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너무 어려움이 많고 혼돈스럽다 보니 미혹의 영도 그만큼 역사하는 힘이 큰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럴 때일수록 분별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제대로 인도함을 받는지 알수 있을까요? 이것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사람인지를 아는 기준으로도 중요하고 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으로 제대로 인도받고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기준은 요일 3:10절에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리라.

요한일서의 배경속에는 오늘날과 같은 온갖 사상들이 난무하고 미혹케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는 같은 상황들이 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요한 사도는 분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구별하는 기준은.
1.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
2.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그 안에 부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를 행하려고 하고, 형제를 사랑하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과정 속에서 이것을 바로 분별의 기준으로 삼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세상을 향한 사랑이 안 느껴지고 정죄하는 마음이 많이 들 때는 제대로 인도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많이 들고, 거룩함과 정직함에 대한 하나님의 성품들이 제 안에 그 음성과 더불어 같이 나타날 때는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취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미혹케 되는 일들이 종종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너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있느냐? 거룩함과 정결함이 있느냐?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에 대한 기준을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성품에 타당해야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을 향해 보이는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아멘.

어느 집회 때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어떤 지체가 방언을 받았음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비단 저만 그런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분도, 사역을 인도하셨던 분도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받던 이 지체가 입을 꾹 다물고 어떤 기도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믿음의 행위를 보이는 것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 보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행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주에 휴가라서 모 교회에 수요 예배에 참석했었는데 거기서 목사님이 드신 예화입니다.
지리산에 어느 사역하시는 분이 있는데, 여러 곳에 성도들의 집이 흩어져 있고 심방을 가려면 개울도 건너야 하고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내일 심방을 가기로 결정했는데 그 집에 가려면 개울도 건너야 하고 비가 많이 와서 날씨가 좋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심방 전날에 비가 많이 왔습니다. 이 분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내일 심방 가길 원합니다. 하나님 날씨가 좋을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밖에 나가 보니 먹구름이 끼었답니다. 비가 올 것 같아서 집에 가서 우산을 챙겨가려고 아내에게 우산 달라고 했답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고 믿음으로 선포했는데, 다음날 우산을 들고 나오는 일이 과연 믿음으로 기도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낳게 합니다.

하나님 음성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해 볼 때, 처음에는 그런 것이 나의 생각이 아닐까라는데 집중하느라 시도도 못해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으니 나는 믿음의 행위를 보일 것이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말씀하십시요.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성경과 하나님의 성품과 타당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바로 실천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놀랍지만 일상적인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전도단에서 훈련을 받으면 묵상 강의 때 장미꽃을 나눠 줍니다. 장미꽃을 보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보는 시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당혹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장미꽃을 통해 말씀하셔야 할 이유가 있는가? 왜 이런 걸 사용하지? 이상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그 살아계시는 증거가 온 천지 만물을 통해 선포가 되고 있는데, 장미꽃을 통해 말씀하지 못하실 이유가 뭐가 있는가? (롬 1:20)
난 장미꽃을 보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그냥 생각해 볼 것이고 들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적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을 것이다. 라고 믿음의 행위를 보이는 사람에게 영적인 눈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십시요. 소경을 고칠 때도 진흙 덩어리를 눈에 붙이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믿음의 행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소경은 실로암 연못까지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여리고성 무너질 때도 돌라고 하였습니다. 성 주위를 믿음을 가지고 돌았을 때 성이 무너졌습니다.
사도행전 3장은 구걸하는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고치는데, 7절에보면 그를 오른손으로 잡아 일으켰다라고 되어있고 그 순간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걷지 못하는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대신 믿음을 보이면서 잡아 일으킵니다. (지붕 뚫고 아픈 친구를 내려보낸 친구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의 모습이지요.)

믿음은 믿음의 행위를 수반할 것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믿음의 행위를 보일 때 비로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인내함으로 신뢰함으로 믿음의 길을 달려가십시요.

축복합니다.
 행실(또는 행위)를 강조하지 않는 사람 쳐 놓고 제대로 된 복음주의자는 없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니 행실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복음이 행실까지도 변화시키며 완전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행위를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성령의 인도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라가는데, 성령께서는 행위를 바꾸시길 원합니다. 어두움의 영에 사로잡혀서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하고 사망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에서부터 변화시켜, 빛의 자녀같이 그 품위를 갖추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행위에서도 많은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행위에서 좋은 모습이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에 인도하심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자신의 행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빛의 자녀같이 나타나느냐 행위에 있어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느냐를 보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지를 분명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행위에 대해서 절대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들이 주장하기는 하지만, 저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행위가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아래 내버려 두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위 또는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길 원하십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사람들의 행실로 말미암음입니다. 사랑이 많다던가 가난한 사람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가진다던가, 낮아짐과 섬김, 정직함, 진실됨 이런 모습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선포되고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사역자들도 행실을 강조하지 않는 사역자는 제대로 된 사역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행실이 바르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사역 가운데 많은 책망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한 행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으므로 빛의 자녀같이 행실에 있어서도 깨끗하고 정결함을 가지길 원함을 많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바꾸게 되는 것의 근본적인 작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행위를 이렇게 바꾸면 하나님이 복 주시겠지 이런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성령께서 직접 책망을 하시고 권면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아래 우리 자신을 맡겨 그분의 계획하심 가운데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맞는 사람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행위를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행위를 바꾸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우리의 행위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행위를 뜯어 고칩니다. 메세지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신데, 성령에 의해 우리 행위 뿐만 아니라 마음의 모든 숨은 죄악과 잘못된 생각까지도 다 끌어내어 불 가운데 태워 버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 고치려 했고 그것은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위선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마음의 생각까지도 뜯어 고치시고 마음의 진실함에서 행위의 진실함으로 연결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오히려 바리새인들보다 행위에 있어서 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온전히 들어가서 역사하는 사람은 행위가 이전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작은 거짓에도 마음이 아파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주변의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3-9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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