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9장 24절에서 27절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KJV, NASB 26절뒤, 27절 앞에 but 이라는 표현으로 잇고 있다.

따라서, 24-26절까지 내용은 한 문맥이며, 27절은 독립된 한 문맥이다.



오늘은 복음에 대한 응답 두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복음을 들은 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 가장 우리의 삶 가운데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을 잊지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그 상황 자체에 신경을 기울이느냐고 정작 중요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을 잘 못할 때가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Face down


오늘은 두 번째로 우리가 복음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Overflow)

고린도 교회 사람들의 문제점은 복음을 들은 후에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오히려 복음이 무엇인지 그것이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더 풍성히 얻는 삶과는 거리가 있던 삶이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이정도 예수를 알았으니 다른 삶은 뭐가 중요하겠어 머물러 있는 삶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 가운데 더 풍성한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인생 흘러가는대로 믿었으면 됐지 뭐가 중요해? 라고 그냥 모든 것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마나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우리에게 주실 그 놀라운 축복과 승리와 기쁨이 있는지를 절대 경험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이 세상을 살다가 의미없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새 유행하는 cm 송이 있습니다. 이거 하다가 안되면 말고 그러다가 라라라라라라라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자칫 그러기가 쉽습니다. 예수 믿으면 되지, 내 삶 가운데 생명력이 없어도 상관없어. 예수 믿으면 그만이지... 뭐 적당히 신앙 생활 하고 안 되면 말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것에 대해서 걱정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복음이 주는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오늘 본문을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어 성경 KJV나 NRSV 버전을 보면 27절이 but으로 시작됩니다.

but 뒤의 것이 가장 중요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but 앞의 것은 but뒤의 내용의 다음번에 올 중요성을 갖습니다.

but 뒤의 내용은 지난주에 이야기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but 앞의 내용은 더 풍성한 삶을 위한 인생의 목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해서 글을 썼습니다. 그것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한국 교회는 목적이 이끄는 40일 등의 세미나를 통해 인생의 목적을 찾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구원 이후 풍성한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 놀라운 은혜, 그 놀라운 삶의 기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풍성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상을 받도록 달음질 하라,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라고 이야기할 때 여기서 상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상을 이야기하면서 천국에서 하나님이 상 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산 것대로 진짜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면류관을 주고, 어떤 사람은 밀짚 모자를 주고 이런 식으로 천국 체험에 대해서 기록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을 볼 때 위험한 것은 무엇이냐면 guessing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냥 상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겠거니라고 유추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앞뒤 문맥을 따라서, 앞 뒤 내용을 따라서 계속 읽으면서 왜 바울이 여기서 갑자기 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이 내용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8절에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 상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위해서 내가 가질 수 있는 물질적인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교사 생활을 했는데, 교사 생활을 하면 별별 일이 다 있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 제가 나중에 선생님 찾아와서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에게 그랬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무슨 물질적인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정말 가르침대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절실히 체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가 값없이 체험했기 때문에 그 기쁨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대가 없이 그냥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이 복음 가운데 서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다른 물질적인 어떤 것보다 기쁨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3절에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자기 이야기를 여기까지 하면서 바로 이어서 너희도 상을 받도록 해라.라고 말하며 25절에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나서 바로 너희라는 표현을 쓰고 우리라는 표현을 이어서 쓰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계속 문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저의 삶을 나누는 것도 이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고 그것을 통해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 안에서 자라가는 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공동체 가운데서도, 조 모임 가운데서도 우리는 나의 삶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파장을 미치며 그리고 나중에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은 바로 바울이 누렸던 그 풍성한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입니다.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승리자의 상급이며 그것 자체가 상인 것입니다.

제자가 잘 된 것을 보며 같이 기쁨을 나누는 것 말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기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하셔서 제가 당신 덕분에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일 겁니다.

그 기쁨을 나누는게 얼마나 크겠습니까?

당신 때문에,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당신 때문에 복음을 알았습니다. 당신 때문에 자유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기쁨을 나누는 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진정한 상의 의미입니다.


바울 서신들을 살펴보시면 바울의 상의 개념이 무엇인지 더 명확해 집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


바울은 면류관이 무엇이냐라고 말하고 바로 너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상태, 미치도록 인정받기 위해 달려가던 자신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자유를 주셨고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지를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의 복음을 전하려고 그토록 애썼습니다. 밤낮으로 자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양육하기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그들의 성장을 보며 기뻐하고 잘못된 것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바울의 개인적인 고백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바울에게 있어서 그 면류관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처럼 사람들이 체험하고 더 풍성히 삶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그 은혜를 체험하여 그 기쁨이 충만한 것이 복음을 들은 자로서 첫 번째 응답이라면 두 번째 응답은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줘서 그 사람이 성장하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Facedown과 overflow의 삶입니다.


예수님도 그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에 승천하시면서 18절부터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께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기쁨되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에서도 우리는 두 번째의 응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한 곳에 모여서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성령이 임하시자 이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새로움이 그들을 덮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쁨이 충만하여져서 2장 45절에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복음에 참여하게 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 구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분의 임재를 구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임하시고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기쁘신 목적을 향해 달려나가도록 그리고 그 기쁨을 같이 나누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기쁜 것입니다. 복음에 참여하는 것은 기쁨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복음의 기쁨이 충만해 지고 더 풍성해지고 확장되는 것을 체험하며 살도록 하나님은 계획하셨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요. 내 삶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워지고 기쁨으로 가득한 것도 얼마나 참 소망이 됩니까?

그런데 더더구나 내가 느낀 이 자유로움과 하나님의 생명력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어서 자유가운데 기쁨 가운데 소망 가운데 자유로와지는 것만큼 또 기쁜 것은 어디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집니다.

소망 없다는 자들이 점점 살 소망을 가지고 자유와 기쁨 가운데 살게 됩니다.

이런 기쁨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주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기쁨이 확장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땅에 대해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땅이었습니다. 그 땅을 하나 하나 정복해 가면서 기뻐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냥 이대로 됐지하고 안주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생명의 충만함이 사라진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렙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호수아 12장에 보면 갈렙의 나이 85세에 이르러 아낙 자손이 사는 그 산지를 아무도 정복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아마 갈렙 정도의 나이였으면 가만히 있어서 누군가가 할 것을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자기가 나서서 그 땅을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준비하고 계셨으니 내가 가서 얻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항상 우리 가운데 땅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 누리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향해 선포하며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예비하신 복음의 그 기쁨들이 온 땅에 가득하도록 우리는 믿음으로 선포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올림픽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극도로 절제하고 열심히 준비합니다.

왜입니까? 올림픽에서 상을 받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클까를 생각하며 꿈에 부풀어 있기 때문에 절제하게 됩니다.

여러분! 올림픽에 참여하는 사람이 스스로 절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기쁨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절제할 수 있지 절제해야 하는 강제 가운데 절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런 논리를 본문 가운데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썩어질 영광을 위해서도 그렇게 절제하고 그것을 바라보며 소망을 갖고 사는데, 하물며 우리가 얻을 상은 영원한 상이다. 다른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그 기쁨만큼 큰 상이 어디있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기쁨으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당장의 즐거움보다 즐거움을 유예하셨습니다.

이 세상 살면서 부끄러운 일도 많았지만 예수님의 그 영광과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그 영원한 사귐을 위해 예수님은 죽기까지 참으셨습니다.

그 기쁨을 얼마나 기대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하는 그 사람들과 누릴 영원한 교제 말입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담임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적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의 즐거움을 누리기 보다는 즐거움을 미래로 연기시켜 놓자. 더 나은 즐거움을 위해 이 시간을 기대함으로 보내자.


청년부 회장인 *** 형제를 보면서 참 제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많이 자라는 것을 보며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 형제와 기도회를 하면서 *** 형제 가운데 좋은 점은 선포하는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렇게 될 것을 바라보면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에 대해 살아있음을 느끼면서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ktf는 쇼를 하라고 하지만

믿음은 쇼가 아닙니다. 선포는 쇼가 아닙니다.

선포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내가 생각하기에 신앙인으로 못나고 부족한 모습이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가꾸며 내 삶 가운데 승리를 주실 것을 꿈꾸며 선포하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직장 가운데 학교 가운데 가정 가운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더라도 하나님 붙들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놀랍게 부어주실 승리의 순간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한 분이 동생 아프다고 기도해달라고 메일을 보냈더니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포를 하셨더라고 너도 선포를 하라고.


제가 그 모습을 보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처럼 가면 됩니다.

이 땅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복음이 심겨졌을 때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되고 생명을 얻게 되고 그 기쁨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 목사님의 메시지가 파워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승리의 경험들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체험한 사람들은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영향력을 확장시키시고 나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실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기에 이기고 또 이깁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더 빼앗기는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승리를 경험한 사람은 점점 영향력이 커집니다.

여러분 그것을 기대하십시오.

주님은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선포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여러분들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땅을 얻도록 놀랍도록 사용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그 승리를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실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할 것을 내가 미리 바라보며 선포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고백하는 기도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 모두 복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그 영원의 기쁨을 같이 나누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생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며 나아갑시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의 삶 가운데 생명을 더욱더 풍성하게 주시고 영원을 향해 사는 그 기쁨을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흘려보내서 우리 모두 기쁨을 나누게 되는 그 것.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응답입니다.


찬양- 보좌로부터 물이 흘러

고전 9장 24절에서 27절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KJV, NASB 26절뒤, 27절 앞에 but 이라는 표현으로 잇고 있다.

따라서, 24-26절까지 내용은 한 문맥이며, 27절은 독립된 한 문맥이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는 것이 인생의 제일 큰 목표였습니다.

왠지 성경만 보면 무언가 기적적인 하나님과의 만남만 보였고, 어느 집회를 통하여 제 삶이 변화되길 꿈꿔왔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이상한 집회에 갔었는데, 이 기도원 원장이 안수 기도만 하면 뭔가 일어난다는 아주 소문이좋은 집회였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었는지 제일 앞으로 뛰쳐나가서 안수해 주길 기다렸고

안수받았을 때 너무나 기뻐서 잠이 안 왔었습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 이상한 기도원이었습니다.

뭔가 은혜로운 메세지를 전하고 북을 치면서 헌금을 내도록 분위기 조성하고, 안수해 주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누군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야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부딪혀 가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모태 신앙이었지만 묵상은 무엇인지, 기도는무엇인지, 성경은 왜 중요한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서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정작 하나님 이름만 알았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사랑의 하나님이신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찬양팀을 하면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리더를 만나게 되고

그 사람의 생활 속에서 신앙을 보면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훈련을 받게 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뭐든지 새로워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지를 알아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지금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지름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단순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생활화될 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또는 교회 생활을 잘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나쁜 점은 바로 무언가 색다른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기본을 넘어선 뭔가 다른 자신의 경험을 새롭게 해 줄 자극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신앙의 기본기를 지켜가는 것 보다

영적인 것에만 관심있고 은사에 관심이 있다보니 기본에 관련된 것은 오히려 관심 밖으로 밀려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적 은사만 받으면 다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는 거죠.

또 뛰어난 지식만 있으면 다 된 것이다 하고 그것만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거꾸로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식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본적인 원리로 돌아가라고 고린도전서를 통해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무엇이겠습니까?

은사를 추구하여서 은사만 받으면 나의 신앙생활은 다 완성된걸로 생각되던 고린도교회 사람들, 또는 지적인 것만 알면 나의 신앙 생활은 다 된 걸로 생각한 고린도교회 사람들에 비해 우리가 가장 추구해야 할 기본적인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고 무엇을 하셨는지를 체험하며 사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철저히 기초한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이고,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셨는지 그 은혜를 생각하며

그 복음을 절대적으로 붙들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그리고 그 분을 알리는 것이 바울의 가장 큰 원리이자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도 이 기본적인 원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MSG 버전에서는 율법 아래 있는자에게 있어서도 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율법 아래 있는자가 되었지만은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접근하였다라는 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원리가 절대적으로 작용해야 하는지를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절실하게 느끼고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역자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고 여러분에게 양육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목적이 되어서 정작 저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를 잃어버리는 것 만큼 큰 잘못은 없습니다.


 다른 교회의 어떤 여자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에게 불만이 있으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뭐든지 돈에 관심이 있으시고, 성도들을 볼 때 그것으로 판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왜 벌어집니까?

사역에 집중하다보니 정작 자신에게 있어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도 순간 순간마다 청년부를 생각할 때 가장 잊기 쉬운 것이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내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주님! 제가 주님이 필요한 자인데요, 그것을 또 잊어버리고 욕심이 앞섰네요.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요. 그것을 잊어버리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한다 그래도 정작 자신은 버리워진 채로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작 자신은 복음에 참여했지만, 자신이 버림받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가꾸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사역을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평생 간직하시고 사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약간 제비같이 생긴 나이가 60대쯤 되는 아저씨인데,

한자에 모든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하면서

한자 능력시험을 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을 얼마나 잘하시는지, 자신을 가꾸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빠질 정도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내릴 때 저한테 잘 해 준다고 꼭 오라고 명함을 주셨습니다.

그 명함은 무도장과 관련된 곳이었습니다.


 이 분들도 먹고 살려고 자신을 잘 가꾸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없어질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자신을 잘 가꿉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영적인 삶을 잘 가꾸는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우리의 노력을 기울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뭐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일어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꾸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할 때도 세상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잘 가꾸도록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존재도 우리의 아무런 노력도 없이 하나님에 의해 빚어지고 이 땅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잘 가꾸라고 말합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아무 노력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주님은 우리 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가꾸며 이땅 가운데서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은혜 이후에 우리의 반응이 항상 요구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이후에, 어떤 반응을 하시며 어떻게 자신을 가꾸고 계십니까?

자신이 항상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고 그 분으로부터 공급받으면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는 다녀도 다른 사람들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아도 정작 자신은 복음에서 제외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려고 하십니까?

혹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제외되고 있습니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토록 열정을 쏟았던 어떤 교회 대학부 회장 출신 한 형제가 지금은 교회를 안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것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역이 우상이 되어 정작 자신은 복음의 감격에서 멀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유명한 목사님들이 타락한 모습들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정작 사역이 우상이 되어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데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근 몇 주 동안 저는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동생이 A형 간염으로 입원하여 있다가 상태가 악화되어 서울에 아산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성내역에서 내려 아산병원으로 가는 10여분의 그 길을 쭉 가면서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면 갈수록 불안한 마음도 많이 들고, 가보면 상태는 안 좋고, 집에 와서는 온갖 저의 신경이 그곳으로 쏠리며 기도도 그 쪽으로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저 개인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라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끼워 놓고 상황이 저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날로 신경질적이고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목요일 저녁에 하나님께서 그 점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저군요. 하나님! 저에게 주의 은혜를 부어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제 안에 새로운 힘과 기쁨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금요일 오전에 똑같은 길을 걷는데, 이상하게도 평안함과 기쁨이 흘러 넘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길에서 손을 벌리고 온 세계가 주께 속했습니다.라고 외치면서 기쁨으로 걸어갔습니다. 이상하게 그 전날까지 기도했던 그 숫자만큼 기도도 안하고 연락도 안 해 봤는데, 제 마음이 왜 이리 편했는지요.

오는 길에는 거의 울면서 왔습니다. 주님, 제가 죄인이네요. 하나님! 주님께 더욱더 집중하지 못하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 아니면 일 가운데 우리는 정작 그것에 사로잡혀서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단어 중에 face dow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엎드려 주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바로 나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이것이 필요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작 주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이 아닌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사랑에 반응하도록 평생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 기초는 바로 묵상과 기도입니다.


 묵상,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입니다.

이 책 제목을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에게 어떤 부분이 필요한지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나의 힘으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이 행하십시요. 작은 기적을 만들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요새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히딩크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축구에서 기본기가 정말 중요한데, 자기는 어떤 시스템이 있으면 그것이 적응되도록 또 노력하고 노력한다고.

시스템이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그것을 자기것이 되도록 만드는 훈련이 중요하다고.


 여러분! 새로운 것을 찾으십니까?

기본적인 것이 자기 것이 되도록 정진하십시요.


저는 지금도 다른 사람을 위해 공개적으로 기도해 주는 것이 어색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을 훈련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응답은

가장 기본적인 것 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평생 구하며

자신을 훈련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른 무언가 큰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님도 다른 사람들을 돌보셨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완전하신 하나님이신데, 무슨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게 필요했겠습니까?

그러나, 이 땅 가운데 철저한 인간으로 오셨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몸으로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아무리 사역이 바쁘시고 힘드셨어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급받음을 결코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할 것입니다.

정작 일 때문에, 정작 상황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에서 성령을 소멸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소홀히 하다가 정작 자신은 복음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있어 왔습니다.

항상, 하나님 저에게 주의 은혜로 채워주세요. 주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가 없습니다. 오셔서 저에게 힘 주시고 저의 삶을 다스려 주시겠습니까?

고백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접붙임바 되는 종교입니다.

다른 무슨 좋은 일을 했다고 자랑 할 것 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역사하시고, 내 마음의 중심이 그리스도로 향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을 점검해 보시겠습니까?

과연 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없으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삽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며 능력이고 우리 삶의 영원한 근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인내하며 믿음의 선포를 하며 열방을 품는 것!
예전에 정동진엘 갔었습니다.
교회 사람들과 간 적이 있었는데,
일출을 보려고 했습니다.

정동진 바닷가에 가서 일출을 기다리는데, 팻말에 오늘 일출은 6시 45분에 시작됩니다.라고 적혀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6시 30분쯤 되었는데, 날이 너무나 밝아서 안 믿겨 졌습니다.
다들 해는 이미 떴는데 날이 흐려서 해가 안 보이는거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6시 45분에 떠오른다고 했으니 기다려보자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시간이 되니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상황이나 정황이 그렇게 안 보이면 아무리 사실이라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객관적인 증거를 대라 그러면 믿겠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넌센스입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증거를 대고 역사적 사실을 들이대더라도
믿고 싶지 않으면 절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6월 29일 주일 설교(복음에 대한 응답 첫번째)  (0) 2008.07.08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  (0) 2008.07.07
Strategic Frontier YWAM BASE  (0) 2008.06.24
복음을 위한 권리포기  (0) 2008.06.23
시편 4편  (0) 2008.06.19

저는 DTS를 strategic Frontier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YWAM BASE에서 받았습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한국말로 하면 전략 선교 베이스이지요.
국내에서 직장인 DTS중 Jeff Littleton이 예언을 해 주시면서 제가 전략을 세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에 이끌려 비행기를 타고 이륙할 것에 대해서 말해 주었습니다.

또한, 그 때 교사였는데, 수업을 가르치면서 제 안에 갑자기 눈에 들어왔던 이미지는 고원의 이미지였습니다. 제가 갈 곳은 높은 지대에 위치할 것이라는 주님께서 주신 마음이 들었었습니다.

YWAM Salem DTS director였던 친구가 그 당시 귀국해서 저에게 DTS base를 추천해 주면서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당시 교제하고 있던 제 아내와 차를 타고 가면서 아내는 저에게 하나님이 추수할 것이 널렸는데 하나님이 추수할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콜로라도 스프링스 YWAM BASE 메인에 바로 똑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추수할 것이 널렸는데, 일꾼들을 찾고 있다.

아무 정보도 없이 전략선교베이스에 지원하게 되었고,
주변 친구들은 영어 DTS이기 때문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영어 정말 잘 못했는데,
BASE에 입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베이스에서 훈련받는 동안
Scott And Cathy Homans(DTS Directors)가 저희들에게
오랫동안 아시아 사람들이 없어서 기도해 왔었는데
우리들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앞으로도 저는 그 음성을 잘 알아듣고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살고 싶습니다.

관련글 : 2006/07/11 - [His guidance] - 예언과 그 이루어짐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  (0) 2008.07.07
믿음에 대하여2  (0) 2008.07.04
복음을 위한 권리포기  (0) 2008.06.23
시편 4편  (0) 2008.06.19
요나단과 세례요한  (0) 2008.06.14
어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용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그 용돈을 쓸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모아서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써 달라구요.

그 돈은 근원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돈을 자기가 쓸 수도 있었는데, 더 가치 있는 일에 쓰도록 아버지에게 부탁드렸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권리포기입니다.
권리포기의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받은 용돈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둘째, 내게 쓰라고 주신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더 가치 있는 목적에 쓰는 것입니다.

흔히, 권리포기를 말하면서 둘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출 때가 있습니다.
권리포기를 하면 채워주신다 이런 논리만 강조할 때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첫번째 것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월급을 받을 때 어떤 생각을 먼저 할까요?
나의 수고로움의 대가를 직장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월급은 직장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 개념을 확립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정말 중요합니다.
직장이 나에게 월급을 주었다고 생각할 때, 나의 삶은 직장에 매인 삶이 되고, 직장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면서 타협도 하게 되고 신앙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직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이 조금 더 여유가 있어지고 생각보다 종속된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직장 생활을 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이제 그 대가를 하나님으로터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선택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만 쓸 것인가? 아니면, 다른 가치 있는 일에 쓸 것인가?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에서 자신도 하나님으로 부터 능히 받은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니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라고 말합니다.

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그것을 자기를 위해서 쓰기 보다는 복음을 위해 더 사용하기를 원해서 사례를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이것이 권리포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해서, 그것을 나를 위해 쓸 수 있지만
복음을 위해 생명을 살리는 일에 사용하겠다.

권리포기의 개념에는
생명을 살리는 일, 즉 복음이 반드시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을 표현하면
복음을 위한 권리포기 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권리포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에 대하여2  (0) 2008.07.04
Strategic Frontier YWAM BASE  (0) 2008.06.24
시편 4편  (0) 2008.06.19
요나단과 세례요한  (0) 2008.06.14
40일 동안의 패배적인 일상 속에서.  (0) 2008.06.06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시편 4편에는 사람들에 대한 대조의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2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3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경건한 자들입니다.

2절을 보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사는지 우리가 추구하는 거은 무엇인지를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까? 영광을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 하면서 삽니까?

오늘 유달리 저의 삶에 대해서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내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에게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3절에 하나님을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악된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한 자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택하셨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기를 하나님이 바라실까요?
4절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범죄하지 않는 삶입니다. 구별되는 삶입니다.
5절에 의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나 우습게 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무슨 우리의 목적을 위해 수단이나 되는 것처럼 여길 때가 많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경 말씀도 말씀으로 부터 들을려고 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주장을 드러내기 위한 근거로 성경 구절을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의 동기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로부터 공급받고 배우려고 하는지, 우리의 생각에 하나님을 갖다 붙이지는 않는지...

사무엘상 24:1-22절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어리석게 기회를 포기한 사람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최고 관심사는 왕이 되거나 사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께 있어야 하고 다른 어떤 기회를 잡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그 분으로 인하여 기쁘고 그 분을 향하여 우리의 모든 것이 정초되어 있을까요?

분명 주님 앞에서 계수할 날이 올 것입니다.
나의 삶 가운데 얼마나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는지.
그 기쁘시게 하는 삶은 고린도전서 3:10-15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하여 그 위에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으로 사람을 양육하고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Strategic Frontier YWAM BASE  (0) 2008.06.24
복음을 위한 권리포기  (0) 2008.06.23
요나단과 세례요한  (0) 2008.06.14
40일 동안의 패배적인 일상 속에서.  (0) 2008.06.06
한 사람  (0) 2008.06.05
사무엘상 20:24-42
24. ○이리하여 다윗은 들녘에 숨어 있었다. 초하루가 되었을 때에, 왕이 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앉았다. 
25. 왕이 언제나 하듯이, 벽을 등진 자리에 앉자, 요나단이 왕의 맞은쪽에 앉았고, 아브넬은 사울 곁에 앉았다. 다윗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26. 그런데도 그 날은, 사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울은 다윗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몸이 부정을 타서 아직 깨끗하여지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27. 그런데 초하루가 지난 다음날, 곧 그 이튿날에도 다윗의 자리가 여전히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사울이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새의 아들이 어제도 오늘도 식사하러 나오지 않느냐?" 
28.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다윗이 저에게 베들레헴에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하여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였습니다. 
29. 자기 집안이 베들레헴 성읍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자기 형이 다녀가라고 했다고 하면서, 제가 자기를 아낀다면 자기 형을 만나게 해 달라고, 저에게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지금 임금님의 식탁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이 사생아 같은 자식아, 네가 이새의 아들과 단짝이 된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그런 아이와 단짝이 되다니, 너에게나 너를 낳은 네 어머니에게 욕이 될 뿐이다. 
31. 이새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은, 너도 안전하지 못하고, 너의 나라도 안전하지 못할 줄 알아라. 빨리 가서 그를 당장에 끌어 오너라. 그는 죽어야 마땅하다." 
32.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 사울에게 "그가 무슨 못할 일을 하였기에 죽어야 합니까?" 하고 항의하니, 
33. 그 순간, 사울이 요나단을 찔러 죽이려고 창을 뽑아 겨냥하였다. 그제서야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34. 요나단도 화가 치밀어 식탁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모욕한 것이 가슴 아파서, 그 달의 이틀째가 되던 그 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35. ○그 다음날 아침에 요나단은 어린 종을 하나 데리고 들녘으로 나가서, 다윗과 약속한 장소로 갔다. 
36. 거기에서 요나단은 자기가 데리고 온 어린 종에게 "너는 막 달려가서 내가 지금 쏘는 화살을 주워 오너라!" 하고 시켰다. 어린 종이 달려가자, 요나단은 그의 머리 위로 화살을 쏘았다. 
37. 요나단이 쏜 화살이 떨어진 곳으로 그 어린 종이 달려가자, 요나단이 그의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아직도 덜 갔다! 화살이 더 먼 곳에 있지 않느냐?" 
38. 요나단이 그 소년의 뒤에다 대고 계속 소리쳤다. "빨리 빨리! 서 있지 말고 빨리 달려!" 요나단의 어린 종은 화살을 주워다가 자기 상전에게 바쳤다. 
39. 그러나 그 어린 종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요나단과 다윗만이 그 일을 알았다. 
40. 그런 다음에, 요나단은 데리고 왔던 그 어린 종에게 자기의 무기를 주면서, 그것을 들고 성읍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였다. 
41. 그 어린 종이 성읍 안으로 들어가니, 다윗이 그 숨어 있던 바위 곁에서 일어나, 얼굴을 땅에 대면서 세 번 큰 절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끌어안고 함께 울었는데, 다윗이 더 서럽게 울었다. 
42. ○그러자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잘 가게. 우리가 서로 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잊지 않도록 하세. 주께서 나와 자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나의 자손과 자네의 자손 사이에서도, 길이길이 그 증인이 되실 걸세." 다윗은 일어나 길을 떠났고, 요나단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요나단의 삶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사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을 통치할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대적하는 위치로 나아옴에 따라 사울의 자손이 아닌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요나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저 같으면 막 화도 나고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렸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항상 백성을 생각하며 다윗을 도와주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태도가 아버지로부터의 공격도 받게 되는 어려움도 생기게 되었지요. 결국은 전쟁터에서 죽게 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이 많이 달랐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가난한 집에서 자랐고 요나단은 부요한 집에서 자랐지요. 다윗은 도와 줄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요나단은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뜻에 따라 사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하나님 밖에 없는 그런 환경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처지에서 보면 그다지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을 상황에 놓이기 쉬웠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는 것을 알고 다윗을 도우면서 삽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결국에는 죽게 됩니다.

 우리는 요나단의 모습속에서 또한 세례 요한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예수를 드러내고 자신은 그저 돕는 위치에서 살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요나단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비교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알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는 이러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아니하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삶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던, 직장 생활을 하던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너무나 쉬운 것 같습니다. 나보다 저 사람이 왜 이런 점에서 뛰어나고 나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내가 노력을 많이 기울임에도 불구하고 왜 난 이런 면에서 대접받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심리적 상황 가운데 좌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도 하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죽기 까지 섬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기억하면서 조금이라도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요?

 머릿속으로 이해는 되어도 가슴으로 내려 와서 우리의 행동적인 응답을 하기란 참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을 위한 권리포기  (0) 2008.06.23
시편 4편  (0) 2008.06.19
40일 동안의 패배적인 일상 속에서.  (0) 2008.06.06
한 사람  (0) 2008.06.05
하나님의 영 vs. 악령  (0) 2008.06.04

사무엘상 17:16 그 블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17:24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사무엘상 17:16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 군대 앞으로 40일을 아침 저녁으로 나와 도발하며 모욕하는 발언을 하였음을 볼 수 있다. 24절에 보면 골리앗이 나올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도망하는 모습을 또한 볼 수 있다.
 참으로 어려운 현실의 모습이 나타난다. 골리앗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위용에 사로잡히고 능히 대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던 그 현실에서 40일 동안 아침과 저녁으로 골리앗을 보고 도망가는 일을 반복했으니 얼마나 이스라엘 군대들은 심신이 지치고 힘들었을까?
 우리의 일상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어쩔때는 힘든 일들에 사로잡혀서 40일과 같은 긴 시간동안 패배자의 모습 속에서 살아갈 때가 있다.
 하나님의 군대라는 정체성을 지녔던 이스라엘 군대의 모습처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일상에서 끊임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도망가는 모습들을 오랜 시간동안 경험할 때 절망감의 그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도대체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 절망의 늪에서 누가 건져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한숨 짓기 다반사이다.

 이 때, 다윗이 등장하게 된다. 사람들이 지쳐서 의욕을 잃고 쓰러질 때 다윗이 그 전쟁터에 나타나게 된다. 이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희망을 잃어가고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나보다라고 느끼던 예수님이 오시던 바로 그 때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치고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 상황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시작하고 계신다. 그 계획이 다윗과 같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일수도 있고, 예배일수도 있고, 우리 일상의 어떤 계기를 통해서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절망의 상황 속에서 건져내신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절망 가운데 사로잡혀 희망없이 지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던 사람들이 있었다.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희망을 가졌던 사람도 있었고, 재림이 늦추어지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점점 놓아버린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절망이 깊어지는 그 시간들 가운데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신 법이 없으셨다. 역사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이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새로운 희망의 계기를 하나님이 마련해 두신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며 40일간의 긴 시간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용기를 갖는 사람들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4편  (0) 2008.06.19
요나단과 세례요한  (0) 2008.06.14
한 사람  (0) 2008.06.05
하나님의 영 vs. 악령  (0) 2008.06.04
사무엘상 15:1-15  (0) 2008.06.02
사무엘상 17:1-11
1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2    사울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대하여 전열을 벌였으니
3    블레셋 사람들은 이쪽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쪽 산에 섰고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4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5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6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7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8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9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10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11    사울과 온 이스라엘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우리의 삶을 성경은 전쟁터와 같이 비유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쉬운 세상이 아닌 것이다. 날마다의 싸움 속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골리앗이 이끄는 블레셋 군대와 사울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의 대치 장면을 볼 수 있다.
골리앗은 도발하면서 나와 대적할 한 사람을 택하여 보내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골리앗과 싸울 이 한 사람은 군대의 운명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이 한 사람이 나가서 이기면 대적을 쳐 부수고 자유 가운데 살 수 있지만, 이 한 사람이 질 경우에는 이스라엘은 포로가 되며 속박될 운명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의 각 영역에서도 사단은 우리에게 도발하고 있다. 나와 싸울 이 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냉소섞인 목소리로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한 사람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골리앗과 싸웠던 이 한 사람은 바로 다윗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용감한 모험을 감행하였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쟁터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용기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관자 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좌절하지 않고 독수리 새 힘 얻어 날개침 같이 비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의 권세들이 나와 싸울 한 사람이 있느냐?라고 도발할 때 내가 여기 있다라고 외치며 하나님의 영에 충만하여 능히 적들을 쳐부술 사람들은 과연 어디있는가?
 승리를 주시는 주님! 자유를 주시는 주님! 모든 권세 가운데 뛰어나신 주님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p.s.
 아마, 우리는 이 한 사람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이 있다. 그 분은 바로 대장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두려워서 벌벌 떨고 숨어서 골리앗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대장 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단의 권세를 끊으셨다. 이제 우리의 싸움은 우리 자신의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나가는 싸움인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시고, 우리는 약하나 주님은 강하시다.
 다윗도 결국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볼 때, 다윗의 그 모습에서 성령 더불어 강력하게 세상 가운데 구원의 빛이신 자신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주님이 내 편이신데, 천하의 누굴 두려워하랴! 예수로 인하여서 넉넉히 우리는 이긴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나단과 세례요한  (0) 2008.06.14
40일 동안의 패배적인 일상 속에서.  (0) 2008.06.06
하나님의 영 vs. 악령  (0) 2008.06.04
사무엘상 15:1-15  (0) 2008.06.02
과부, 두 렙돈의 기적  (0) 2008.05.2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