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28-29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올 한해 동안 청년부원들을 잘 가르쳐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여야 할 것.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는 사람을 통해 서간다.  (0) 2009.01.08
기도 원칙1  (0) 2009.01.07
왜 그럴까요?  (0) 2008.12.23
나는 어떤 말을 따를 것인가?  (2) 2008.12.16
설교를 들을 때 자세  (0) 2008.11.27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원래 말씀하실 의도가 많지는 않으셨는데,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너무 근심하고 슬퍼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살짝 힌트를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말씀하실 것이 많지만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7절에 보면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유익이고 떠나시면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하고
20절에 제자들은 잠시 슬퍼할지 모르지만, 세상은 정말 기뻐하고
제자들도 역시 기뻐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지만
구하면 받게 될 것이고 기쁨이 아주 아주 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왜 이렇게 우리 삶이 힘들고 괴로울까
예수님은 빨리 오시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 이면에는 예수님이 빨리 오시지 않아서 힘들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반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내가 떠나고 성령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이 예수님 것이고
14절에 보면 예수님의 것이 성령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보다 이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이 예수님 것이고 예수님 것이 성령의 것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왜 성령이 함께 계시는 것이 오히려 큰 기쁨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생각해 봐야 할 점입니다. ^^

우리는 오히려 더욱더 기쁨 가운데 살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모습은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Merry Christmas!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 원칙1  (0) 2009.01.07
2009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0) 2009.01.04
나는 어떤 말을 따를 것인가?  (2) 2008.12.16
설교를 들을 때 자세  (0) 2008.11.27
영적으로 연결된 공동체  (0) 2008.11.27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구체적인 시험보다도 전체적인 요점을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전체적인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냐, 마귀의 음성을 들을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시험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엇을 결정할 때 우리 가운데 갈등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는 하나님의 방법과 대치되는 방법입니다.
무엇을 따르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갈등도 없이 그냥 하나님의 방법 아닌 것을 따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이끌어서 갈등의 현장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이끌리어 자연스럽게
그 가운데 하나님과 반대되는 쪽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런 갈등도 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이끌 때, 똑같은 삶의 현장이 바로 갈등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그럴 때
물음이 다가옵니다.
너 맘대로 살아라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의 갈등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이고
이 선택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겨 두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겠습니까?
삶의 부분 부분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두 가지 음성 중에서 말입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0) 2009.01.04
왜 그럴까요?  (0) 2008.12.23
설교를 들을 때 자세  (0) 2008.11.27
영적으로 연결된 공동체  (0) 2008.11.27
귀납적 성경 공부의 한계  (0) 2008.11.26

우리는 많은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가 모두 하나님의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설교에 하나님의 진리가 전혀 담겨있지 않다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저 분의 설교는 왜 저럴까? 별로 성경적이지 않은 것 같아라고 말한 적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설교자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생각하는 문제와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은 믿는 사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교훈하시며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설교자를 바라보는 태도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쓰신 사례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렇다면 설교자가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더라도 그 전체 메세지에 전혀 하나님의 메세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의 30-40분을 듣는 동안에 대부분에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메세지라고 생각하며 아예 귀를 닫는 것 하고, 그 중에서도 혹시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없을까 생각하며 듣는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상관없는 말씀은 새기지 않으면 될 것이고 진리가 있는 부분이라면 마음에 새기면 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하나님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막상 설교할 때 자의적인 생각이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할 때도 그 안에 성경적인 것들이 안 들어갈 요소가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메세지의 부분들이 하나님의 생각을 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사상이 다른 신학자의 이야기는 전혀 가치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안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부분들이 분명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아예 배척하는 것보다 그 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욱더 밝혀 주시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가는 것이 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바람직한 과정일 것입니다.

나는 맞고 너는 전적으로 틀리다.
이런 것처럼 유치한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유치함이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그럴까요?  (0) 2008.12.23
나는 어떤 말을 따를 것인가?  (2) 2008.12.16
영적으로 연결된 공동체  (0) 2008.11.27
귀납적 성경 공부의 한계  (0) 2008.11.26
귀납적 성경공부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0) 2008.11.26

고린도전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깊게 살펴봐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와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하나됨과 공동체를 성장하도록 섬기지 않는 은사는 어찌 보면 헛된 것이라고 고린도전서는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린도전서를 보면 성령은 철저히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약한 지체도 있을 것이고 믿음이 강한 지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주신 은사를 통하여 서로를 섬김으로써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12: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2: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2: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12: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12: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12장 26절에 보면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래의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제 컴퓨터로 그린 것이라서 명확하게 그리진 못했는데 양해 바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원이 아닌 다원으로 그렸습니다. 영향력을 표현하기 위한 방식이지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우리는 다 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지체가 아프면 우리도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깊게 영적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경건하게 살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물들어 있다고 본다면 그 지체의 죄악에 대한 영향력은 또한 나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묶어 주신 각각의 그리스도를 몸으로 한 하나의 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들은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부터 영향력이 그래도 덜한 원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relationship이 어느 정도로 형성되는 공동체인가를 보면 됩니다.
가장 가까운 그룹은 가족입니다.
가족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연결된 가장 나 자신과 가까운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가족이 아픔을 겪으면 나의 영적인 부분에 가장 직결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상황들을 보십시요. 가장 영적으로 아픔을 겪거나 기쁠 때는 가족과의 영적 교제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그 다음 그룹은 지역 교회 공동체의 소속 부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 부서의 부원들의 영적 생활은 가족 보다는 영향력이 적겠지만 그래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다음은 지역교회, 그 위는 한국교회, 그 위는 세계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힘든 것은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타락들이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십시요.
내가 영적으로 잘 자라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와 같은 공동체에 있는 지체들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고 건강하게 자라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가 아프면 다른 부분도 같이 아픈 것이지 결코 분리된 부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공동체를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같이 성장하기 위한 비판이 되어야지 도려내기 위한 비판이 되면 그곳은 나에게도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곳이 정말 썩어버렸다면 어쩔 수 없이 수술할 수도 있겠지만요.

예수님도 요한복음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분리될 수 없는 영적으로 같은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가 되는 것이며, 나의 하나님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 안에서 같이 성장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런 공동체 속에서 성령은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귀납적 성경 공부는 분명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성경 공부방법입니다. 성경을 이 방법을 제외하고 이해한다면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을 하게 되며 이단으로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고 해서 귀납적 성경 공부가 완전한 성경공부냐 그렇지 않습니다.
귀납적 성경 공부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귀납적 성경 공부는 인간의 좌뇌 영역을 주로 사용합니다.
즉, 이성적, 논리적인 접근을 중요시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말만 듣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감정, 분위기 등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게 됩니다.
감정적인 영역은 우뇌적인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 성경 구절을 단순히 귀납적으로 분석할 때 고려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좌뇌적인 부분과 우뇌적인 영역을 동시에 사용할 때 성경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귀납적 방법에서 그 당시 상황을 유추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 때의 상황에 대한 상상력을 추가하여 성경의 본문을 제대로 살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상상력은 자기만의 상상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납적인 방법에 의해 허용되는 한도내에서
상상력을 사용해야 할 때 지나친 해석을 막을 수가 있고
문맥자체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귀납적 성경공부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귀납적 성경공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왜? 입니다.
간단하죠!

즉, 성경에 어떤 구절이 있다면
그게 왜 거기에 들어가 있는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이런 질문을 찾는 과정입니다.
왜 거기에 들어가 있는가를 알기 위해선
앞 뒤 문맥을 살펴야 할 것이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를 찾기 위해선
그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하며 저자의 의도 청자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상황과 비추어서 맞는 현실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지만
이것이 습관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ywam에서 9개월동안 sbs를 하면서 남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왜라는 질문이 습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귀납적 방법은 성경을 볼 때 아주 기초적인 작업입니다.
이것을 했다고 대단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성경을 보는 하나의 시작을 했을 따름입니다.

일부 목회자가 신대원을 졸업하고 sbs를 하면서 내가 신대원에서 배운 것이 없다고 말하는 분도 계시는데, 이런 말은 그분이 신대원에 다니시면서 충실히 공부를 안 하셨기 때문에 하시는 말입니다.

모든 주석적 작업의 기초가 바로 귀납적 성경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귀납적 방법이라는 기초를 지켜서 성경을 보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왜냐하면 뭔가 전문적이고 세련된 방법을 쉽게 찾으려는 경향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기초가 가장 중요하지만, 알면 알수록 기초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럴 때 항상 넘어지게 됩니다.

피겨의 김연아 선수가 탁월한 실력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점프의 기초를 제대로 닦아 놓았기 때문에 항상 그것에 바탕을 둔 점프로 가산점을 받습니다.
이에 비해 마오 선수는 기술은 화려할 지 모르나 점프의 기초를 제대로 실현 못하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초는 항상 중요합니다.
내 신앙이 자랐다고 하면서 기초를 소홀히 하시는 분이 있는데
항상 기초를 튼튼히 세우고 다시 한 번 확인할 때 흔들리지 않게 말씀 위에 서 갈 수 있습니다.

왜? 라는 기초적인 질문을 가지고 성경을 보십시요.
내가 알던 부분도 다시금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왜 여기에 이런 부분이 들어가 있지?를 반복해 생각해 보십시요.
여태껏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설교를 하다보면 부딪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설교에 대한 부분입니다.
무엇이 성경적인 설교입니까?
성경 말씀을 많이 인용하면 성경적인 설교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경적이지 않은 설교일까요?
보통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내용에 대해서 성경 구절이 많이 인용되지 않을 때 자기 생각을 나열하는 제대로 된 설교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많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에 많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깊게 생각을 해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보통 그 시점에 자신이 말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그 과정은 본인만 압니다.-결론적인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그 현재의 시점의 말만 듣기 때문에 오해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하게 된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들려지는 말만 듣고 판단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이란 것은 또는 글이란 것은 그것이 들려지거나 쓰여졌을 그 당시까지 이르는 과정과 절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다 그런 말을 한 의도, 그런 글을 쓴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은 결국 철수와 영희가 결혼해서 잘 살았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이 뭐야라고 누군가가 물을 때, 철수와 영희가 결혼해서 잘 살았어라는 게 결론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것만큼 의미없는 답변도 없을 것입니다.
철수와 영희가 결혼해서 잘 살았다. 그런 text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과정, 철수와 영희가 정말로 어려운 난관 속에서, 어찌보면 우리보다 더 힘든 과정 속에서 이렇게 이렇게 극복하여 결국은 결혼까지 이르게 되고 잘 살게 되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지은이가 그런 글을 쓴 이유까지 생각해 본다면 의미는 더더욱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지은이는 왜 그런 글을 쓰게 되었을까요?
지은이는 아마 현실 가운데 사랑이라는 것이 모든 난관을 극복해 주는 중요한 요소이고, 독자 또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야한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겁니다. 즉, 철수와 영희가 난관을 극복하고 결혼했다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 자체에 의도된 것이 더 큰 의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자체의 text가 있다면, 그 text가 쓰여진 의도를 찾아야 합니다. 왜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는가? 왜 이 부분에서 이 구절이 들어가게 되었는가? 왜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가? 이런 과정을 겪지 않고서 어떻게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 있습니까?

항상 말과 글에는 숨겨진 과정과 의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들을 위한 숨겨진 변화를 위한 메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찾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신학자들이 계시라고 일컫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즉, 성경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무엇을 가르치길 원하시는가?를 찾는 과정이지요.
어떻게 보면 설교라는 것도 바로 text 자체가 있으면 그 과정과 그 과정과 결론에 이르는 연결점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라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성경 구절 많이 늘어 놓는 것이 성경적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도와 그 과정 결론에 이르는 종합적인 것들을 다루는 것이 성경적이겠습니까?
성경 구절을 많이 늘어 놓지는 않아도 모든 일련의 과정이 하나님의 의도를 찾는다면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을까요?
성경 구절이 아무리 많이 인용되었더라도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성경적일까요?

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신명기 34장
34: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34: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4: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34: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34: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34: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34: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34: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화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34: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1. 날이 추워집니다. 추워지면 사람이 감정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외로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무언가 우리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발라드가 유행하고, 슬픈 영화를 보면서 울먹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슬픈 이야기를 좀 해 보려고 합니다. 구약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나라를 읽고 고통 당할 때의 이야기도 슬프지만 오늘 모세의 마지막을 보내는 장면도 가장 슬픈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2. 모세의 일생
 모세의 일생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는 태어난지 석달만에 죽음을 피해서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몸을 맡깁니다. 바로의 딸이 갈대상자를 보고 아기를 불쌍히 여겨 양자가 됩니다. 그렇게 바로의 궁에서 자라다가 자기 민족의 고통을 봅니다. 그 고통을 보고 분에 못 이겨 자기 민족을 괴롭히던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도망하여 미디안 땅으로 갑니다. 거기서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오랫동안 하게 됩니다.
 나이가 팔십이 거의 다 될 때까지 어찌보면 지루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일상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이 팔십이 되면 좀 쉬고 싶은 나이일 수도 있는데, 그 때부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편할날이 없는 날들을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두려운 싸움을 싸우게 됩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 길들여져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불신하고 모세에 대해서 툭 하면 불만을 털어 놓고 심지어는 돌로 쳐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에서 수많은 적군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모세의 손에 어찌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이 달려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권면해야 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삶을 살았겠습니까? 인생에서 자기 문제로 고민하며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 자기 민족들 문제로 인해서 하루 하루가 가시 방석에 앉은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들었던 사람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툭하면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늘어 놓아서 모세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중보했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에 대적하는 이스라엘 무리들을 위해 중보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람들을 살려 주십시요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목표였던 오로지 한 가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지루하고 길었던 싸움을 싸우게 됩니다.

3. 그런데 그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인생의 목적을 가나안으로 향하고 일생을 그렇게 고생하고 살았는데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왜 못 들어 가게 되었습니까?
 
민수기 20장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없어서 불평하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는데, 모세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순간적으로 열받아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물을 내겠다라고 말하면서 반석을 지팡이로 칩니다.
20장 12절에 하나님은 모세를 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가나안 땅으로 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모세가 뭘 그리 잘못한 게 있습니까?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 사이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흥분해서 한 일은 어찌보면 모세의 전적인 잘못도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하고 거역하려고 했기 때문에 모세가 잘못을 범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였다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다고 모세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입니까? 인생에서 그토록 바라고 목표로 고생하며 살았던 모세가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 그 느낌이 어떨까요?
정말 가슴 아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보여주며 모세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 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뜻을 알고 평생 그분과 동행하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과 다시금 새로운 서약을 하게 합니다.
 이런 행동을 보게 되면 모세의 마음 속에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된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고 이스라엘 백성들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모세의 간절한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느보산에 올라 자신은 비록 들어갈 수 없지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본문 34장 10절에서 12절에 보면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아시던 자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립니까? 큰 여운으로 남고 하나님과 정말 그토록 가까웠던 자이구나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모세와 가까우셨으며 친구처럼 지내셨으며, 아무도 하나님을 몰라 줄 때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했던 모세를 그냥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지 왜 생명을 거둬가실 수 밖에 없으셨을까요?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5절에 모세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msg에는 하나님이 직접 모세를 묻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했던 모세, 그 마음을 살폈던 모세를 하나님은 모세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고 그를 직접 손으로 묻으셨습니다.
 하나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이 내용과 비슷하지는 않지만 심정을 느껴볼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읍참마속이라는 사자성어와 관련된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읍참마속은 제갈량이 마속이라는 사람을 울면서 죽였다는 일화입니다. 마속이라는 사람을 제갈량은 자식처럼 사랑했고 마속은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이 마속에게 제갈량은 중요한 곳을 잘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속이 경거망동해서 사려 깊게 행동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해서 그 곳을 지키지 못합니다. 이 마속은 제갈량에게 자기가 그 곳을 잘 지키지 못할 때는 목을 내 놓겠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갈량은 마속을 울면서 벨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면, 아무리 친해도 명령을 잘 준행해야 군대 기강이 살아 죽음의 격전지에서 잘 견디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율법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중에 모세만큼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산 사람이 혹시 있습니까? 그런데, 이 모세도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면 죽을 수 밖에 없고 영원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도 빠져나갈 수 없는데, 우리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모세를 사랑하셨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바뀔 수 없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상징입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서는 율법 말고 다른 법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무슨 법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왔습니다.
율법에 의해서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할 일만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간음하고 대중 앞에서 사형 처분을 면제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지금 선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계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 간음한 여인을 그냥 보내셨습니다.
율법은 죄를 범하면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인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은 변개치 않습니다. 그 여인은 죽어야 하는데, 그 여인을 보낸다면 그 처벌은 어떻게 해결 하는가입니다.  절대적으로 법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죽어야 할 사람을 그냥 보내라고 말하면 그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죄인을 보낸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이 직접 그 죄를 담당하고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5. 가장 친한 친구였던 모세도 하나님은 생명을 거둬가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자신을 잘 알고 그 뜻대로 했던 아들이신 예수도 십자가에 처벌받도록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왜 그 희생을 감당했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심한 죄인이었습니까?
오히려 백성을 사랑했고 죄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구원받을 수 없음을 하나님이 심판하는 그 아픈 모습을 통해 보여주며 우리에게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희생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까? 정말로 모세가 예수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과 화해되며 생명의 길로 오라는 초청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지금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토록 모세와 예수님이 그리고 초대교회의 숱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죽음에까지 이르면서도 걱정하며 예수를 믿으라고 그 길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며 사라져 갔던 것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지난 수요 기도회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정말 눈물날만큼 가슴 아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합니까? 자기의 일에 정신 팔려서, 남자 친구와 여자친구에 정신 팔려서 하나님은 계속 뒷전에 계시지는 않습니까?

6.  장신대를 은퇴하신 주선애 교수님이 계십니다. 나이가 85세입니다. 그 분이 여성신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신 것을 들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 여성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많은 사회적 차별 속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삶을 살았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현실 속에 여성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이 땅을 품고 기도했던 그 모습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면서 안타까워 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곁에서 끝까지 사랑했던 사람들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사회적 차별 속에서 예수님은 여성들을 자유롭게 해 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만지셨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다 주를 떠나도 여자들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이 다 비겁하게 주를 버렸어도 교회는 여자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오히려 여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세상으로 떠나고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한국 사회에 그만큼 소망이 없음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최후의 보루였던 여성들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친구처럼 사랑했던 모세를 율법으로는 도저히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아시고 죽이시고 손으로 친히 묻으셨던 하나님, 사랑했던 아들이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그 아들까지 묻으셨던 하나님.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그 아픔에 반응해야겠습니까?
 그토록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일, 모세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타 )
관련 성경구절들
출33: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민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민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민12: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히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1. 히브리서에 보면 모세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그냥 하나님께 맡기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2. 시므온도 늙은 상태에서 예수를 기다리고 아기 예수를 보면서 이제는 눈을 감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토록 보기 원하던 예수님.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예수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는 사람들이다.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1-10 중에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2 우리가 너희 모두를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1: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1. 복음이 이기고 있는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당혹했던 것은 복음이 이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 과연 복음이 이기고 있는 것인가? 말씀이 이기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기고 있는가?

오늘날 많은 설교가 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말씀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뿌리 내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 순간은 말씀에 은혜받고 감격하다가도 또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삶은 똑같은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설교가 좋은 것 같다가도 설교자가 자신이 한 설교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는 것을 알게되면 그 설교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참 허무합니다. 그럼 그 사람이 여태까지 했던 그 설교는 무엇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말씀을 붙들고 일생을 사는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조차 말씀이 영향력 없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여기서 저도 제외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삶 속에 복음이 이기고 있습니까? 복음이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 청년부는 어떻습니까? 과연 복음이 이기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어떤 교회가 예배가 좋다 숫자가 늘어난다 이런 말 말고 복음이 이기고 있는 교회이다.라는 소문을 혹시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그 교회는 말씀이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켜서 성도들이 험난한 세상 가운데서 말씀으로 능히 이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교회야!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2.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이겼다는 소문을 잘 듣고 있지 못합니다. 한국 사회를 온통 둘러봐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이기고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잘 듣지 못합니다. 그런 소식을 듣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시대가 되어 가고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나오는 데살로니가 전서는 오히려 복음이 이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어 그 도시와 주변 도시 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 믿음의 소문이 퍼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 저 교회는 참 신기한 교회야. 복음이 이기고 있어. 그런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교회를 발견하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공격하고 환난과 박해가 많아지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그런 놀라운 일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온통 그 교회에 대해서 참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교인들의 삶이 온통 복음으로 변화되고 있어. 이렇게 어려운 세상 속에서, 환란 속에서.

 

3. 그렇다면 과연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이 환난 중에서도 복음으로 승리하고 있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환난 속에서도 복음이 오히려 세상을 압도하고 승리를 선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인인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물음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것이 단순히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체험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 가운데 큰 확신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체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이 우리 마음 속에 다가와서 눈물 흘리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남아서 우리의 삶을 강력하게 인도하는 경우가 있으십니까?

신앙 생활을 하면서 그런 체험을 해 보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말씀 자체에만 머물러 있고 우리 삶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못 해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고, 세상을 이길 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뿐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달되도록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5절 후반부에 보면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라는 사람들이 데살로니가교회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 그들이 복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있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보면서 이들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GNB는 5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당신들에게 전했는데, 말 뿐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으로 또한 그것이 진리라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전했다. 당신들은 안다.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있었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 이것은 모두 당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

6절은 바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들은 우리와 예수님을 본받았고 심지어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그 말씀을 성령으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받았다.

즉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과 같이 살면서 삶으로 말씀이 얼마나 성령의 능력이 있는지, 완전한 확신을 주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들을 본받으려고 했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4. 제 믿음의 길을 돌아보니까 저도 믿음의 본을 보여주는 사람, 믿음의 본이라는 것이 그냥 단순히 지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능력있게 이끌고 가는 지를 보여줬던 사람에 의해 하나님 말씀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이것에 내가 모든 것을 걸 만하구나라는 것을 느낀 것 같습니다.

즉, 복음이라는 것은 삶을 붙들고 변화시키며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 저는 거기에 있던 저의 리더들을 보았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다가와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 말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돈이 없어도 말씀을 붙들며 말씀에 감격하고 말씀으로 이겨낸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또한, 삶에 있어서 잘못을 저지를 경우, 죄를 지을 경우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하면 즉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말씀들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들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분들이 하신 말씀이 저에게 사실로 다가왔습니다.

보십시오. 성경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거짓말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시며 벌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난 것을 거짓말 할 것이며, 많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목숨까지 바치던 사람들이 어떻게 거짓말을 할 것이며,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던 데살로니가교회 사람들이 삶에서 향기가 드러나던 그들의 메시지를 어떻게 거짓말일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당당하게 서며,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있게 그들에게 다가오며 그들은 바울등이 전한 메시지를 확신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복음이 주는 능력 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 저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에 말씀이 능력이 되어 삶 가운데 붙들고 있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보면서 도전을 받아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의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단순한 데서 비롯됩니다. 말씀의 능력이 어떤 지를 체험한 사람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어떤지를 체험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분을 갖지 않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직분을 갖고 안 갖고가 아니라, 이 공동체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다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실 분들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 때 내 삶이 이렇게 변한다라는 것을 그냥 사람들이 보게 해 주면 우리들의 믿음이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 가운데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있을 때, 그것이 하나의 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것이다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거친 세상 속에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단의 그 유혹속에서도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세상 가운데 나간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속에 제자들도 세상에 나가서 자신들의 삶이 예수님에 의해, 성령에 의해 송두리째 바꾸어지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6.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저에게 말씀이 이렇게 능력이 있는 것이구나를 삶으로 보여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걸 알게 되고 그 사람의 삶도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 그 사람에게 그런 영향력을 전해 준 어떤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도 또 어떤 사람이 그랬을 것입니다. 자꾸 위로 올라가면 그 맨 위는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는 복음이 살아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삶에서 같이 보며 배웠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는 흐름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연결되어 옵니다. 여러분들은 복음이 능력임을 삶에서 나타나는 그 라인에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의 족보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실제로 살았고 믿음으로 능력 가운데 세상을 이겼던 사람들의 라인입니다. 이 믿음의 라인을 아브라함의 라인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라인이라고 합니다.

 

7. 동막교회 청년부 속에서 저는 그런 사람들을 몇몇 보았습니다. 삶에서 어려움들이 끊임없이 밀려오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부여잡고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그 말씀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세상을 이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단 하나의 부분이라도 말씀이 이렇게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내가 말씀에 의해 이런 부분에서 승리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환난 속에서도 말씀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셨다면,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의 삶의 한 부분이라도 변화시키는 것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여러분이 그 승리의 체험을 할 때 여러분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고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세상을 이깁니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며세상을 이긴 믿음이 스스로 세상에 퍼지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냅니다. 전도는 믿음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이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이 하는 어떤 이야기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능력있다는 분임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냥 그 시간을 땜빵 식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 절실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능력으로 다가오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 능력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시고 주님을 기대하십시오. 우리 삶 가운데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이며, 그 능력을 체험할 때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깁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