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6:14-23
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15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을 번뇌하게 하온즉
16    원하건대 우리 주께서는 당신 앞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하는지라
17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하니
18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19    사울이 이에 전령들을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20    이새가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의 아들 다윗을 시켜 사울에게 보내니
21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
22    또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을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23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영적인 실체는 분명히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나오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영이고 하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이다. 악령은 하나님의 영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영일 뿐이다. 이 악령이 어디서부터 존재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긴 글을 써야 할 것 같아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가운데 떠나가게 되면 악령이 지배하고 영향력 있는 상태가 되기 쉽다. v.14 그런 가운데 악령의 영향력이 생기게 되는 것인데, 번뇌함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걱정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걱정의 모든 부분이 악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나치게 번뇌가 있는 경우 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괜히 걱정이 되고 근심이 우리 삶 가운데 다가오는 경우 악령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는 것인가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뇌를 일으키는 악령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 또한 14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 다시금 하나님의 영이 내 삶 가운데 임재하고 지배하시도록 삶을 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는 영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 받는가? 아니면 악령의 영향력 가운데 있는 것인가? 삶의 열매로 그것을 점검해 볼 수 있다. 만약에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지 못하고 악한 영의 영향력 가운데 내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면 영적 적쟁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의 한가지 강력한 무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찬양이다. 23절에 보면 사울에게 악령이 영향력을 미칠 때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났더라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다윗은 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이 있는 찬양 집회에 가면 우리의 영이 새롭게 됨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또는 예배의 장소 가운데 나아갈 때 우리의 영은 악한 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

15: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5: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15: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15:5 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키니라
 15: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15:7 사울이 하월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기 아말렉 사람을 치고 15: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 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15: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15: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15: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15: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오늘 아침 묵상한 것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1. 리더쉽의 근원과 리더로서 해야 할 점
 왕은 대단한 지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왕이 되면 아무래도 자신이 다스릴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 보고 책임감을 갖게 되거나 아니면 우쭐한 마음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있는 영역에서 어떻게 보면 왕과 같은 리더쉽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왕이라고 해서 꼭 진짜 왕 같은 큰 다스림의 영역 가운데 있는 리더쉽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히 내가 소속되어 있어서 영향력을 작더라도 미치면 그것을 우리는 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왕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왕이 되었을 때 위험한 점은 자기가 다스릴 영역만 생각해 보다 정작 자신의 리더쉽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자신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잊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15:1절에 보면 사무엘은 사울이 왕이 된 것이 여호와께서 기름부으셨고, 이스라엘 백성 위에 왕으로 삼으셨다고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직장 가운데서나, 선교단체에서나, 교회에서나 혹은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리더쉽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까? 내가 잘해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15:1절 하반절에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사무엘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왕이라고 생각할 때 가장 하기 쉬운 일은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곳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상기시켜줬던 것은 왕이긴 하지만, 왕의 지위가 어디서부터 오게 되었는지를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인도아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가를 우리 삶 가운데 살펴보실 때가 있습니다. 15:3절에 바로 사울에게 하나님은 사울의 중심을 살펴보기 위해 하나의 명령을 하십니다.

2.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대하는 것
 15:2절에 보면 아말렉의 이야기가 나오고 15:6절에 보면 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자의 운명은 멸망당하는 것이고 후자의 운명은 멸망의 상황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두 민족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겐 사람은 똑같은 상황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도와주고 선대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대하고 대적하는 것이 본질적 의미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대적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며, 이스라엘에게 선대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순응하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야기를 더 확장해 보면,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실상 약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그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땅이 없어서 이리저리 떠돌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가는 길을 막아서며 대적했다는 것은 약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성품과도 대치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좌우지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 가운데 따르며 살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만날 때나 아니면 어떤 결정을 할 때 그냥 내 생각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는지를 기도하면서 결정하고 주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무나 쉽게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결정을 내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때가 많습니다.
 상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조언을 하는 위치에 있을 때에도 그냥 내 생각대로 말하는 것 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도우심을 기도하면서 조언하는 것 하고는 영향력이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힘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3. 리더의 핑계 vs. 책임감
 우리는 이 본문에서 두 명의 리더를 볼 수 있습니다. 한 명은 사울이고 한 명은 사무엘입니다. 둘 다 미치는 영향력이 다른 두 분야에서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종교적인 영역에서 사울은 정치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사울 :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자기의 눈에 보기 좋았던 가치있게 보여졌던 아말렉의 전리품들을 취한다음, 13절에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12절에 자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전리품을 취한 것이 자기의 뜻이 아니라 15절에 백성이 그러했다고 책임전가를 백성에게 합니다.
 리더가 사역에서 무언가 잘 되어 가고 있을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자기가 무엇을 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부 소위 사역이 잘 나가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강좌 자체보다 더 크게 내고 광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책을 팔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책 내용 보다는 저자 이름을 더 크게 홍보하면서 광고하는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자 자신이 그런 일을 기획하지는 않았겠지만은 저자의 순수함을 손상시키는 행동의 사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우선시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기독교계에서 보여주고 있는 좋은 자료를 자기만 가지고 있으려는 폐쇄성입니다. 자기가 어떤 면에서 뛰어나고 지혜를 가져서 능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지혜가 있다면 그것이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된 부분도 일부 있지만-또한 자신 또한 누군가가 무료로 베풀어 줘서 얻게 된 것도 많습니다. 가령, 음악적으로 뛰어난 경우에도 교회에서 악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악기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 준 측면도 많은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누구로부터 왔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면에서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지위에 있게 된 것인데, 자기가 가지고 자신의 자료를 공유하려는 데 너무도 인색합니다. 변명도 제가 보기엔 정말 우스꽝스럽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좋은 자료가 있으면(물론, 자기 저작이라는 것을 전제해서 말입니다.) 공유하는 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이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내게 주셨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더 확장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고백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복음도 저작권료를 받고 예배도 돈 받고 예배에 참여시키는 행동들 제 눈에는 썩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외국에 있을 때 좋은 자료가 있을 때 많이 나누어주는 모습을 경험했던 저는 일부 사람들이 보여주는 자료의 폐쇄성에 대한 태도를 보며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과연 좋은 자료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건지, 아니면 자기가 그런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한국의 기독인 분들이 자신의 자료를 공개해 주시고 사용하라고 말씀해 주시는 모습을 볼 때 정말 감격스럽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특히, 블로그 등을 통해 좋은 자료들을 공개해 주시는 분들 감사드립니다.)
 잘못했다고 느낄 때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만큼 바람직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진실되느냐 안 되느냐에 묶여서 회개 안하느니보다는 회개하는 게 낫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기도가 바리새인적이니 아니니를 따지는 것보다 기도하는 게 낫습니다. 우리에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 분이 ENOUGH입니다. 따라서 그 분의 보혈의 피로 우리의 부족함이 정결케 됩니다. 예수를 자기의 태도보다 더 신뢰한다면 나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정결케 되어 받아진다는 것을 믿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 : 11절에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파하면서 온 밤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다른 리더를 판단하는 데 익숙해져서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대를 위해 밤을 세워 부르짖고 안타까워 하는 일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 역시 이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사무엘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많은 도전이 됩니다. 비판을 할 때에는 먼저 하나님 앞에 머물면서 내가 비판할 사람을 위해 안타까운 모습으로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 국민을 위해 진정한 정책을 행사하는 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고 많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또한 다치고 있습니다.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그럴 때 그냥 악감정에서, 확 리더들에 대해 안 좋은 마음이 드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금 침착히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은 마치 사울의 잘못이 자기의 잘못인양 생각하였습니다. 진정한 리더란 남의 잘못을 자기의 잘못으로 여기고 같이 회개하는 모습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자기가 회개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잘못도 같이 품고 회개하는 모습 이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리더의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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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기 쉽고, 편견 속에 무시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또한 쉽습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보면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한 내용이 나옵니다.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오히려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여기에 이 땅에 여성들을 향한 메세지가 있다고 봅니다.
학교에서 우연히 팜플렛을 보았습니다. 장학 기금을 조성한 한 남성 단체와 한 여성 단체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남성 단체가 기부한 액수는 여성 단체가 기부한 액수의 1/10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단체는 성별에 따라 그냥 나누어 놓은 단체이며 영향력이 있는 단체입니다. 물론, 단순히 수치 비교를 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만 나름대로 시사하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살면서 많은 믿음의 여성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젊어서부터 사고로 남편을 잃고 혼자되어 자식들 뒷바라지 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모아 장학기금으로 조성하는 여성들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을 정말 엄청납니다. 곳곳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 여성의 손길이 다 들어 있습니다. 궂은 일을 다 도맡아서 하고, 그리고 그 곳에 땀을 흘리며 자신의 두 렙돈을 드리는 여성들 말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바울을 후원하면서 뒤에서 뒷바라지 했던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변에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는 학생들을 후원하는 많은 여성들의 모습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매일 같이 기도로 돕는 여성들도 많이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해도 자신의 자리에서 두 렙돈을 드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그들의 수고에 대해서 많은 감사를 느낍니다.

 작은 기적을 만들어 가는 이 땅의 크리스챤 여성들을 축복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가진 것들을 이 땅을 위해 교회를 위해, 소외된 사람들을 흘려버리는 여성들을 보며 예수님은 그 마음을 보시며 수고하였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빨리, 이 땅에서도 여성들의 지위가 많이 향상되고 더욱더 여성 리더들이 교회 가운데 사회 가운데도 많이 넘쳐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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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시간이 되는 대로 리더에 대해서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문제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떨 때는 그 문제가 감당하기 버거울 때가 많습니다.
살면서 이 문제들을 해결을 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해결 하지 않고서는 살아가는 데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에 직면해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직장 가운데 어려움이 있으면 다른 직장으로 가고, 친구들 사이에 어려움이 있으면 쉽게 그 관계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을 포기할 때 우리는 잃는 것이 많습니다. 인생이 짧다면 짧을 수도 있을 것이고 길다면 길 수가 있는데, 넓은 안목에서 보면 그와 같은 문제들이 반드시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 말고도 비슷한 문제를 만나는 사람들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전도단에서 훈련받을 때 권위 중 경험의 권위라는 것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맞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어떤 것을 경험한 사람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그 경험한 영역에 대해 리더쉽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문제들이나, 아니면 공동체에서 비중이 크던 작던 간에 리더로서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을 부딪혀서 풀어나갔을 때 얻게 된 승리의 기쁨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참 힘이 되며 사람을 성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우리의 힘만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절대 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들은 도저히 지혜를 짜 내어 보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 같은 문제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그 문제와 직면하여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내어 놓고 기도로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풀어 가는 것이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안에도 동일하게 절대로 저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풀어야 하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요새 밤마다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기도를 하면서 달립니다. 주님, 저는 절대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의 성령이 필요합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도와 주십시요. 기도를 하면서 달리면 새로운 힘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주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면서 그 문제들을 직면한다는 것 이미 저에게 승리의 기쁨을 줍니다.

저는 리더는 자기가 리더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일차적인 리더가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리더로 맡겨 주신 데에는, 리더 자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훈련 계획이 있음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리더로서 세워주셔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영적 성장을 주시려고 하는지를 먼저 확실히 인식할 때, 공동체 가운데 어려움들이 다가와도 그것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강건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지 않고,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내가 리더니까 나에게 맡겨주신 이 사람들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때 무너지기 쉽습니다.

결국, 신앙 생활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섬기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계획 하심도 있지만, 나 자신을 향한 계획하심, 하나님의 훈련하심을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문제에 직면하여, 하나님이 그 영역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영역 가운데 강한 군사로 승리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려는 그 기쁨을 바라보며,
힘들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처절하게 그 문제에 직면하며 이기는 것이 리더의 기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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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있던 콜로라도 YWAM전략 선교 베이스에서는 화요일 밤마다 한국의 화요모임과 같은 모임이 있었습니다. 프레드마커가 선교보고 비슷한 것을 했었는데,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면서 다들 실컷 웃었습니다.
 외국에서 dts를 하다보면 강사들의 특색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머를 즐겨한다는 것이지요. 유머를 정성껏 파워포인트로 준비해서 보여주면서 웃음을 같이 나누곤 했습니다. 사실, 이런 정서는 한국 사람들에게 어색할 수 있고, 경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편견이지요.)
 그러나,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절망적이라도 우리 가운데 웃음을 주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이와 같은 정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찬식을 해도 즐거움과 기쁨, 떠들썩함이 있었고, 모이면 항상 찬송하고 기도하고 떡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는 너무 십자가의 신학만 강조되고 있는건 아닌지요? 교회에 나오면 무언가 해야 된다는 압박감과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강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이 우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지요?

 말레이시아에서 SBS 디렉터였던 Nadine은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유머러스하고 활기찬 모습이 많이 기억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웃음, 즐거움 속에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이 세상 가운데 거룩하게 살도록새롭게 샘솟게 할 소망이 흘러나오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요?

 설교에서는 이런 즐거움도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를 따라야 하는지? 예수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이런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회개를 해도, 회개의 결과가 얼마나 사람을 자유케 하고, 생명을 주며 기쁘게 하는지 이런 메세지를 전하는 것도 회개 자체를 우울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 보다, 회개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안의 새생명과 자유로의 연결을 이끌어내지는 않을까요?

 아래의 책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유머라는 책도 있고 예수의 유머(팔머, CLC)라는 책이 있는데, 후자가 좀 더 구체적이고 전자는 학문적으로 딱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유머 상세보기
엘톤 츄르블러드 지음 | CLC 펴냄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전반에 나타난 유머를 탐구한 책. 저자는 유머가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이 부분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그리스도의 유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 '유머'에 대한 부분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논쟁에서 사용한 유머, 비유에 나타난 유머, 짧은 대화에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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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어제죠.
필요에 의해서 휴대용 스피커를 고심고심하면서 하나 질렀는데, 밤에 갑자기 미얀마가 떠올랐습니다. 제 마음에 아주 강한 부담감이 왔습니다.
"너 휴대용 스피커 지를 돈은 있고, 당장 사람 죽어가는데 후원할 돈은 없냐?"는 강한 내적인 울림말입니다.
 하여간 여차여차해서 후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새 중국 지진 사태를 뉴스에서는 많이 보도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미얀마의 참상에 대한 보도는 짤막하거나 거의 없습니다. 매스컴에서도 당장 우리 나라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주는 중국으로 관심이 쏠리나 봅니다. 미얀마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혹, 이 사이트를 방문하시는 분들 계시면 미얀마를 위해 짧더라도 기도부탁드립니다. 또한 중국을 위해서두요.
 그리고, 후원 하실 능력이 되시는 분들은 적더라도 아래 사이트를 통해 후원부탁드려요.
 단 돈 만원으로도 생명을 살릴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만큼 소중한 일이 어디있을까요?

미얀마 관련 기사 (미얀마 어린이 수천명 아사 위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4&sid2=231&oid=001&aid=0002091971

후원을 위한 사이트
기아대책기구 :
http://www.kfhi.or.kr/
월드비젼 : http://www.worldvision.or.kr/html/main.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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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한동안 영적으로 공격을 많이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뉴스를 봐도 제가 생활하는 주변에서도 온통 분열의 영이 가득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영적인 실체를 분명히 알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력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바람직한 성경관이 아니고, 세력이 대단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분열의 영!
이 영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한국 교회에서 대적해야 할 영적 세력중에 하나입니다.

1. 한국 사회
- 요새 여러가지 사회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돈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는 정책이 세워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소들(미친소라고 불려지지만 마음이 썩 좋지 않습니다. 소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소한의 동물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항생제를 맞고, 분뇨틈에서 쓰러져서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면 얼마나 인간의 죄악이 큰지를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에게 비이성적인 정책이 취해지지 않고,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동물이나 사람이 이용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많습니다.
- 분열의 영은 꽤 간사합니다. 어떤 문제를 이용하여 문제 해결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인간 자체에 대해서 공격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와 맞지 않는 견해를 조금이라도 비추게 될 때에는 그 상대방 사람에게 인신적인 공격이 들어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치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 만나는 사람 가운데서도 이런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대화하는 게 무서울 정도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이 분열의 영이 조장하는 현상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한국 교회
- 교회 가운데 이단 문제가 많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교회역사상으로 이단 문제가 어느 한순간도 잠잠했던 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문제는 이단 문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들로 인해 교회 내에서 서로 간의 불신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이상한 행동, 자기의 마음에 안 드는 행동만 보여도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희생되는 교인들도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이 어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몸 안의 지체들이, 가족들이 이제는 서로를 의심하는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분열의 영이 만드는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는 기도로 이 영을 대적하며 승리 해야 할 것입니다.


- 영적 전쟁에 대해서.
 영적전쟁은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역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영적 전쟁을 너무 추상적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예수 이름으로 이 곳 가운데 사단의 세력을 결박한다. 이런 식으로 자동 반응할 때가 있는데, 그것 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한 실체를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무언가 알지 못하게 영적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분별하고 그 영을 결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의 방법입니다.

 어떤 모임에 가시든간에, 아니면 신문을 보시던, 뉴스를 보시던 간에 영적인 실체에 대해서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영이 우리의 삶에 영역가운데 다스리도록 선포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더더욱 요구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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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을 전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말씀인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한국에서는 메세지에 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메세지들이 많습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메세지를 강력하게 전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는 생각보다 쉬운 사회는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나아졌다고 해서 그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개념은 상대적이니까요. 돈이 많아도, 어느 정도 살기 좋아졌다하더라도 그걸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살다보니, 그리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보니 여러 모로 역효과들이 나타납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메세지를 정말 여러 곳에서 듣습니다.
 교회에서만 듣는 것도 아니고,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매스컴을 통해서도 가정에서도 온통 무엇을 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많이 듣습니다.
 이 메세지의 스트레스는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유달리 다른 나라로 머리를 식히러 가는 사람들이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떠나고 싶은 마음, 사진기를 달랑 하나 메고 여행 가고 싶은 마음, 이 마음들이 우리에겐 많은 것 같습니다.

 소망의 말씀!

 이것은 평생 붙들어야 할 문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혹은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과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삶에 지치고 절망하고,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고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삶에 영원한 위로와 소망이 된다는 메세지는 다시금 사람으로 하여금 힘을 갖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또다시 일방적인 must의 메세지를 날릴 경우는 그 압박감이 상당합니다.
 설교는 성육신해야 한다고 아랫글에서 적었듯이, 우리는 한국 땅에 사는 사람으로 이 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믿음의 말씀, 소망의 말씀, 사랑의 말씀을 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어떤 집회든, 어떤 예배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촉촉한 단비가 내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소망을 품고 이 땅 가운데 다시금 용기를 내어 살며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 가운데 사는 메세지를 말입니다.
 사람을 품지 않고서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 사랑의 마음을 담지 않은 메세지는 죽은 메세지와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의 요새 기도제목 중 하나입니다.
저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갖게 되고 웃음 지을 수 있게 되길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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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다보니 말씀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 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를 더욱더 깊이 생각하자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삶 가운데, 모든 순간 마다 예수를 떠올리고 그 분을 묵상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설교 가운데 현실과 분리된 예화를 만들어내지 않고 현실에 뿌리박은 예화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더욱더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영향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더욱더 깊이 생각하자! 항상 기억하는 문구입니다. 물론, 이 문구는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오늘은 말씀의 성육신에 대해서 말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이 땅 가운데 사셨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한 가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실제로 사시면서 직접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함께 하시면서 가르치셨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세지가 강력했던 하나의 이유는 사람들을 잘 아시고 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떻게 해야 그들의 삶을 얽매고 있던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 있을지를 다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사람들과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메세지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메세지가 어떻게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메세지가 되겠습니까?

예로, 신학생들에게나 가능한 신학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성육신이니, 칭의니, 성화니 이야기해도 그것은 뜬 구름 잡기나 다름없습니다.

 어떤 분의 메세지는 참 깊이가 있지만, 청중들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관념적인 수준에만 머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의 메세지는 너무 쉬운 수준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떤 회중들에 대해서는 그 메세지가 들려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회중들의 수준에 맞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전하는 사람이 회중들의 수준으로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많은 겸손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쉬운 메세지로 바꾸면 마치 자기 자신이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생각보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또한 너무 생각이 많아도 좋은 메세지를 전할 수 없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한번에 변화를 주려는 생각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메세지가 산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가지 메세지를 전하더라도 회중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전달하는 메세지는 근본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성육신하여 주의 뜻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육신의 원리는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적용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 비밀이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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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연주회에 다녀왔습니다.
교회 청년 중 한 명이 연주회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연주를 들으면서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보를 외우기 위해서, 또한 감정을 음에다가 담기 위해 수없이 연습을 하면서 때로는 한계를 느끼기도 했을 것이고, 답답해서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고 해야 하는 길이기에 묵묵히 최선을 다해 준비하며 연주회에서 준비한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것은 참 보람되지 않은가 생각이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면서 때로는 무언가 발전이 없는 것 같고, 답답함이 느껴지고 그냥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을 때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중요한데, 생각보다 쉬운 과정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인내를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내라는 것은 당시에는 쓰고 힘들지만, 분명 우리의 삶 가운데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결과까지 좋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 땅 가운데 사는 삶,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실패할까봐 돈을 땅에다 묻어둔 종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찌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날마다 최선을 다해 산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과 지향적인 것은 사람들의 심리겠지만, 결과보다는 과정 가운데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위의 사진은 연주회 사진과 상관없는 사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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