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 즉, 아브라함, 다윗 등과 같은 사람의 삶이 핵심이 아닌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고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창조에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멸시하고 잊어버리고 자기 스스로의 세상을 만드려고 하나님의사랑을 끊임없이 거절하는 과정 중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잘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이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여기에 인간이 무슨 자기의 의나 자랑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 즉, 기쁜 소식은 아무런 자격이 없고 아무런 대가 없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성경을 읽게 되며 무슨 적용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적인 사랑,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임을 알게 된다음 삶이 하나님에 의해 다루어지길 원하는 사람은
은혜의 복음을 알기 때문에 그에 따라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맡겨 우리 안에 하나님이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길을 찾기 때문에 그것이 짐이 되지 아니하고 자유롭고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 하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 부담이 되시고 어려움이 느껴지시고, 자유가 없다면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기에 삶을 제자의 삶으로 놓는 것에 대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성경의 메세지에 대해 삶의 적용점만을 찾는다면 큰 오해를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체험하면서 나오는 자발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주는 삶의 변화인 것입니다.
자발적인 반응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름아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삶을 다루어 가시도록 내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복음을 체험한 사람은
성령께서 자신의 삶을 다루도록 내어 드리며 그 삶의 변화 아래 자연스럽게 삶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계속 그런 논리를 펼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어찌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에 빠져들고 거짓 메세지에 넘어가느냐?
복음을 체험한 사람은 이럴 수는 없다.
이런 이유는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는 것입니다.

이런 큰 맥락에서 바울 서신을 보아야지
윤리적 적용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면
바울 서신이 윤리적 적용을 말한 근본적 원인,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는 것이 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이고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내 힘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길을 따르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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