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전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말씀인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한국에서는 메세지에 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메세지들이 많습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메세지를 강력하게 전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는 생각보다 쉬운 사회는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나아졌다고 해서 그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개념은 상대적이니까요. 돈이 많아도, 어느 정도 살기 좋아졌다하더라도 그걸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살다보니, 그리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보니 여러 모로 역효과들이 나타납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메세지를 정말 여러 곳에서 듣습니다.
 교회에서만 듣는 것도 아니고,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매스컴을 통해서도 가정에서도 온통 무엇을 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많이 듣습니다.
 이 메세지의 스트레스는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유달리 다른 나라로 머리를 식히러 가는 사람들이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떠나고 싶은 마음, 사진기를 달랑 하나 메고 여행 가고 싶은 마음, 이 마음들이 우리에겐 많은 것 같습니다.

 소망의 말씀!

 이것은 평생 붙들어야 할 문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혹은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과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삶에 지치고 절망하고,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고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삶에 영원한 위로와 소망이 된다는 메세지는 다시금 사람으로 하여금 힘을 갖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또다시 일방적인 must의 메세지를 날릴 경우는 그 압박감이 상당합니다.
 설교는 성육신해야 한다고 아랫글에서 적었듯이, 우리는 한국 땅에 사는 사람으로 이 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믿음의 말씀, 소망의 말씀, 사랑의 말씀을 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어떤 집회든, 어떤 예배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촉촉한 단비가 내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소망을 품고 이 땅 가운데 다시금 용기를 내어 살며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 가운데 사는 메세지를 말입니다.
 사람을 품지 않고서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 사랑의 마음을 담지 않은 메세지는 죽은 메세지와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의 요새 기도제목 중 하나입니다.
저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갖게 되고 웃음 지을 수 있게 되길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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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다보니 말씀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 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를 더욱더 깊이 생각하자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삶 가운데, 모든 순간 마다 예수를 떠올리고 그 분을 묵상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설교 가운데 현실과 분리된 예화를 만들어내지 않고 현실에 뿌리박은 예화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더욱더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영향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더욱더 깊이 생각하자! 항상 기억하는 문구입니다. 물론, 이 문구는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오늘은 말씀의 성육신에 대해서 말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이 땅 가운데 사셨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한 가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실제로 사시면서 직접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함께 하시면서 가르치셨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세지가 강력했던 하나의 이유는 사람들을 잘 아시고 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떻게 해야 그들의 삶을 얽매고 있던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 있을지를 다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사람들과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메세지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메세지가 어떻게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메세지가 되겠습니까?

예로, 신학생들에게나 가능한 신학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성육신이니, 칭의니, 성화니 이야기해도 그것은 뜬 구름 잡기나 다름없습니다.

 어떤 분의 메세지는 참 깊이가 있지만, 청중들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관념적인 수준에만 머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의 메세지는 너무 쉬운 수준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떤 회중들에 대해서는 그 메세지가 들려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회중들의 수준에 맞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전하는 사람이 회중들의 수준으로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많은 겸손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쉬운 메세지로 바꾸면 마치 자기 자신이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생각보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또한 너무 생각이 많아도 좋은 메세지를 전할 수 없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한번에 변화를 주려는 생각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메세지가 산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가지 메세지를 전하더라도 회중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전달하는 메세지는 근본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성육신하여 주의 뜻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육신의 원리는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적용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 비밀이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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