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다리집 떡볶이 에서 떡볶이와 오징어 튀김을 먹었다.
떡볶이를 평소에 안 좋아하지만, 참 맛있게 하는 집이다.
포장마차에서 시작해서, 건물도 몇 채 주인이 가지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먹었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장모님 덕에 많이 먹었다.

오늘날 이런 종류의 전도 문구를 본 적이 많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방법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
그리고 4 복음서에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 형벌에 대한 내용도 나와 있다.

그래서, 이런 문구가 오늘날에도 효과적이고 그렇게만 전도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들은 왜 오게 되었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시대에는
유대인들도 여러 계층이 있었다.
사두개인(부활을 안 믿는 사람)도 있고, 바리새인, 열심당원 등 여러 계층이 있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많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때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약자가 억압받는 분위기도 많았고, 여러 곳에서 폭동도 일어나던 상황이었다.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현실적인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할이라고 대부분 믿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무엇이 그 사람들을 일깨워주는 문구였을까?
바로 영적인 가치를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진정한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이려는 회개치 않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회개하라에 대한 개념과,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기술했다.

이 상황은 다음 상황을 보면 왜 특수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초대 교회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들을 받고 각종 기적과 능력들을 행하였다.
4복음서 당시의 배경과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이다.
그래서 어떤 계층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영적인 문제와 구별하여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즉, 영적인 것은 가치있고, 현실적인 것은 가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해, 현실 삶이 형편없게 되었다. 성적 범죄, 도덕적 범죄 갖가지 악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히 영적인 것에 대해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지적했고,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야고보서가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서는 예수천당, 불신 지옥 같은 이야기보다는 훨씬 더 도덕적인 삶, 바른 삶에 대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럼,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삶의 목표의 부재, 물질주의적 가치관, 따뜻한 온정의 갈급함 속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전하셨을까?
다시 한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물론, 어떤 특정 계층에게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문구만이 맞는 것처럼, 그런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의 표현인 것처럼 독선적이어서는 안된다.


예전에 길을 가다가 anti-christian의 한 단체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것을 봤다.
그것은 성경에서 어떤 구절들을 떼서 성경은 온갖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것을 조장하고 있다는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실 한 구절만 떼서 보면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바른 해석 방법이 아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면.
내가 하나님은 돈을 받는 걸 좋아하셔라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고 보자.
그럼 그 증거를 찾을려면 하나님이 돈을 내라는 취지의 말씀하신 구절만 찾으면 된다.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정은 성경에 의해 지지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바른 것일까?
절대 바르지 않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구절이 있는데, 다른 구절 들에는 그 이유가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어려운 계층을 돕는 것이 하나의 이유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나의 해석 즉, "하나님은 돈을 받는 걸 좋아하셔"라는 해석이 제대로 된 것인가?
결코 잘 된 해석이 아니다.

그런데 anti-christian 들은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자기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반감에 대해 성경 구절로 증명하는 식의 전단지를 작성해 나눠주고 있었다.
참 어리석은 일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내가 부끄러웠던 것은, 얼마나 이 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영향력을 주지 못했으면 그렇게 오해하고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생겼냐는 것이다.

이런 해석법은 이단들도 같이 사용한다.
이단 교회들의 지도자들도 기존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거기에 부합하는 성경 구절만 취사선택하여 꿰 맞추니 참 그럴 듯 한 주장이 되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속아 넘어간다.

이런 방법을 연역적 성경 해석 방법이라고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신기한 통찰력을 주기도 한다. 번뜻 떠오르는 생각이 성경 전체를 꿰뚫어 보니까 일치하는 경우, 이럴 땐 맞는 해석이 될 수 있지만, 사실 이런 부분은 성령의 충만한 인도를 받기 전에는 참 힘든 부분이다.

그래서, 이런 위험을 줄여주기 위해 귀납적 방법을 많이 쓴다.
성경의 관련된 모든 구절을 찾아 본다음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드물게, 틀린 경우도 가끔 있지만...

요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할 때, 최대한 시간을 두고 성경 전반에 흐르는 맥락을 보면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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