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19-20
옳게 사는 문제에서 너희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MSG)

보통 예수 믿으면 행실은 아무렇게나 해도 하나님이 괜찮다 하시겠지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행위는 어떠했습니까? 겉으로만 행위를 옳게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까지도 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잘못된 점 하나 하나까지도 주님은 거룩하고 정결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사소한 잘못까지도 겉으로는 아니지만 속으로 미워하거나 음란하거나 그런 것까지도 죄로 지적하시며 성결한 삶을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작은 거짓말이라도 그것 때문에 통곡하기까지 지적하시고 회개케 하십니다.

제가 ywam에 있던 시절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주 작은 잘못을 한 것 까지도 눈물 흘리면서 회개한 것들을 보았습니다.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과 비판적인 것까지도 하나님의 지적하심 아래 참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작은 거짓에도 민감하여 참회하고 통회하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말하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겠습니까?
오늘날 왜 그리스도를 전할 때 능력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거짓의 아비들이 증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짓에 사로 잡힌 모습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 말이 어찌 신뢰가 가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행동인 사회적인 윤리의 기준에 못미친다면 이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높은 잣대를 하나님은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회를 선도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거룩하고 정결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윤리의 잣대로도 훨씬 못 미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만 주님은 맞다라고 말씀하십니다.

5장 21절부터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이 있지만 누구든지 마음속으로 화만 내도 살인을 범한거라고 예수님은 더 높은 기준을 보여 주십니다. 이후로도 사람들에 대한 원한의 마음까지도 지적하시고, 겉으로 간음보다 속으로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까지도 영혼을 잃게 되는 문제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죄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과연 구별되고 거룩한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그 정도까지 관여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착각하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령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릴 때, 그분이 우리 삶에 대해 개입하시고 우리의 부정한 모습들을 정결한 모습으로 바꿉니다. 어떻게 보면 괴로울 것 같지만, 참된 자유와 기쁨이 있고 거룩함 가운데 느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겉의 행동은 물론이고 속사람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덮힌 주님의 영광이 가득한 거룩한 신부가 되길 원하십니다.
1. 회개가 상실된 구원의 복음은 제대로 된 구원의 복음이 아닌 것이다. 자기가 철저하게 죄인임을 인식한 후에 구원의 복된 소식이 들릴 때 비로서 우리의 영혼은 기뻐 뛰게 되며 마른뼈와 같이 죽어 있던 영혼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얻는 회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많은 경우에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착각할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는 매 주일 교회에만 참석해 종교적인 의식만 반복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평생을 살 가능성이 많다.
 난 적어도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모른다면 구원받았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구원못받았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기가 구원을 받았는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진실되게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구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한다. 난 최소한 그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안다고 말한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성경적인 것은 구원을 받았는지 우리가 모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사람들은 자기가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찌된 일인지 자기가 구원받았는지도 모르고, 성령이 자기 안에 계시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른 현상이 아니라 책망을 들어야 할 현상인 것이다. 틀린 것을 맞는 것처럼 진리인 것처럼 믿고 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진리를 붙들고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해서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 착각하고 있는 것을 진리로 믿고 살아서는 안된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다.

마태복음  3:2절에 너희 삶을 고쳐라. 하나님 나라가 여기있다
라고 세례 요한은 말하고 있다. 삶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3장 11-12절에 보면 
 내가 이 강에서 세례를 주는 것은 ,너희의 옛 삶을 바꾸어 천국의 삶을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너희 안에 천국의 삶을, 너희 안에 불을, 너희 안에 성령을 발화시켜, 너희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그분께 비하면 나는 잔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은 집을 깨끗이 하실 것이다. 너희 삶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참된 것은 모두 하나님 앞 제자리에 두시고, 거짓된 것은 모두 끄집어 내어 쓰레기와 함께 태워 버리실 것이다.

2. 오늘날의 설교자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만 늘어놓아서는 안된다. 거짓된 복음을 선포해서는 안된다. 삶을 막 살아도 괜찮다. 예수만 있으면 된다. 이것만큼 거짓 복음이 어디있는가?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영혼들에게 심령을 찔러 쪼갬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죄라고, 그것이 잘못된 삶이라고 그것을 놔두었다간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안에 소망이 없음을 절망만이 가득함을 깨닫고 심령의 애통함을 가지고 눈물 흘리는 영혼들에게 예수가 소망이라고 선포할 때 성령께서 그 삶 가운데 역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역사하여 그 안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천국의 삶을, 우리 안에 성령을 발화시켜 우리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신다. 삶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거짓된 것은 모두 끄집어 내어 쓰레기와 함께 태워 버리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 성령으로부터 온 거룩함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죄악은 그것의 모양이라도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둔하고, 삶에 있어서 행위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그분이 완전히 바꾸어 놓고 거짓된 것은 태워 버리겠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우리 삶 가운데 변화가 없을 수 있다라고 말하거나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변화가 없을수도 있지라고 믿어버린다. 도대체 주님의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
 
3. 회개하라. 내가 생각해서 그냥 이런 것을 회개해야 겠다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될 수 없다. 성령의 찔러 쪼개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영혼의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는 설교자로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검이 우리 가운데 다가올 때 우리의 죄를 보게 했을 때 영혼의 통곡이 나오는 회개가 된다. 그냥 설교자가 아닌 것이다. 세례 요한처럼 또 많은 성경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처럼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설교자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를 구하고 인도하심을 받는 설교자가 필요한 것이다. 또는 우리가 주님 앞에 정직하게 반응했을 때 마음으로 반응할 때 우리의 영이 열릴 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진다. 가식적인 회개 거짓된 회개 이런 것이 회개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회개라는 쇼를 하는 것이다. 그냥 억지로 눈물을 짜면 된다는 식의 회개, 이것만 보이면 하나님이 용납해 주시겠지라고 말하니 변화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그것이 너무 마음에 찔리고 부담이 되어서 그 행동에서 즉각적으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지도자들이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즉각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고치기 보다는 또 진창 속의 수렁에 빠져든다. 그것은 회개 한 것이 아니라, 회개라는 쇼를 보여 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본 많은 교인들은 가짜 회개가 회개인것처럼 생각하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가짜 신앙이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다른 사람들을 죄 속에 몰아 넣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잘못된 신앙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고 그들 또한 그것이 진짜 신앙인것처럼 믿다가 같이 멸망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불이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삶을 태우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리고 영혼의 회개 통곡의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고, 나는 죽고 주님이 사시며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5. 제발 회개하자. 그리고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자. 아멘.
마태복음 1:18-19
예수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렇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사이였다.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령으로 된 일이었으나 요셉은 그 사실을 몰랐다.) 요셉은 마음이 상했지만 점잖은 사람인지라, 마리아에게 욕이 되지 않게 조용히 문제를 매듭지을 참이었다. (MSG)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이해함이 없다. 왜냐하면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의 테두리의 한계속으로 몰아 넣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임신했다. 성령으로 임신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테두리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계시를 받은 사람들로부터 예언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빛이 임하지 않으시니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계시를 깨달을 수도 없고,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서도 이해함이 없는 것이다.

 니고데모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깨닫지 못했다. 오늘날의 많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나 학자들도 성령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 요셉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며, 니고데모와 같이 당대 최고의 학자들도 역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없으면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긴 하지만 전혀 이해함이 없는 것이다.

 요셉은 정혼한 여자가 임신한 것을 보고 아마 자기 인식의 테두리 한계속에서 마리아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이라는 사람은 그래도 성품이 온유한 탓인지 자기 머리로 생각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다. 바리새인들 같았으면 아마 마리아를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자기의 머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며 그것은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돌로 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차라리, 요셉처럼 자신의 생각에 의하면 그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지라도 조용히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하는 태도가 좋지 않을까.

 성령의 역사는 이해되지 않으면 비판을 먼저 하는 자세가 용납되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기도하면서 그것이 진짜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며 분별을 구하는 것이 정상이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돌로 치고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기다렸던 것이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를 마음에 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들의 세력이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에 대해서 말하며 기도했던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선포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냥 그것을 비판하고 정죄했을때 과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책임질 수 있겠는가? 잘못된 것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처리하실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성령에 이끌리어 어떤 메세지를 전했을 때 그것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과제인 것이다.

 신중하게, 그 메세지를 분별하고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아니하며,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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