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성찬

 

고린도전서 10:16-17 공동번역

10:16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0:17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최고의 식탁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도 이 질문에 생각해 보면서 나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식사 자리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 나서 저는 색다른 경험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학부모들과의 식사자리였습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저는 모든 것이 새로운 자리였습니다. 그 때 쇠고기를 구워먹었는데, 아마 굉장히 좋았던 쇠고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입에서 살살 녹는 쇠고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자리를 최고로 칠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최고의 식사자리였다고 기억되는 것은 어머님이 차려주신 식사자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난주에 사정이 있어서 고향집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고향에 가면 참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손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어머님께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들여 준비하시고 온갖 과일들과 맛있는 것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저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며 tv도 보고 있고, 책도 읽고 식사가 차려지면 우와 하는 탄성과 함께 이 모든 음식을 먹습니다. 먹고 나면 설거지도 어머님이 다 해 주시니 그야말로 기분 최고인 식탁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찬에 대해서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빵을 떼는 것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잡히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베푸신 그 성찬은 참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도 일년에 여러 번 성찬식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잘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찬은 하나님 은혜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 지성소까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차례(횟수로는 4번정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성경에는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식서인 <장로들의 유전> <미쉬나>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하여 이런 규칙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되고 첫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지성소 법칙을 몰라서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발목에 끈을 매고 들어 가야 합니다. 혹시 죽으면 잡아 당겼습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자기를 정결하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는 하나님의 절차가 아닌 다른 절차를 따라 들어갔을 땐 죽게 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선 엄청난 정도의 거룩함과 성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고 하셨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동안 정결케 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보았지만, 제사장들과 기타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결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보았다가 존재가 멸망당하는 위험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기드온과 같은 여러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자를 만날 때 내가 죽게 되었다고 걱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다른가? 구약에서는 율법을 주시면서 지킬 것을 말씀하시는 어찌보면 하나님은 두렵고 공포의 대상인데,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을 과감하게 버리고 신약에서 나오는 참 사랑의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사에서 이단의 한 형태로 나온 주장이기도 하며 오늘날에도 여러 이단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에는주어진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다음의 것을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은혜와 배치되지 않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먼저 은혜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면서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집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사건입니다. 율법보다 먼저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왜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는가에 대한 부분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필요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다음의 것이 하나의 큰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자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따르면 얼마나 좋을까요?

솔로몬은 젊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고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하며 잠언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자기가 아는 대로 그대로 실천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전도서 2장 3절에는 솔로몬이 인생을 헛되게 보낸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3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하여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하였고 하나님이 지혜를 줍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서 궁금함이 많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일까? 이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까? 더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없을까 하고 자신을 술로 즐겨보기도 하고 부로 즐겨보기도 하고 각종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기쁘게 한다는 것으로 자신을 채워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늘그막에 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전도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서 12장 1절에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늙어서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겠다고 결론 내리는 것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봤으니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지, 인생에 참된 의미를 주는지를 깨달으라고 솔로몬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그 생활이 최고임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선택을 능히 압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 때 그것이 진짜 기쁨을 주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한국의 남자들은 나이가 되면 국방의 의무를 지게 됩니다. 신기한 것은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기전이나 갔다 온 후나 부모님의 사랑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변함없이 자식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시고 정성들여 자식들을 섬겨 주셨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부모님께서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기 전까지 부모님의 사랑을 모르고 군대에 가서 정말 고생하며 인간적인 대접을 잘 못 받고 명령으로 사는 군대라는 조직사회에서 부모님을 생각해 보니 얼마나 헌신적이었고 사랑이 많으셨는지를 느끼게 되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많은 젊은 청년들이 결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대하면 부모님에게 잘해야 겠다 이런 것입니다. 떠나봐야 받았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다시금 결단하게 됩니다.

이제는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자신의 힘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니었음을 가르쳐주는 도구로, 또한 하나님이 그냥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가르쳐주는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로마서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기독교의 은혜를 가장 잘 표현한 비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떠나 탕자가 방황하다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먼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탕자가 떠나도록 재산을 떼어 줬다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는 능히 자신의 재산을 당장 주지 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 안 듣는 자식에게 앞으로 영원토록 재산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재산을 떼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보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식이 떠나봤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더욱더 알 수 있기 때문이며, 사랑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어머니께서는 저의 잘못된 점을 고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제가 잘못했을 때 바로 벌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참 많이 맞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쩔 때는 제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내버려 두신 적이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선 아주 따끔하게 혼이 났습니다. 왜 시간을 두고 벌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을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참으시고 벌을 보류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바로 주어졌을 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율법을 통해 인간이 처절하게 자신이 한계를 가지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교훈으로 삼기 위해 구약의 그 오랜 기간들을 하나님은 끈기를 갖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느낄 기간을 찾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 아주 오랜 기간이 흘렀습니다. 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될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이후에 바로 은혜의 결정적인 순간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일방적으로 베풀어졌지만, 인간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겠다고 에덴을 뛰쳐나갔고, 또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도 완전함으로 깨끗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힘들게 살았던 시간들 속에 그것이 인간의 총체적인 실패임이 드러났을 때, 바로 은혜의 완전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세워두신 율법의 원칙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 지키고 나아가려고 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 한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 모든 한계를 깨뜨리시고 예수님의 식탁으로 사람들을 조건 없이 초대하였고 어떤 노력도 없이 예수님이 베푸신 그 정성스런 식탁아래서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탁에 참여한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세리 삭개오도 율법으로는 절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지만, 예수님이 뽕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내가 너의 집에서 같이 식탁을 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은혜의 자리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들과 함께 하셨고, 가난한 자들, 창녀들과도 같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짐들을 대신 지시고 용서하시고 그들과 식탁을 같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탁이었던 최후의 만찬의 순간으로 돌아가보려고 합니다. 흔히, 최후의 만찬 그 자체만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최후의 만찬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된 줄 아시고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시면서 바로 행하셨던 것이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위해 준비하신 것들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끝까지 이 사람들을 사랑하겠다. 마지막으로 발을 씻겨 주고 떡과 포도주를 통해 나의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그리고 나서 14장에는 그냥 이 사람들을 세상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어 항상 같이 있게 하겠다. 얼마나 따뜻합니까? 저는 이 식탁을 생각할 때마다 어머니의 식탁이 떠오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처음과 끝이 되신 하나님 항상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태초 전 부터도 우리를 향한 이 예수님의 식탁 준비와 같은 사랑을 하셨으며 지금도 동일하십니다. 단지, 우리들이 그 사랑을 거절하고 이해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그 품을 떠나갔을 뿐입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이나 신약에서의 하나님이나 같은 분이시고 태초부터 우리를 향한 은혜를 표현하신 분이셨으며, 율법이라는 과정을 지나는 동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계획하신 분이셨습니다.

[히13:8]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순종하므로 그들이 40년동안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그 벌을 내리시고 하늘 위에서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벌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계시며 광야를 지나시는 모습을 신명기 2장 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보통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벌을 주는 경우 교사는 그 벌을 같이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벌로 40년간을 광야를 헤매게 하셨지만,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계시며 40년 지난 후에 내가 다시 함께 가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40년간의 광야의 방황을 같이 담당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모습과 오버랩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들이 자신의 죄악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육체로 이 땅 가운데 자신이 직접 그 모든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르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분명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오래 참으시는 그 사랑이 공의와 정의보다 더 크므로 우리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 놀라운 식탁으로 하나님의 초대가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획되었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품에 안겨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의 떡과 포도주를 받아 마시며 감사함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식탁을 베풀어 주신 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을 인간들에게 하셨습니다. 죽음으로 사랑을 세상 끝날까지 표현하시고 그 사랑을 알기를 마지막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얼마나 더 하나님이 무엇을 하셔야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아니하고 받아들이게 될까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을 통해서 마지막까지 사랑을 표현하셨는데 아직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찬식에서는 어떤 사회적 지위나 성별이나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떡과 포도주가 나누어집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은혜의 식탁입니까?

이 은혜의 식탁, 사랑의 식탁, 인간을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의 준비를 기억하고 사랑의 준비 후에 십자가 지신 그 끝없는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그 성찬의 식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복이 한량없이 임하는 놀라운 하나님과의 두려움 없는 교제의 자리인 것입니다. 기쁨의 자리인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와 하나님과의 어떤 장막도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임해야 할 것이고, 우리 삶 가운데도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전에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또 하나의 식탁을 살펴보며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요한복음 21:9-13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1:9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21: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 오너라."

21:11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21:12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1:13 예수께서 가까이 와서 빵을 들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또 생선도 주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가 어부였던 사람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못 잡고 날이 밝았을 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정말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제서야 주님인 줄 알아본 제자들이 육지로 올라가 보니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생선과 빵을 구워 놓고 아침을 준비해 놓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빵과 생선을 집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식탁입니까? 예수님이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언제나 은혜로 섬겨주시는 어머니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그 정성과 섬김의 자리, 이 자리로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식탁에 아무런 조건없이 감사함으로 참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그냥 일방적으로 베풀어두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사랑의 식탁으로 초대하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며 사랑한다 말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외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고 풍성함의 길인지를 깊게 알기를 원합니다. 방황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평생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겨서 그 사랑을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자로, 주님의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의 식탁에 같이 참여할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Posted by HolyNFire sunki 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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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통해 생각하는 삶

고린도전서 10장 15절

나는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어느 집회에 한 모임에 아멘녀가 있었습니다. 신일 형제가 절 보고 된장남이라고 부르듯이 성별에 따라 차별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아멘녀는 집회에서 목사님이 설교 할 때마다 아멘 아멘을 말합니다. 뭐 다 같이 아멘이라는 말로 화답할 때는 괜찮지만 목사님이 뭐 한 마디 꺼내면 다 아멘합니다. 정말 귀에 거슬려서 예배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 누가 입에 지퍼를 닫을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틀린 이야기를 해도 아멘, 농담을 해도 아멘.

 

 국어사전에는 아멘이라는 뜻을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듣고 자기 머릿속에 동의가 된다고 생각했을 때 그 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때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의 문제점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생각 없이 아멘을 남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 없이 아멘 아멘을 남발하니까 삶에서 변화가 없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오해 중의 하나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믿으라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러려면 무엇 때문에 이성을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공중의 나는 새를,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셨습니까? 오해 중의 하나는 예수님은 논리적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굉장히 논리적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마가복음 3:22-27절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예수님보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것이다라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나라가 분쟁하면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라는 논리로 공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냉철한 지성과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율법사 하나가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형식에 얽매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마음과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얼마나 생각이 많으신 분이셨겠습니까? 우리 안에도 이런 태도가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묻고 또 물어도 귀한 질문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는 이성적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정말 이성적인데 비해 기독교는 이성적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같이 이성을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걸 싫어했던 세대가 또 있었을까요? 다들 경험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대학을 봐도 그렇습니다. 철학과 물리학이라는 과목이 인기가 있습니까? 신대원에서도 조직신학이라는 변증학이 별로 인기가 없고 다들 실천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관심이 있으며 경험하는 것에 초점이 많습니다.

 

  SBS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다큐에서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술집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비추면서 한 사람과 인터뷰 했습니다. 왜 교회를 안다니냐? 그런데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성적이지 않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뭔가 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유럽 청년들이 불교나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기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반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자기가 정말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의 기쁨을 누려 본 다음에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 때의 기쁨과 비교해야 합니다. 전자를 경험해 보지도 못하면서 후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다가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 충만하여져서 세상의 기쁨이 아무것도 아니었노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왜 그런 것들은 살펴보지 않습니까? 다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쪽만 생각해 보고 다른 쪽은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이성은 결단과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삶에서 변화를 일으킨 것들이 있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졌습니까? 어떤 것에 도전 받아서 나의 삶을 생각해 보니 그것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이 바뀔 수 없겠구나라는 철저한 인식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이성을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받고도 단지 감정적으로만 반응하고 정말 그것이 나한테 필요함을 뼈저리게 인식하여 이렇게 해야 겠다라는 결심으로 나가는 이성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지를 일으키는 것은 이성의 명령에 의해서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읽을 때 왜 그런 말씀이 있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설교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아멘 하지 마시고,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인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교회에서 상처 받았다고 하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이성을 사용하지 않아서 넘어졌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어서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면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걸 못하니 상처받습니다. 무너집니다. 쓴 뿌리가 생깁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더라도 분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것을 분별하기 위해선 여러분은 말씀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참 신기한 현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선교 단체에서 훈련 받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겠는데, 훈련이 끝난 다음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 잘 안 들린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왜 옛날 초대 교회 시절에는 병자들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오늘날에는 조금밖에 안 일어나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린다고 뜻을 모르겠다고 방황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럼 다음과 같은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면서 광야에서 오랫동안 생활 했습니다. 먹을 물도 없고 양식도 없었습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무슨 양식을 많이 준비해 나왔겠습니까?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 했습니다. 그럼 먹을 것과 물은 어디서 구합니까? 아무것도 없는 광야 생활을 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구할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또는 전쟁을 해서 전리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공급하는 방법을 주된 방법으로 채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공급자 되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5:12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5: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만나가 그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해에 땅에서 나는 소출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병 고침의 기적들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병원이 없는 곳입니다. 치료 수단이 없는 곳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재정적인 공급이 가장 잘 채워지는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경제적인 것을 도무지 채움 받을 수 없는 곳입니다. 방글라데시에 갔더니 제자훈련 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무슬림 국가라서 도무지 크리스쳔들에게 경제적 뒷받침을 해 줄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놀랍도록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하나님의 음성이 명확하게 들려지는 곳은 어디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없고 위험한 지역에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린다고 말하십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 놓은 책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면 왜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이 사용해서 먹으라라고 말하는데 아직도 만나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소출물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생각하여 보라, 말씀을 통해 이 분이 진정한 구원자가 아닌가 생각하여 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이 예언한 분이 바로 이 분이다라고 여러 증거를 대며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메시야는 아직 안 오셨어라고 말하며 다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제외시켜 놓고 어떤 다른 말씀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바울도 이 세상에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상고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날마다 성경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헬라인들의 관심은 지적인 곳에 있었습니다. 남자도 그 당시에는 지적 교육을 받은 대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해마십시오. 믿음은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이성을 사용하면 사용할 수록 우리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성 사용의 최종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즉, 인간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잘난체를 하는 것이지, 진짜 이성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파스칼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종착점은 이성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정말 신이 존재하고 신이 가르쳐준 종교라면 다음과 같은 것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신이 완전해야 하며 신의 길, 신이 제시해 주는 길 또한 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신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겠지요? 인간이 범하는 범죄적인 것들을 신이 행한다면 신이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그것이 완전하고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신명기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 종교가 보면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악한 행동을 하도록 권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런 종교들은 한계가 있는 인간이 만든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이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리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다면 무슨 신이겠습니까?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것을 반증하지 않겠습니까?

 세계사를 읽어보면 문명의 시작에 대해서 나옵니다. 큰 강 근처에 인류는 문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량을 조절하지 못해 농사가 잘 될 때도 있지만 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그 유량을 조절해 줄 절대자 즉, 신들을 만들게 됩니다. 물의 신, 바람의 신, 농사의 신 등등을 말입니다. 윤회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한국 기독교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김용옥 교수의 책입니다.)이라는 책을 보면 윤회 사상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곡식들이 자라고 없어지고 또 시간이 지나면 곡식들이 자라는 것을 보며 자연은 순환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윤회 사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나옵니다. 이해 되지요? 내가 이해하는데 인간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심지어 세계의 유명한 신학 대학원 교수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삼위일체도 아직까지 이해되지 않는 교리이며,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라는 것도 정확히 설명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모든 인간의 이해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 있어야 진짜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2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하시고 있습니다.


 지혜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스스로 판단하여 보십시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예수를 믿어도 난 왜 예수를 믿는가? 예수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견고한 반석 가운데 서게 됩니다. 또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고 결론을 내리시며 그대로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줄 것입니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지금 저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가지고 명확하게 주의 뜻을 이해한다면 저는 과감히 그것을 행할 것입니다.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저에게 괴로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도 일주일 동안 싸워보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게 새겨 보십시오. 삶을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매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성경은 이 시대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답을 내리고 있지 않다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과감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있는 자들아,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생각하여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혜있다 하면서 쓸 데 없이 다른 일을 생각하느라 정작 하나님 뜻을 생각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일에는 잘 생각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5절을 읽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기도하며 생각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통해 주의 뜻을 발견하며 실천하길 원하오니, 우리 가운데 주의 지혜로 채우시고, 주의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게 해 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특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를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HolyNFire sunki 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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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11-14절

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영지주의는 고린도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영지주의 요소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가 고린도 교회 당시의 가장 강력한 이단적인 요소였듯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영지주의적 요소가 가장 강력한 이단적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결국 육과 영을 분리하여 영적인 것에만 모든 관심을 두던 사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육에 관련된 것들은 경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바울은 우리의 삶도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육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요소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단지 형상일 뿐이지, 영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영과 육을 분리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육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왜 하나님은 육이라는 것을 정성들여 만드셨겠습니까? 그리고, 왜 육이 존재하는 역사라는 공간가운데 두셨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육을 왜 입으셨겠습니까? 또한 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육을 입으셨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또한 부활 할 때 육을 입을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에는 육은 영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도 영적인 것만 소중하게 여겨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몸과 관련된 것들, 역사 같은 것에 관심이 없거나 소홀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태도는 영지주의적 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두 가지의 선택이 우리 가운데 던져져 있습니다. 하나는 올바른 믿음의 본을 보이는 것이고, 하나는 믿음에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데까지 자라길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도 버려지길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4:5-7절에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따르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다라고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34: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34: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 첫 번째의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밝히신 하나님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해서 자비롭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고 은혜롭지 아니하고 화를 잘 내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입니다. 두 번째는 벌을 면제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보이신 것을 요약하면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이유는 어떤 사람도 멸망하길 원하시지 않고 생명의 길로 오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6장 9-11절을 읽으면서 기억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죄인들이 정죄당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다시금 새롭게 되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계속해서 부인하고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멸망당하는 일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니느웨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얼마나 잔인한 사람들이었습니까? 니느웨는 바벨론의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무자비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가르고 사람들의 목을 베어 창 끝에 꿰어 놓는 등 그 잔학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은혜로우신 것을 알고 그곳에 가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마음이었겠지요. 니느웨는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회개는 일시적인 회개였습니다. 결국 나훔서에서 보듯이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께 돌아올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부인하고 그 분께 마음을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불현듯 임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30에는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직접적인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은 과거 이스라엘에게 행했던 것 같이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주님의 재림의 날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 때까지, 또는 우리가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떠나는 그 때까지 우리를 오래 참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시고 자비가 많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역사가 반면교사가 되었습니다. 반면교사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다른 사람이나 사물(事物)의 부정적(否定的)인 측면(側面)에서 가르침을 얻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끝끝내 돌아오지 않을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에 귀를 기울이시겠습니까? 아니면 끝끝내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반면교사로 남겠습니까?


제가 다니는 신대원에 참 훌륭한 교수님이자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저희 학교는 일주일에 네 번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 때, 여러 교회의 목사님들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렇지만 모든 말씀이 다 성경에 바탕을 둔 말씀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랑을 늘어 놓으시는 분도 있으시고, 어떻게 교회 성도들의 숫자를 늘리셨는지를 말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시지 않는 일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어려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님은 이런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배울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한 가지는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들을 배우려고 하고, 만약 설교에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반면교사로 삼으면 된다는 취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무장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성숙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무언가 안 좋은 것을 보았을 때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고 교회는 이런 곳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면 안되겠다라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참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그 분들입니다. 우리야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으면 되지만, 그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이제는 우리가 힘써 배워야 할 것 즉, 그리스도인으로 무엇을 본을 보이면서 살아야 되는지 말해 보겠습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라고 하여서 어떤 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절하지 않는 것만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중에 많은 분들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는 그런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게 됩니다. 그것은 다른 신이 아니었고 그들이 하나님이라는 신을 금송아지 형태로 만들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우상 숭배를 혹시나 하지 않고 있습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내가 만든 이미지에 국한시키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를 위한 도구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우상 숭배는 우리가 평생 싸워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설교 시간에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상 숭배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그 영향력들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우리가 더욱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우상들입니다.

이 우상에게서 피하라라고 14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피하라라는 원어적 의미는 도망치라에 가깝습니다. 그만큼 우상 숭배의 영향력이 심각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개척한 이재철 목사님의 이야기를 얼마 전 서점에서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두 가지에 참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며 교회 가운데 만난 모든 사람들과의 교제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겸손한 자세였습니다.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다고, 심지어 어려운 상황에서나 자신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큰 복이었음을 고백하는 태도였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을 교회에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히려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큰 특권이 있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안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참 부끄러움이 많았습니다. 동막교회 청년부를 맡으면서 제 안에 많은 기쁨이 있었지만, 때로는 무언가 제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듯하여 답답해 하며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축복의 통로임을 잊어버릴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다 날 정도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우리 앞에 상황을 보면서 그것들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 감동 받은 것은 교회 이름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회 이름은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었다가 교회 공동체의 어떤 사람의 영향력이 커져서 주님의 교회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교회가 되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임기를 딱 10년으로 못 박고 10년이 지나면 교회를 떠나기로 하면서 사역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읽은 책도 10년이 지났을 때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눈 것이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참 본이 되는 목사님 중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우상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게 될 까봐 이 모든 것들을 계획하며 실천하며 산 분이었습니다. 저도 그런 뜻을 생각해 보며 저 또한 이재철 목사님을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지 아니하기 위해 과감하게 그 책을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책들도 있지만 그 분의 책을 더 읽으려는 욕심을 내려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 이재철 목사님을 우상으로 만들려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어떤 우상을 우리는 섬기고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의 설교만 들어야 은혜가 되고 다른 분의 설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그 목사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 예배에만 참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또한 그 교회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어느 자리에서나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의 동기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어떤 큰 모임에 스타이신 한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돌아가면서 설교자들이 와서 말씀을 전하는 이 모임은 이 분이 설교하실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리고 인지도가 별로 없는 분이 말씀을 전하실 때는 자리가 많이 빕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우상 숭배의 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이지, 어떤 상황을 즐기는 자는 아닌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장 20절에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12절에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 자신이 돋보이려고 하고,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 우리의 삶이 움직여지고 공동체가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우상 숭배에서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해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다른 이미지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인 로마 압제에서 벗어나게 할 분으로만 인식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바로 너희들이 원하는 이런 왕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리를 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미지에 부합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도 바로 우상을 섬기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은 4장 8-9절에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권세를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들 단호히 배척하면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0일 광야에서의 우상 숭배와 관련된 이런 사단의 시험은 40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평생의 삶을 통해서 사단은 계속 이렇게 속삭입니다. 죄인을 대속하는 역할이 아니라 정치적인 왕이 되라고, 너의 능력을 보여서 사람들을 굴복시키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7장 40절에 예수님보고 사람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사실 때 평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고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다른 이미지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과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이제 우상 섬기는 문제에서부터 우리는 자유이고 절대 우상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음이 혹시 있으십니까? 예수님처럼 우리는 평생의 삶 가운데 똑같은 말을 사단으로부터 듣게 되고 마음 속에 우리가 주인으로 섬기는 예수님 외에 다른 것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우상에서 벗어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말씀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우리의 편견을 내려 놓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가 원하는 말씀만 듣는 것도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헌금을 강조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헌금을 못할 때 우리의 마음은 왠지 죄책감을 느끼고 자유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너희가 정작 헌금을 하면서 진짜 중요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하면 죄책감이 없고 헌금을 못하면 죄책감이 있으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더 죄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들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상의 한 형태인 것입니다.

저는 이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강력한 우상은 바로 물질의 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는 물질적인 것이 해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지배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회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함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예레미야 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 문제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땅을 산다면 어찌 불의가 판치며 물질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하여 그 사람을 예수님보다 더 신뢰하는 이상 우리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만의 주가 아니라 모든 만물과 모든 사람의 주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이 이 나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도록 기도해야 하지, 어떤 사람이 주가 되도록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역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이었습니다.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단지 일본을 향한 애국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장로교 총회에서 결의(1938년 9월10일 장로교 역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하였고 많은 목사님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하였습니다. 분명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우상숭배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은 우상숭배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신사참배를 거절하다가 죽임을 당한 주기철 목사님의 사례를 아실 것입니다. 신사참배한 목사님들을 맹비난한 목사님들이 장로교의 한 분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참 재밌는 것은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셨을 때 자식들이 갈 곳이 없어서 그 분파의 목사님들을 찾아가서, 자기들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매몰차게 거절당해서 주기철 목사님의 자녀들은 이리저리 방황했다고 합니다. 장로교 통합측의 한경직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참여한 것을 일생동안 참회하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모든 것 되신다고 고백하며 죄인의 심정으로 사셨습니다.("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1992년 당시 영락교회 원로 목사이던 고(故) 한경직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자리에서 이처럼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주기철 목사님의 자녀들을 매몰차게 쫓아냈던 그 분들은 우상숭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우상숭배인 자기 의를 우상으로 섬기고 사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한 잘못은 있지만 자기 의를 예수보다 더 내세우고 이웃 사랑보다 더 내세운다면 그것자체도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을 신으로 섬깁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의 보호자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애굽이라는 나라가 자신들을 바벨론으로부터 지켜줄 보호자라고 애굽으로 가자 애굽을 중시하자라고 말하고 있을 때 선지자들은 애굽이 너희의 보호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호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를 도와 준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그 모든 역사 가운데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의 보호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보호자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 인생의 보호자요 반석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이 아니라 나의 구원 나의 반석 오로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에게서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평생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우상 숭배에서 넘어지지 않을까 조심하며 우상 숭배에서 피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 숭배의 덫에 빠져들어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우상 숭배는 모든 죄의 시작입니다. 과거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라는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역하고 다른 것을 따르기로 결정하면서 죄가 들어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다음과 같은 영혼의 고백이 늘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시편 62편의 한 부분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우리의 근원되십니다.

Posted by HolyNFire sunki 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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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10:1-14

10: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10:3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10:4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10: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10:6 이러한 일은 우리들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0: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10: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10: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며칠전 너무나 더웠습니다.

그 때 마을버스를 탔는데, 에어컨 성능이 별로 안 좋아서인지 버스안이 정말 더웠습니다. 분명 짜증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더우면 쉽게 짜증나기 때문입니다. 마을 버스 타고 출발을 기다리면서 이 점을 깊이 인식한 저는 짜증나는데 마음을 내어 주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을버스를 타고 갑니다. 사람들이 탑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짜증내기 시작합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이곳에서 내려달라고 우깁니다. 사람들이 더욱더 짜증냅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아기가 울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의 신경질이 극에 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익히 예상했던 일이라 짜증나지 아니하고 입가에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밖을 내다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 측면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어떤 상황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짜증이 나고 화가나는 것은 단순히 어떤 아주머니 때문이라든지, 아기가 운다든지 등의 이런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상황을 알았으면 자신을 내어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상황에다가 맡겨버리기 때문에 그 상황에 휩쓸려 가기 쉽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으며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정말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고 그 분의 도움이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제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많았을 때 새벽기도를 몇 번 나간일이 있었습니다. 기도 제목을 잔뜩 적어서 새벽기도를 나갔는데,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선기야, 누가 너를 가장 잘 알겠니?” 생각해 보니 제가 제 자신을 잘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곧 이어서 내가 너를 창조했으니 너가 무엇을 해야 가장 잘할지 무엇이 너에게 필요한지 가장 잘 안단다. 그렇기 때문에 너의 기도제목을 잔뜩 가지고 와서 일방적으로 나에게 이야기하기 보다는, 너가 무엇이 필요한지 나에게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망치로 두드려맞은 듯한 그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무엇을 해야 여러분들이 가장 잘 할지 여러분 안에 어떤 훌륭한 자질이 감추어져 있는지? 무엇을 고쳐야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자유함과 기쁨이 나오는지? 어떻게 해야 여러분의 인생이 풍성한지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르니까 자꾸 어떤 유명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려고 하고, 그 방법대로 시도도 해 보려고 합니다. 알면 절대 그런 일이 없겠지요. 그래서, 조금만 맞는 것 같으면 감동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얼마나 다양합니까? 어떤 공식이 그 사람에 가장 잘 맞춰서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가장 우리의 삶에 대해서 가장 잘 아시고 가르쳐 주시는 분은 바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고쳐야 할지도 알게 됩니다.


 제가 계속 강조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우리의 삶이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른다고 우리 힘으로 살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는 바로 우리의 방향성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는 내 인생 조차도 어떻게 바꿔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며 방향성을 나 중심에서 하나님에게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성장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라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어려서부터 잔소리를 너무나 많이 들어온 여러분과 저는 누가 무엇을 하라 그러면 무조건적인 반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가장 불쌍한 상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어떤 말씀도 어떤 충고도 여러분에게 하지 아니하고 내버려 두는 상태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8절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이었습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니? 마음을 하나님께로 드리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하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울은 계속 그런 말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러다가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그에 비해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잘못을 지적하니 자신이 잘못 되었다고 인정하고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잔소리 하고 누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관심이 없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든지 나쁜 길로 가든지 상관이 없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냥 내버려 두실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2장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자녀로 생각하시기에 여러분들에게 이런 것들을 하지 않겠느냐고 여러분 가운데 책망하시고 이런 것은 너가 잘못 되었다 고쳐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책망들이 계속 거슬립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창조시에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지만 죄 때문에 그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무엇이 잘못 되었다고 지적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나를 솔직히 인정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칫,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잘못한 게 없다고 단지 상황이 문제인 것이야라고 말하겠습니까? 마을버스에 탄 사람들처럼 많은 사람이 단순히 상황이 문제라고 이야기합니다. 본질인 자신이 마음을 어디에다가 내어 두었는지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예배에서 무엇을 바라십니까? 어떤 감정적인 것들을 원하십니까? 예배는 감정적인 만족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은혜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감정적인 만족, 눈물 흘리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콘서트장에 가서도 똑같은 것들을 우리는 느낍니다. 은혜는 바로 지정의가 같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은혜 받았다고 느꼈는데, 삶의 변화가 없다면 여러분들은 좋은 콘서트를 보신 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마음속에 거리끼지만 그것이 자꾸 생각나서 내 삶을 고치는 것은 은혜 받은 것입니다. 의지로 결단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치는 돌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여러분 중의 어떤 분은 그것이 부담스럽고 거북하고 그럴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내 마음에 거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기쁨이 넘친다라고 이야기해도 거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예수를 받아들이길 근본적으로 싫어하는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고침을 받아야 할 존재이고, 하나님은 나를 고치시길 원하시고,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하지 말라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고 있습니다. 7절에 우상 숭배하지 말라, 8절에 음행하지 말자, 9절에 시험하지 말자, 10절에 원망하지 말라 13절에 조심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놔두지 않으십니다. 경고하십니다. 그런데도 안 고치면 여러분의 인생은 파멸되고 사단의 노예가 될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출애굽을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넘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뜻합니다. 12절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일부 교인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것들을 체험하고 예수를 알았다고 해서 이제 모든 것이 다 되었다고, 결코 자신들은 넘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넘어진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 자신이 넘어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을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3절에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당한 것이 없고,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고 피할길을 내신다고 하면서 너희가 죄악에 빠지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험은 죄악에 빠져드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당하였을 때 하나님이 감당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낼꺼야라고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이 문맥은 우상 숭배에 빠져드는 것과 관련되어 나온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악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은 모든 조건을 만드셨는데, 너무 자신을 쉽게 내어 줘서 죄악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상숭배, 시험, 음행, 원망 모두 자신을 쉽게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내어 주는 것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나오는 시험, 음행, 원망 모두 우상숭배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를 시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보다 자기가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험문제를 내 주며 테스트 합니다. 그런데, 학생이 선생님에게 시험문제를 내고 뭘 아는지 테스트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사단은 본성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하셨습니다. 원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러해야 한다고 자기가 생각해서 이런 식으로 안되면 원망합니다. 즉,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원망이 없습니다. 누가 우리 인생의 주인 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민수기는 출애굽해서 멸망당하는 출애굽 1세대의 실패 가운데 2 세대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멸망당한 큰 이유는 바로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 우상숭배는 원망에서 기인한 것이 큰 우상 숭배의 요소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면 쉬운 길로 바로 직행하게 하셔야지, 왜 돌아가게 하시는거야? 왜 맛있는 음식도 안 먹이고 메추라기와 만나만 주시는 거야라고 사람들은 원망합니다. 원망이 싹트다보니, 자기 자신을 위에 놓고 하나님을 밑에 놓으며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즉,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생각은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보다 위에 놓고 자기 자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음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수기 25:1절에 음행은 바로 우상 숭배와 연결된 음행이었습니다. 음행과 우상 숭배는 그 성격이 대단히 비슷합니다.

 음행은 내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적인 관계에서는 서로의 부끄러운 부분까지 드러내고 적극적인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상대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 내 몸을 어떻게 다루든지 나는 맡기겠다라는 항복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책임감 없는 상대에게 그냥 내 몸을 맡기게 될 때는 그로 인한 부작용이 우리 안에 넘치고 깨어지는 것들이 큽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 음행을 피하라라고 말하면서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한다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안으로 상대의 영향력을 다 받아 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는 어떻습니까? 영적인 옷을 벗고 다른 신에게 자신의 영을 내어 맡기는 것이고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음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영의 영향력이 그대로 자신에게 들어오도록 자신을 내어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영적인 옷 영적 갑옷을 벗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음행을 통해 내어 줘서는 안 되고, 영을 우상숭배를 통해 다른 영에게 내어 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3:12-14절에 보면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영에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거나, 다른 영의 노예가 되지 말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봐 조심하고, 넘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넘어질 정도의 유혹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죄에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선 줄로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나도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평생 겸손하게 하나님 제 삶을 인도해 주시고 고쳐 주시고 제가 영적인 눈이 열려서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것을 고치겠습니다 이렇게 사십시오.

또는, 나의 삶이 항상 이렇지 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시고, 하나님이 내가 나의 마음을 영적인 사막 가운데 두는 걸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또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의지를 드려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여러분 그냥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가는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충고가 부담스러우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길 원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충고도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의 문제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원망하지 말고 인정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시는 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뜻대로 하나님을 조정하며 그대로 안되면 원망했던 분 계시다면 하나님께 회개하시고 다시는 원망하거나 시험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시고 그렇게 사십시오. 원망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들을 파괴하는 사단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본질을 파악하시고 적극적으로 대처합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Posted by HolyNFire sunki 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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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0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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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잘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찰;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 NIV 성경 번역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라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그것이 다 유익하지 않다, 그것에 지배를 받아서는 안된다라는 바울의 논리가 맞서고 있습니다.
생각해 볼 점)
어떤 것이 우리에게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유익하지 못하게 하거나, 그것의 지배를 받는 것들은 없는지?
아주 작은 것에서 부터 시작하면, 가령, 드라마를 열심히 본다. 뭐 이런 것이 그닥 나쁘지는 않지만 너무 많이 보면 유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될 수도 있겠죠. 운동도 마찬가지겠구요. 운동 중독에 걸린 사람도 보았습니다. ^^;;;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중략)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 이것도 12절과 같은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라는 단순화된 논리, 몸의 한 부분이 기능적으로만 존재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몸도 또한 성적으로 자유롭게 관계를 가져도 되는 것으로 그것이 몸의 존재이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몸은 음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를 위하여 있고, 주도 몸을 위하여 계신다라는 논리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14. 하나님이 주를 살리신 것처럼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 이 부분은 몸의 중요성을 언급하기 위해, 몸이라는 것은 단순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도 몸의 부활이 같이 이루어졌듯이, 우리도 부활의 상태에서 몸을 입게 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생각해 볼 점)
우리의 몸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요? (14절부터 20절 사이에)
1. 부활에 참여한다.
2. 성령의 전이다.
3.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4. 값으로 사신 것이다.
5.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몸에 대한 관념과 많이 틀리지요.
창조시에도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아주 정성들여 만드셨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성육신 하셨지요. 몸은 하나님의 성령을 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육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영적인 부분들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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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4:6

2008.04.03 23:48
블로그를 어떤 식으로 계속 운영할까 생각중인데 앞으로 이 글과 같은 것을 자주 올려보려고 합니다.
청년부 설교에서 고린도전서를 계속 하고 있는데, 묵상하며 공부하며 유익이 많이 있습니다. 그 과정 가운데 얻게 되는 것들을 계속 적어보려고 합니다. ^^;;;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6
I have applied all this to Apollos and myself for your benefit, brothers and sisters,
a so that you may learn through us the meaning of the saying, “Nothing beyond what is written,” so that none of you will be puffed up in favor of one against another. 7 For who sees anything different in you?b What do you have that you did not receive? And if you received it, why do you boast as if it were not a gift?
a Gk brothers
b Or Who makes you different from another?
The Holy Bible :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1996, c1989 . Thomas Nelson: Nashville

4:6, 7
The Greek term translated learn is related to the word translated disciple in Matt. 28:19. It implies the use of a skill and not just knowledge. The Corinthians knew about humility, so Paul called on them to become humble. Greeks considered humility to be a fault, a characteristic of slaves. To the Christian, however, it exemplifies the attitude of Christ (Phil. 2:5–8). in us: Paul presented himself and Apollos as models to follow (v. 16; 11:1). what is written: This word is often used to introduce a quotation of the OT (Rom. 14:11). Paul was exhorting the Corinthians not to go beyond the teachings of Scripture. Then they would avoid the pride and divisions that were fracturing their church. A true minister of God’s Word will use Scripture to unify and strengthen the church. Only those who want to exalt themselves will misuse Scripture and thus weaken and divide the church.
Radmacher, E. D., Allen, R. B., & House, H. W. 1999. Nelson's new illustrated Bible commentary . T. Nelson Publishers: Nashville

6Ταυ̂τα δέ, ἀδελφοί, μετεσχημάτισα εἰς ἐμαυτὸν καὶ Ἀπολλω̂ν διʼ ὑμα̂ς, ἵνα ἐν ἡμι̂ν μάθητε τὸ μὴ ὑπὲρ ἃ γέγραπται, ἵνα μὴ εἱ̂ς ὑπὲρ του̂ ἑνὸς φυσιου̂σθε κατὰ του̂ ἑτέρου. 7τίς γάρ σε διακρίνει; τί δὲ ἔχεις ὃ οὐκ ἔλαβες; εἰ δὲ καὶ ἔλαβες, τί καυχα̂σαι ὡς μὴ λαβών;
Black, M., Martini, C. M., Metzger, B. M., & Wikgren, A. 1997, c1982. The Greek New Testament (electronic ed. of the 3rd ed. (Corrected)) . United Bible Societies: Federal Republic of Germany


이 구절에서 참고할 BRI
: Greeks considered humility to be a fault, a characteristic of slaves

주목할 점들:

1) 본을 보였으니 - 그리스도인들은 본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도 그냥 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을 직접 보이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메세지를 전할 때 삶과 메세지가 일치하지 않는 메세지는 공허하여 허공을 치는 꽹과리와 같은 것이며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2) 너희를 위하여 - 사역자들은 항상 자신의 행동이나 말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력을 생각해야 한다.
3) 기록한 말씀 밖으로 - This word is often used to introduce a quotation of the OT 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 전체를 가르키는 표현일 수도 있고, 바울이 누누히 성도들에게 편지로 쓴 글들을 가르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인데 문맥상은 특히, 사람을 따르거나 당을 지어 서로를 비난하며 스스로를 우쭐하게 생각하는 모습등을 일컫는 면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4) 배우다. - disciple을 의미한다. humility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고린도 사회에서 노예가 2/3를 차지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고, 배운다는 것이 고린도 사회 시민들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갔을지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배우려고 하는가?
5) What is written에 대해서 유진 피터슨의 MSG 성경은 God's point of view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유진 피터슨의 성경 원어를 현대어로 옮긴 번역은 경탄을 자아냅니다. 저도 열공하여서, 원어로 귀납적 성경 공부를 해 보고 싶은 것이 소원입니다. ^^;;;

신학적 접근들:
1. 기록한 말씀에 대한 표현을 어떤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기록한 말씀 - 밖으로 표현된 말씀, 인간들을 위한 삶의 기준들, 성육화된 말씀, 성경 전체적으로 보면 기록된 말씀들이 말 그대로 기록되었다는 것 보다는 우리의 마음 속에 내면화되고 새겨지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기 위해선 글자 그대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글자가 선포되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져서 행동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2. 신앙은 항상 공동체성 가운데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3. 훈련의 중요성 : 왜 훈련이 중요한가에 대한 개념 정립 없이는 사람들에게 성경적 원리, 지침들을 설명하는 데 동기부여가 되기 힘들다. 따라서 가르치는 자들은 훈련의 중요성에 대해 나름대로의 개념과 가치관 정립이 중요하다.
4. 교만에 대한 성경적 의미?

* 이 본문에 대해서 별다른 본문 비평 장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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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납적 성경 연구에서 맛볼 수 잇는 기쁨 중의 하나는 어떤 본문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어떻게 전에는 이것을 보지 못했을까 궁금해할 정도로 명백하게 본문의 의미가 드러난다. 검토해 보고 또 검토해 보지만 틀림없다. 그러다가 이렇게 생각한다. "가만, 그럴 리가 없어.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는걸. 잠시 결정을 보류해야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 갑자기 다른 누군가도 동일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글로서 나와 있다. 혼자만의 해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후 이 놀라운 발견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아니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발견하도록 인도하기 시작한다.


나는 고린도전서 14:34-40에 대해 위와 같은 경험을 했다. 지금과 같은 해석은 본문을 읽고 또 읽는 중 얻게 된 것이다. 특별한 방법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지 본문 자체가 말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 전서 전체에서 반복해서 하고 있는 일, 즉 어떤 주장을 인용하고(대개는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견해) 그에 대해 반박한 후 잘못을 바로잡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4:33-40도 그와 같은 부분이 아닐까?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견해는 34-35에 인용된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이라"


바울이 이에 대해 반박하는 것은 36절에 나오며, 40절까지 전체가 반박하는 부분일 수도 있다.


"What! (무엇이라고? RSV)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 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이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그럴 듯 하게 만들기 위해 "모든 교회에서 함과 같이", 또는 "율법에 이른 것 같이"와 같은 거창한 수식어를 사용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주장에 충격을 받고 그의 분노를 표출한다. "무엇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이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What!(무엇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라고? 뭐라고?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라고?" 바울은 그들이 [허황되게 권위를 인용하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윌터 카이저(Walter Kaiser)는 Toward an Exegetical Theology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경우들은 저자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인용 부분은 앞뒤 맥락과 강한 대조를 보인다.

(2) 저자는 독자들이 그 문제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음을 시사한다.

(3) 저자가 다른 곳에서 말한 것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주장이 나와 있다.

따 라서 바울이 "모든 것이 가하다."라고 말할 때(6:12, 10:23) 그는 고린도 사람들의 태도를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즉시 "그러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고린도 사람들의 견해에 대한 반박으로 바울은 "그러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 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다."고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고린도전서 14:34-35도 랍비들이 만든 규율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분명 구약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다. 구약의 어디에서도,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 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교회는 여자를 가르치고 여자들은 배우라고 명령하고 있다.(딤전 2:11)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더 나아가 여자들도 교회에서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기도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가르쳤다.(고전 11:4-5, 딤전 2:8-9). 14:34-45에서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금하는 랍비들의 규율을 인용한 후 바로 뒤에 이어지는 14:36에서 바울이 이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뭐라고?"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유일한 자들[이 대명사 헬라어 모누스는 남성형이다. 여성형 대명사는 모나스]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고린도 전서 14:34-35가 랍비들의 율법을 인용하고 있다는 주장에 완전하게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고린도전서에서 인용-반박의 형식이 사용되고 있는 다른 예들을 볼 때, 그 주장이 최소한 근거를 가진 주장이란 점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하리라 믿는다. 1)


1) Walter C. Kaiser Jr., Toward an Exegetical Theology, Baker Book House c.1981, p.76, 77 p. 119 참조


바 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약간은 비꼬는 듯한 어조를 사용하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부분과 유사하다. 로마서 3:3은 누군가의 잘못된 견해, 또는 누군가가 제기한 반론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그럴 수 없느니라"(KJV에서는 "God forbid!" 하나님 맙소사)라고 그가 받은 충격을 표현하고 있다. 로마서 3:5,6,7에서도 동일한 형식이 사용된다. 2)


2)f로마서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구절들 - 3:4,6,31, 6:2,15, 7:7,13, 9:14, 11:1,11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태도에 충격을 받고 이를 교정하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 고전 1:12-14,  6:1-2,  6:8-9,  6:15-17,  6:18-20,  9:5-8,  10:2-22,  11:21-22,  14:33-38


반복되는 패턴은 1)고린도 사람들의 잘못이 있는 그대로 진술된다. 2) 바울은 "What!(무엇이라고?)"라는 말로 충격을 표현한다. 3)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대 부분 성경 번역에서는 헬라어 에타를 "무엇이라고?"라고 번역하지 않고 "또는"으로 번역한다. 이것은 고린도 전서 전체에서 사용되는 바울의 스타일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번역이다. RSV 성경에서는 14:34-35를 What!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한다.


고린도전서 11:17-22에서도 14장과 동일한 형식이 사용된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애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7-20절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21절에서는 고린도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사실 그대로 진술된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바울이 받은 충격은 22절에 잘 나타나 있다. "[What! 뭐라고?]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바울은 "What"이라는 감탄사로 그의 충격을 표시한 후 연속되는 수사법적 질문들로서 고린도 교회의 행태를 반박한다. 수사법적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오해와 잘못된 주장을 다룰 때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문체이다.


고린도전서 14:34-40 에서도 이와 동일한 충격과 꾸짖음의 분위기를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이 꾸짖고 있는 것은 여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금하는 사람들(아마도 남자들?)이다.

바 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35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11절에서 그것을 허용한 것이다. 어쩌면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거짓 예언을 통해 나왔을 것이고 37-40절은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일 수 있다. 잘못된 행동에 대한 바울의 해결책은 방언을 금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는 여자들의 발언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해답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나를 혼란케 했던 구절들에 대해 갑작스럽게 얻은 놀라운 깨달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보았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성경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3)


3) 이 주제에 관한 유용한 참고 자료로는 Donald M. and Robbie B. Joy, Lovers Whatever Happened to Eden? Word Books, c. 1987. p.10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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