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젼의 사람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이재철 목사님이 하신 설교였었는데, 그분은 아마 이 시대의 가장 훌륭한 목회자중의 한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많은 부분을 공감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설교라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설교가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설교 대상을 생각하기에 한쪽으로 중점이 두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점은 내가 교사였기에 잘 안다.
한 반에도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럴 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 할 때,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그룹은 상대적으로 만족 못하게 가르칠 수 있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교인들의 많은 수가 기본적인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소수의 사람이 뛰어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그들에게 설교를 해야 한다면, 소수의 뛰어난 지식이나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보기엔 너무 쉽고 평이할지라도 난 거기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청중들 대상으로 하여 말하는 사람의 한계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청중의 소수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화자에 대해 저 사람은 뭐 저 정도밖에 설교를 못할까? 왜 그렇게 큰 비젼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할까 편견을 갖기 쉽다.

실제로 목사님들도 이런 종류에 의해 평가 절하되고 그들의 설교가 사람들에 의해 비난되어 지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비난을 하려면, 그 설교가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는지, 그리고 내가 평소에 그 설교자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 설교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비난을 한다면 그건 비난을 위한 비난이며 오히려 죄를 짓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왜 내가 비젼의 사람에 대해 썼냐면,
처음의 그분의 설교를 들을 때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에 대해 약간 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분이 스위스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왜 많은 한국 사람이 스위스 로잔에 있는 YWAM까지 와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왜냐면, 그분의 신념은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 어느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지 구태여 다른 곳에 나가서 배운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에서 하신 말씀이셨다.
그런데, 내 경우에 약간 반감이 든 것은, 한국에서의 현실이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반응하는 삶, 과감히 포기하는 삶에 대해서 가르치지 못했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이나 돈을 들여서 다른 곳에 가서 훈련을 받냐는 것이다.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엄청난 한국 교회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럼 왜 그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을까?

그 동안 우리 교회 중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제시한 사람들이 드물었기 때문이 아닐까 쉽다.

나는 사실 수련회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이 있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련회보다 은혜가 넘치는 삶이다. 수련회 가서는 은혜 충만하면서 돌아온 평상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다면 뭔가 잘못된 경우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에 전혀 하나님에 생각하지 않고, 갈망함도 없던 사람에게는 수련회가 좋은 도화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우지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여 어디를 가서 훈련을 받는 것도 좋은 도화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평소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어디를 가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 알고 평소 삶에 충실하겠지만 말이다.

그럼, 내가 이재철 목사님의 그 부분에 반감을 가진 것은 제대로 된 것일까?
이 설교는 장신대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였다.
아마도 신대원생들에게 현실에 뿌리박힌 하나님과의 날마다의 기름부으심과 교제가 필요해서 특별히 그 취지의 말씀을 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나는 그 목사님께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충분히 성숙하고 본이 되시는 목사님으로 스위스 YWAM 에서 훈련받는 사람들을 평가 절하할 생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른 설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라 생각된다.

귀납적 방법으로 설교를 듣는 사람의 자세, 비단, 성경 해석하는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오해 하지 않고 바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 같다.
(물론, 귀납적 방법이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류를 최소한으로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 사람에게만 한정된 건 아니지만,
내가 상대방을 잘 알면 그 사람과 충분한 교제를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간에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묻어난다.
이런 자세들이 우리 가운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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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부를 가지게 되었다면, 그건 자기 자신을 위해 쓰라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쓰고 흘려보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였다.

사실, 이것이 한국 교회에 무척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혹시 돈을 많이 가지게 된다면, 이 돈은 과연 나를 위해 쓰라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주시는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잘나서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가?
이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런 기회를 주셔서 그런 것이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부라는 것은 흘러서 모든 사람이 부족함이 없도록 사용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많이 가진 자는 나눠 주어서, 사회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계층들(고아, 과부 등)은 부를 나눠 받아서 평균되게 하는 것, 이런 것을 우리 사회에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적 개념과 다르다. 사회주의는 원척적으로 평균적인 부를 추구하지만, 성경적 원리는 가진 것을 자발적으로 나눠주는 원리다.

구약에도 보면, 밭을 소유한 사람이 다 추수하지 말고 일부를 남겨서 가난한 자들이 그것들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원리들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준 율법에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다.

십일조 같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에서 봉사해 소득이 없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든 사람이 십일조를 하도록 권장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부를 더욱더 갖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욕심을 제어하며 한번 자신의 부가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좋은 취지의 제도이다.
물론, 십일조는 정말 성경적으로 쓰여져야 한다. 오늘날 교회들이 교회 건물을 크게 짓는데만 신경쓰고 진정한 성경의 의미의 십일조를 사용하지 못해서, 많은 기독인들이 반감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성경적 부흥은 우선 우리가 가진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왔고, 공동체를 돌보며 서로 돕는 것에서 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한다면 이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단지 그 사람들이 부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교회에서는 가르쳐야 하고, 많은 부를 가지지 못한 사람도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부를 떼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연습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진 것을 서로 나누어 그 나눔의 기쁨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장되는 데 있다.

한 사람이 많이 가진다면 그것은 그 사람만의 기쁨이 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여러 사람과 나눌 때 그 부는 여러 사람의 기쁨이 된다.

천국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이야기 할 때, 외국의 크리스챤들은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장 큰 믿음의 방해 요소로 꼽는다.

따라서 부흥은 가장 큰 문제가 조금씩 고쳐질 때 오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질주의적인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서, 물질을 얻고자 해서 하나님 보다 물질적인 복을 더 간구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물질을 여러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낼 때 부흥은 다시 오게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는 것들이 많이 보인다.
뜨거운 주의 사람들이 이 나라가운데 많아 지고 있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새로운 부흥의 물결이 이 나라가운데 점점 확장되고 있는 것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변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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