습을 보면서 눈시울 적실 수 있는 감동을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나의 삶 가운데, 교직을 그만두고 DTS나 SBS를 가기까지의 과정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DTS나 SBS를 했을 때 비록 힘든 일들이 많았으나, 참 누리게 된 시간이었음을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서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돌아보건대,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있고, 하나님은 나에게 더더욱 책임감 있는 것들을 요구하시는 것 같다.
비단, 경제적인 것 뿐만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하나 하나 치열하게 싸움해야 할 것들이 생기면서 그 가운데 기도하고 결정해야 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여러 면에서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 자라가면서 더더욱 의무와 책임감이 뒤따르는 것 처럼
영적인 상황도 자라가면서 더더욱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는 것 같다.

나의 삶이 더욱더 하나님 앞에서 잘 단련되어서
넉넉하게 사랑을 퍼주는 그런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느 것 하나 잘 하지 못하는데,
더더욱 잘하는 나의 모습으로 다듬어지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과정가운데
나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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