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다른 제자들과 가룟 유다는 별반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고 부르신 제자도 있었고 나를 따르라 하신 제자도 있었고, 신기한 일을 보여주시면서 초청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영적인 원리가 있었을 수는 있지만, 제자들의 삶을 보면 육적인 데 초점을 맞춘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기적을 바라고, 먹을 것을 채워주고, 정치적으로 무언가 되어 보려는 욕심들이 전반적으로 지배했음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과의 차이점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에게 꾸짖기 보다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면서 점점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끄시려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계속 육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삶이 중요한 것이야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계속 그 점을 지적하시면서 도전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육적인 욕구에만 자신의 목적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가룟유다라 볼 수 있습니다.

 

회개는 메타노이아로 방향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켜 옳은 방향으로 행동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메타멜로마이, 그냥 단순히 내적인 뉘우침만 합니다. 그리고 행동을 돌이키며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한 사람하고 이런이야기를 했습니다.

난 적어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어도 예수님의 용서를 구했다면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점에서 가룟 유다나 우리나 별반 다름이 없다. 가룟 유다가 죽기전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생각해 보았다면, 오히려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의미를 기억하지 못했다.

 

죄에 대해서 지적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기억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육적인 것만 추구하다가는 가룟 유다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출발은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같았지만, 나중은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보여주시고 그 죄를 정결케 하셔서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적해 주시는 것에 대해 우리의 영과 육이 성령의 충만함에 사로잡히도록 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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