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용서

마태복음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의 앞 부분을 보면 예수님은 계속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말아라, 상처주지 말아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상처주는 행동을 우리의 몸의 한 부분을 통해서 한다면 그것을 없애버리라는 말까지 합니다. 18장 10절에 보면 아무리 작은 자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부터 보면 잃은 양 한 마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14절에 보면 그 이유가 작은 자 중에서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5절부터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그 사람을 바로잡게 하기 위해서 여러번 노력을 기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가 베드로가 갑자기 끼어듭니다. 그리고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우스꽝 스럽고 분위기 파악 못하는 질문을 합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베드로를 보면 많은 생각이 납니다. 베드로는 알다시피 마음의 표현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실수도 참 많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이 게바 반석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실수를 참 많이 합니다. 공동체에서 성경 공부를 해도 어찌보면 쓸 데 없는 질문을 많이 던지고, 자기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람은 분위기를 해치는 사람 같고 진지함이 결여된 사람처럼 보입니다. 교회에 좀 드문 드문 나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끈질기게 열심히 나옵니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은 교회에 드물게 나오지만 진지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타일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저는 전자와 같은 사람, 즉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앞으로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처음에는 다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베드로처럼 꾸준히 붙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히며 바로 게바 반석이 되어 갑니다. 베드로는 그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좌우지간 베드로는 7번 용서하면 됩니까라고 말합니다. 이 당시 관습으로 3번 정도의 용서는 대단한 용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무려 7번 정도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오버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아마 칭찬받으려는 마음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예수님이 용서하라고 말하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래, 내가 여러번 용서하는 것이 용서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표현을 보셔야 하는데, 형제라는 표현은 나랑 가까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나랑 먼 사람이 나에게 상처 입히고 잘 못 했을 때는 용서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나랑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입힐 때 많은 괴로움이 우리에게 밀려 옵니다. 그리고, 정말 마음 굳게 먹고 또 먹어서 한 번 용서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나를 배신하고 상처 입힐 때 여러분은 얼마나 용서하겠습니까?

 베드로처럼 7번 용서하겠다고 당당하게 선포하는 것도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려 7번을 70번까지라도 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7번을 70번이나 하라는 말은 490번을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7번도 힘든데, 490번을 나랑 가까운 사람들이 아주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을 용서하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즉, 아예 그 사람에 대해서 용서하는 숫자를 세는 것을 포기할 만큼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놓아주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주변의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혔을 때 몇 번을 용서해 주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의 앙금이 남아 있고 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고 있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를 들고 계시는 데, 어떤 종이 임금에게 만 달란트 빚졌습니다. 그것을 갚지 못했고 그 종이 하소연합니다. 왕은 그것은 보면서 27절에 보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고 그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빚을 탕감한다는 말이 여러분 실감이 나지 않으시죠? 만 달란트면 6000만일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즉, 그 사람의 식구가 전부 평생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어마 어마한 돈입니다. 얼마전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탤런트 한 분도 40억이라는 돈 때문에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40억이면 평생 일해도 갚기 힘든 돈입니다.. 그런데 약 3000억이라는 돈을 빚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많은 압박이 가정에 들어옵니다.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모든 빚을 갚지 말라고 변제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홀가분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종은 자신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 즉 100일 정도 일하면 갚을 수 있는 돈을 빚진 사람의 하소연도 무시한 채 옥에 가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임금은 분노하게 되고 이 사람을 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35절에 무엇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값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들도 우리에게 상처 입힌 사람들에 대해서 그냥 그것을 몇 번이라는 숫자로 한정시키는 용서를 하지 말고 또는 용서 안 하는 행동도 하지 말고 아예 마음으로부터 놓아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용서는 바로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정말 말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끔 아내랑 싸움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잘 잊어버립니다. 아내는 저보다 똑똑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기억력이 좋다고 하기 때문에 아내도 마찬가지로 제가 했던 말들을 잘 기억하고 부부 싸움할 때 써 먹습니다. 과거 이야기를 꺼내서 저의 잘못을 지적할 때 저도 과거 이야기를 꺼내서 써 먹고 싶은데 도무지 생각이 안 납니다.

 그런데, 이 일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약 나의 죄를 계속 기억하신다면 나의 마음은 어떨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뭐 잘못할 때마다 저에 대해서 계속 공격하면서 너 과거에 이랬지? 이랬지? 이러면서 계속 저의 과거 잘못을 끄집어 내며 저에게 뭐라하신다면 저의 마음은 정말 무너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 용서는 마음으로부터의 용서이며 모든 것이 해결되는 용서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용서가 바로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놓아주신 그 용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과 같이 하시며 기쁨과 고통을 같이 나누셨습니다. 어려운 것들이 있으면 어느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아니하시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시고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인하며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까지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끝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용서가 진정한 용서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번주에 소년부 김** 전도사님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전도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용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라는 말입니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용서가 그토록 중요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용서에 대해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용서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용서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주기도문도 그와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로부터 시작하는 주기도문에서 보면 다른 모든 말은 -해 주시옵고라고 말하고 있는데, 용서에 대한 것 만큼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나오는 마태복음 6장 9절부터 보면 13절까지 우리가 외우는 주기도문인데,

14절부터 바로 이어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주기도문을 이야기하면서 바로 이어서 한번 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토록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이 용서라는 방법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우리가 용서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며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구원받게 되는 가장 큰 통로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젠가 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사람이 있습니다. 저의 의도를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계속 저를 몰아붙였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저는 그분을 찾아가서 오히려 제가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저를 쳐다보는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를 다시 보는 그런 눈빛이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용서할 때 상대방은 여러분들을 다시 보게 되며 의문에 쌓이게 됩니다. 내가 볼 때 그런 행위를 당하면 도무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용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끝까지 누군가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고 섬길 때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짐 엘리엇이라는 선교사의 일대기를 본적이 있습니다. 짐 엘리엇 선교사와 친구들인 동료 선교사들은 아마존 정글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부족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어느 날 강에서 창이 꽂힌 채로 남자 선교사들이 다 죽어서 발견되었습니다. 부인들과 아이들은 그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서 그 곳을 떠나서 본국에서 계속 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돌아와 부족 사람들을 용납하고 그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알 수 없는 용서와 사랑이 부족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채프먼이라는 미국의 가장 유명한 ccm 사역자중 한 분이 그 부족 사람 한 사람과 함께 찬양을 불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찬양을 불렀던 바로 그 부족 사람이 선교사들을 창으로 찔러 죽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가 Godfollower가 됐다고 간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살인자가 이제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고, 짐 엘리엇 선교사의 아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용서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용서가 우리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의문을 가져오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용서는 몇 번 용서하는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놓아주는 용서였습니다.

 힘들어도 여러분들이 주변의 형제들을 나에게 상처 입힌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해 줄 때 여러분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용서에 대해서 물으면서 아마도 자신은 용서의 의미를 잘 몰랐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캐릭터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에서 예수님의 용서를 이해하는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 나의 양을 먹이고 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믿어주시는 그 용서,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케 하는 그런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정말 반석이 되어 끝까지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공동체에는 여러분들이 보기에 미숙하고 실수하고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 주위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여러분들을 미워하고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용서할 때 여러분은 또한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 대해서 어떠했는지를 알게 되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동행 가운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용서를 배우면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그 값어치를 더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 대해서 하나님은 얼마나 실망하시고 가슴 아프시고 그러셨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를 결정하시고 저를 끝까지 그 분의 마음으로부터 저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저를 살게 합니다.

어떤 것을 옳고 그르다고 명백하게 편을 갈라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일이라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요새 기독인 학교를 따로 만드는 것에 대한 움직임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좋은 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면역이 약한 사람들에게 미리 예방 주사를 맞혀서 강하게 만들어서 세상 가운데 보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많은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제 의도를 실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평생 기독인 문화에 갇혀서 편협된 시각을 가지고 살 수도 있으며, 세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우월감을 가지고 사는 편협된 기독인을 만들 소지도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변에 기독 학교를 나와서 정말 편협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기독 학교가 아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뛰어난 학교는 그들에게 우스운 학교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자기가 다닌 기독 학교는 하나님의 학교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학문적 성취가 뛰어난 학교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리주의자적 생각이고 근본주의적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문화에서만 자란 사람들은 왜곡된 생각을 많이 갖고 있어 안 믿는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의 메세지만 듣고 자신이 사랑받아야 할 대상이고 자신의 잘못은 다른 사람들이 용납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왜 내 잘못을 용납하지 않느냐라고 세상을 향해 비난합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소홀히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정 없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겸손하게 섬기며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태초부터 공동체 가운데 사람을 두셨습니다. 같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세상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겠습니까?
기독인들만의 공동체, 그 편협된 공동체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기독인만의 하나님으로 축소시키는 우를 범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독인 뿐 아니라, 비기독인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본 뜻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마태복음 공동번역
5: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5:45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5:46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5:47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5:4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설교를 하면서 가장 부끄러웠던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메세지를 전할 때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없어서
그 사람에게 너가 그 때 그 메세지를 들었어야 하는데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부분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메세지가 들려지도록 사람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저의 말로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때를 얻던 못 얻던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그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만이 변화의 주체되십니다.
앞으로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렵니다.



본문 레1:1-3;요4:22-24;롬12:1-2;히13:15-16


오늘 우리는 교회와 신학에서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하는 문제 제기에 다시 직면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예수 믿고 세례 받고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성도로 부름심을 받았고, 그리스도인은 평생 예배자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예배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서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이며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예배는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소원성취를 하기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 반대급부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원하는 그 무엇을 받아내려는 어떤 ‘주고받는 거래’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또 기회 있는 대로 자주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정작 ‘예배가 무엇이고,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예배의 본질과 예배의 형식과 예배의 역사와 그 변천에 관해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읽은 성경의 분문 말씀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예배의 책’으로 알려져 있는 레위기의 첫 머리인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1장 1절 이하에서, 예배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면 누구에게나 개방되고 허락된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이요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하나님께 예배(예물)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에 어떤 신분, 계급, 학식의 유무, 성별 등의 차별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원칙은 예배는 누구나 드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도록(열납하시도록)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그럼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그 원리와 정신과 규칙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보면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제사)는 드리는 데, 많은 경우에 잘 못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싫어하고 미워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다소 과격하다고 할 정도로 책망하였습니다(예컨대, 사1:10-17;암5:21-24; 미6:6-8; 말1:6-10 등).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예배를 비판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너희가 드리는 그런 예배를 계속 드리려면, 차라리 두 번 다시는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제사보다 인애”를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호6:6). 잠언서에서도, “제사 드리는 것 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을 여호와계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잠21;3). 사무엘 예언자는 “번제와 다른 제사보다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며, “제사보다는 순종”이 더 낫다고 말씀했습니다(삼상15:22). 이런 말씀을 다 찾아서 소개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없는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는 잘못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예배는 순서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예배자의 정신과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제물이 먼저가 아니고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이 점을 우리는 오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예배자의 마음과 태도가 예배 그 자체나 어떤 예물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의 머니이다.”라고 했습니다(렘12:2). 오늘 우리도 교회당에 모여 예배는 자주 드리고, 입으로는 주님을 찾지만 마음은 멀지 않은지 마땅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며 세상을 향한 증언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예배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예배는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며, 초월에 대한 승인이며, 하나님의 자유활동에 대한 우리의 전적인 의존이다.” 예배는 오늘도 우리가 성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창조주시며 이 세상 역사의 주인이시고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고 인정하며, 그 하나님을 만나며 찬양하고 경배하고 감사하면서, 그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며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오늘 아침 본문 요한복음 4장 22절 이하에서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과 대화하면서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배는 드리지만 왜 예배를 드리는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방 종교에서 이방인들이 드리는 제사(예배)는 귀신들(다이모니오이스, 즉 to demons)에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10:20). 참 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귀신에게 드리는 줄도 모르고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끔직한 일이며,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 주위에서 보면 과학문명이 발전된 21세기에 아직도 삶은 돼지머리를 갖다놓고 거기에 절하고 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영적으로 무지하고 불쌍한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언덕을 방문했을 때, 그 주변에 많은 제단들이 있는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도 보았다고 합니다(행17:23). 옛날에만 있던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안다고 하지만, 혹시라도 알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는 경우는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예배는 “장소”가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은 참된 예배와 본질적인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육신하셔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그 곳이 진정한 예배의 자리이고 그 곳이 교회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알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가축을 제물로 잡아 그 피를 드리는 모세의 율법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와 만민의 죄를 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자신의 피를 흘려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 예배를 폐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배의 진정한 본질을 확증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히7:27-28;9:11-14;10:10-18). 그래서 우리는 이제 바울 사도가 로마서 12장 1절 이하에서 전하는 말씀대로, 더 이상 죽은 제물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 세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첫째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NLT: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둘째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선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참 예배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과 삶의 변화와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4장 23절로 가서 보면, 예수님은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영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영과 진리로)”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엔 프뉴마티 카이 엔 알레데이아, in spirit and in truth)”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이해하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수가성 여인이 한 번 더 물어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영안에서 그고 진리 안에서”드리는 예배입니까? 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없고, 수가 성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 그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찾아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안에서 예배드리라고 한 것은, 바꾸어 표현하면 예배는 하나님(즉, 영) 안에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는 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고,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참된 예배는 내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없는 예배는 잘못된 예배입니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안에”라는 말씀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요14:20;15:4;17:21 등).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키며(요14:6), 진리는 언제나 빛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요1;4 이하).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기본 정신은 이미 구약 레위기의 제사법에서도 드러나 있는 원리입니다. 특히 레위기 1-7장에 있는 레위기 5대 제사는 “예수님이 말씀한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이 레위기 5대 제사법에 나타난 예배의 정신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의 예배와 연결하여 잠시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모세 율법인 레위제사법의 첫째는 번제입니다. 번제는 예배자가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잡아서 제사장이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 제물을 제단에서 완전히 불살라 연기로써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제사입니다. 피를 뿌리는 것은 죄(원죄)를 사하는 의미입니다. 번제의 핵심은 대신 희생을 당한 제물을 통해 예배자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자의 자기위탁이며 자기부인의 정신입니다. 나와 내게 속한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며, 나의 주인이라는 고백이고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번제의 제사를 온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하는 예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영안에서” 즉 하나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의미이며, 번제의 예배입니다. 번제의 예배는 내가 주인노릇 하던 삶에서 이제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배정신이 오늘 우리의 예배에서도 살아있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는 소제입니다. 소제는 가축을 제물로 드리는 피 제사가 아니고, 곡식이나 처음 익은 열매를 예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의 제물로는 특히 “고운 밀가루”를 드리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밀가루로 만든 빵(떡)을 드리는 것이 소제의 핵심입니다. 소제의 정신은 그러므로 예배자가 마치 고운 밀가루가 되고 떡이 되는 것 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요6:35,51). 소제는 바로 성육신의 제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본받아 이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소제는 자기희생과 봉사의 정신입니다. 소제의 예배는 그러므로 이기주의적인 삶에서 이타주의적인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진리 안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과 진리 안에서”드리는 예배는 무엇보다 번제와 소제의 정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번제와 소제는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예배의 가장 기본이며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모든 헌신예배는 사실 번제와 소제의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레위제사법은 때에 따라드리는 다른 세 가지 종류의 제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번제와 소제에 따라오는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화목제는 감사할 때와 서원이 이루어 졌을 때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화목제의 특징은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으로 제물을 드린 후, 남은 제물을 가지고 가족과 이웃과 함께 잔치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정신은 나눔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복과 은사와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얼마나 나누어 주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누는 삶이 곧 예배라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사도행전의 교회가 부흥한 비결 중에도 서로 나눔이 있었습니다(행4:32 이하).

넷째는 속죄제입니다. 속죄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부지중에(육신이 연약하여) 죄를 지었을 경우, 그 죄를 깨달았을 때 속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때로는 원하지 않는 죄를 범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시간에 우리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참 예배자의 태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까지 말했습니다(딤전1:15). 언제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침 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눅18:9-14 참조).

다섯째는, 속건제입니다. 속건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소유나 이웃의 소유를 침해한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율법은 손해를 끼친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 소유주에게 갚고, 속건제물을 드려 그 죄를 용서받도록 하였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의 경우가 이 속건제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 들였고, 예수님의 구원의 선언을 듣고 감격하여, 자신의 소유를 팔아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거나 손해를 끼친 경우에는 4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속건제 예배의 정신이며 예배자의 삶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부모님과 창조세계와 국가와 이웃과 여러분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신세를 지고 빚을 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언제나 빚을 갚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예배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구약의 예언자들이 잘못된 예배에 대해 과격할 정도로 책망한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언자들이 거짓 예배에 대해 책망한 것은 성전에서 드리는 경건한 예배와 일상의 생활이 너무나 괴리된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예배가 일상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 백 번, 수 천 번 예배를 드려도, 예배자의 인격과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경건한 예배의식에는 참석하는데 그 때 뿐이고, 하나님 없는 가정생활, 하나님 없는 직장생활, 하나님 없는 학교생활, 하나님 없는 사회생활, 하나님 없는 경제생활, 하나님 없는 정치생활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예배고, 이런 것이 거짓 예배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늘 21세기 현대 예배를 위협하는 네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사상과 함께 침투하는 이방 종교들의 영성과 예식의 영향입니다. 예컨대, 우리 한국교회 예배에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들과 불교나 유교적인 요소들이 침투하고 있거나 침투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스라엘의 예배에는 바알 종교가 언제나 큰 위협이었고, 신약시대 이후에는 영지주의 사상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신앙과 생활이 유리된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생활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구별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알지 못하고 드리는 습관적인 예배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왜 예배를 드리는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모르고 드리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예배자의 신앙성장과 생활의 변화가 없거나, 너무 느리게 진행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예수 믿는 다는 것,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세속주의의 영향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예배도 오늘 21세기 세속문화의 한 유형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배도 오늘 현대인의 취향과 입맛에 맞도록 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예배의 요구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가 현대인의 종교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된 예배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기의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든지, 하나님이 싫어하고 미워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되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마다 다소 긴장감을 느끼고, 어느 정도 위기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하나님이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는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드리는 예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는 예배순서나 형식이 큰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배자의 정신과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예배가 아니라, 예배자의 인격과 일상의 삶을 통하여 죄에 매여 종노릇 하던 과거에서 돌아서는 새로운 변화가 있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예배자의 삶이 빛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예배를 드리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히브리서 13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시69:30-31 참조).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호14:2 비교). 오직 선을 행함(여기서는 특히 친절한 언행)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예배)를 기뻐하느니라.” 여기서 찬송은 예배순서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러한 일상의 찬양과 평소에 친절한 언행과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된 예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바르게 되면 , 우리 가정도 바르게 되고, 우리 교회, 우리 학교, 우리 사회, 우리나라도 바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출처 : http://pcts.ac.kr/suggestion/sub_2_1_view.asp?seq=259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중의 하나는 공의의 하나님이고 정의의 하나님이신 분이 어째서 악이 창연한데도 내버려두시느냐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악의 발생 문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벌하면서 하나님이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악을 행합니다.

사사기 2장 2절에 보면
2: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 주민과 언약을 맺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악에 해당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2장 23절에 보면 다른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2: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 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신 것이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 민족들을 쫓아내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쫓아내지 않은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는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은 능히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 민족들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2장 2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를 지켜 행하나를 보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에 대한 행동은 처벌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을 바로 처벌하실 수도 있고, 선을 위한 하나의 교훈의 목적으로 도구로 사용한 다음에 처벌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사단을 이용하시는 모습도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악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처벌받게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사단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영원히 처벌 받아지는 운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처벌하실 수도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또는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는 권리도 있으시고 그 때문에 처벌을 시행하는 순간을 유예하실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악은 처벌받으니 정의는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주변에 악인이 오랫동안 존재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면 바로 처벌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이 발생한 곳을 선으로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인간이 악을 범하고 인간이 망쳐 놓은 곳을 하나님은 회복시키시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셨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철저히 죄와 악은 하나님 아닌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런면에서 쓰나미나 이라크 전쟁 같은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쓰나미를 일으키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국을 통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절대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의 죄악이 이런 사건들의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쓰나미라는 자연재해도 인간이 환경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자연적 질서에 의해 발생하게 됩니다.
이라크 전쟁도 사람의 탐욕 등의 이유로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의 발생을 안타까워 하시고 그것을 선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이런 논리에서 해석해야지
그 곳에 지금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니까 그것의 원인조차 하나님이 일으키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 엉성한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심판은 최후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의 심판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가 바로 은혜의 시대인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라 심판이 바로 임할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성찬

 

고린도전서 10:16-17 공동번역

10:16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0:17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최고의 식탁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도 이 질문에 생각해 보면서 나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식사 자리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 나서 저는 색다른 경험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학부모들과의 식사자리였습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저는 모든 것이 새로운 자리였습니다. 그 때 쇠고기를 구워먹었는데, 아마 굉장히 좋았던 쇠고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입에서 살살 녹는 쇠고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자리를 최고로 칠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최고의 식사자리였다고 기억되는 것은 어머님이 차려주신 식사자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난주에 사정이 있어서 고향집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고향에 가면 참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손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어머님께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들여 준비하시고 온갖 과일들과 맛있는 것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저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며 tv도 보고 있고, 책도 읽고 식사가 차려지면 우와 하는 탄성과 함께 이 모든 음식을 먹습니다. 먹고 나면 설거지도 어머님이 다 해 주시니 그야말로 기분 최고인 식탁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찬에 대해서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빵을 떼는 것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잡히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베푸신 그 성찬은 참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도 일년에 여러 번 성찬식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잘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찬은 하나님 은혜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 지성소까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차례(횟수로는 4번정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성경에는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식서인 <장로들의 유전> <미쉬나>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하여 이런 규칙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되고 첫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지성소 법칙을 몰라서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발목에 끈을 매고 들어 가야 합니다. 혹시 죽으면 잡아 당겼습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자기를 정결하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는 하나님의 절차가 아닌 다른 절차를 따라 들어갔을 땐 죽게 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선 엄청난 정도의 거룩함과 성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고 하셨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동안 정결케 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보았지만, 제사장들과 기타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결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보았다가 존재가 멸망당하는 위험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기드온과 같은 여러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자를 만날 때 내가 죽게 되었다고 걱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다른가? 구약에서는 율법을 주시면서 지킬 것을 말씀하시는 어찌보면 하나님은 두렵고 공포의 대상인데,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을 과감하게 버리고 신약에서 나오는 참 사랑의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사에서 이단의 한 형태로 나온 주장이기도 하며 오늘날에도 여러 이단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에는주어진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다음의 것을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은혜와 배치되지 않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먼저 은혜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면서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집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사건입니다. 율법보다 먼저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왜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는가에 대한 부분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필요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다음의 것이 하나의 큰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자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따르면 얼마나 좋을까요?

솔로몬은 젊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고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하며 잠언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자기가 아는 대로 그대로 실천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전도서 2장 3절에는 솔로몬이 인생을 헛되게 보낸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3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하여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하였고 하나님이 지혜를 줍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서 궁금함이 많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일까? 이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까? 더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없을까 하고 자신을 술로 즐겨보기도 하고 부로 즐겨보기도 하고 각종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기쁘게 한다는 것으로 자신을 채워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늘그막에 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전도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서 12장 1절에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늙어서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겠다고 결론 내리는 것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봤으니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지, 인생에 참된 의미를 주는지를 깨달으라고 솔로몬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그 생활이 최고임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선택을 능히 압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 때 그것이 진짜 기쁨을 주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한국의 남자들은 나이가 되면 국방의 의무를 지게 됩니다. 신기한 것은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기전이나 갔다 온 후나 부모님의 사랑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변함없이 자식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시고 정성들여 자식들을 섬겨 주셨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부모님께서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기 전까지 부모님의 사랑을 모르고 군대에 가서 정말 고생하며 인간적인 대접을 잘 못 받고 명령으로 사는 군대라는 조직사회에서 부모님을 생각해 보니 얼마나 헌신적이었고 사랑이 많으셨는지를 느끼게 되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많은 젊은 청년들이 결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대하면 부모님에게 잘해야 겠다 이런 것입니다. 떠나봐야 받았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다시금 결단하게 됩니다.

이제는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자신의 힘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니었음을 가르쳐주는 도구로, 또한 하나님이 그냥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가르쳐주는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로마서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기독교의 은혜를 가장 잘 표현한 비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떠나 탕자가 방황하다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먼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탕자가 떠나도록 재산을 떼어 줬다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는 능히 자신의 재산을 당장 주지 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 안 듣는 자식에게 앞으로 영원토록 재산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재산을 떼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보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식이 떠나봤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더욱더 알 수 있기 때문이며, 사랑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어머니께서는 저의 잘못된 점을 고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제가 잘못했을 때 바로 벌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참 많이 맞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쩔 때는 제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내버려 두신 적이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선 아주 따끔하게 혼이 났습니다. 왜 시간을 두고 벌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을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참으시고 벌을 보류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바로 주어졌을 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율법을 통해 인간이 처절하게 자신이 한계를 가지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교훈으로 삼기 위해 구약의 그 오랜 기간들을 하나님은 끈기를 갖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느낄 기간을 찾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 아주 오랜 기간이 흘렀습니다. 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될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이후에 바로 은혜의 결정적인 순간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일방적으로 베풀어졌지만, 인간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겠다고 에덴을 뛰쳐나갔고, 또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도 완전함으로 깨끗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힘들게 살았던 시간들 속에 그것이 인간의 총체적인 실패임이 드러났을 때, 바로 은혜의 완전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세워두신 율법의 원칙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 지키고 나아가려고 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 한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 모든 한계를 깨뜨리시고 예수님의 식탁으로 사람들을 조건 없이 초대하였고 어떤 노력도 없이 예수님이 베푸신 그 정성스런 식탁아래서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탁에 참여한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세리 삭개오도 율법으로는 절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지만, 예수님이 뽕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내가 너의 집에서 같이 식탁을 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은혜의 자리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들과 함께 하셨고, 가난한 자들, 창녀들과도 같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짐들을 대신 지시고 용서하시고 그들과 식탁을 같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탁이었던 최후의 만찬의 순간으로 돌아가보려고 합니다. 흔히, 최후의 만찬 그 자체만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최후의 만찬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된 줄 아시고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시면서 바로 행하셨던 것이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시면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위해 준비하신 것들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끝까지 이 사람들을 사랑하겠다. 마지막으로 발을 씻겨 주고 떡과 포도주를 통해 나의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그리고 나서 14장에는 그냥 이 사람들을 세상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어 항상 같이 있게 하겠다. 얼마나 따뜻합니까? 저는 이 식탁을 생각할 때마다 어머니의 식탁이 떠오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처음과 끝이 되신 하나님 항상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태초 전 부터도 우리를 향한 이 예수님의 식탁 준비와 같은 사랑을 하셨으며 지금도 동일하십니다. 단지, 우리들이 그 사랑을 거절하고 이해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그 품을 떠나갔을 뿐입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이나 신약에서의 하나님이나 같은 분이시고 태초부터 우리를 향한 은혜를 표현하신 분이셨으며, 율법이라는 과정을 지나는 동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계획하신 분이셨습니다.

[히13:8]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순종하므로 그들이 40년동안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그 벌을 내리시고 하늘 위에서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벌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계시며 광야를 지나시는 모습을 신명기 2장 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보통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벌을 주는 경우 교사는 그 벌을 같이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벌로 40년간을 광야를 헤매게 하셨지만,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계시며 40년 지난 후에 내가 다시 함께 가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40년간의 광야의 방황을 같이 담당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모습과 오버랩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들이 자신의 죄악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육체로 이 땅 가운데 자신이 직접 그 모든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르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분명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오래 참으시는 그 사랑이 공의와 정의보다 더 크므로 우리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 놀라운 식탁으로 하나님의 초대가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획되었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품에 안겨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의 떡과 포도주를 받아 마시며 감사함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식탁을 베풀어 주신 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을 인간들에게 하셨습니다. 죽음으로 사랑을 세상 끝날까지 표현하시고 그 사랑을 알기를 마지막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얼마나 더 하나님이 무엇을 하셔야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아니하고 받아들이게 될까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을 통해서 마지막까지 사랑을 표현하셨는데 아직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찬식에서는 어떤 사회적 지위나 성별이나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떡과 포도주가 나누어집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은혜의 식탁입니까?

이 은혜의 식탁, 사랑의 식탁, 인간을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의 준비를 기억하고 사랑의 준비 후에 십자가 지신 그 끝없는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그 성찬의 식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복이 한량없이 임하는 놀라운 하나님과의 두려움 없는 교제의 자리인 것입니다. 기쁨의 자리인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와 하나님과의 어떤 장막도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임해야 할 것이고, 우리 삶 가운데도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전에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또 하나의 식탁을 살펴보며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요한복음 21:9-13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1:9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21: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 오너라."

21:11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21:12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21:13 예수께서 가까이 와서 빵을 들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또 생선도 주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가 어부였던 사람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못 잡고 날이 밝았을 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정말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제서야 주님인 줄 알아본 제자들이 육지로 올라가 보니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생선과 빵을 구워 놓고 아침을 준비해 놓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빵과 생선을 집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식탁입니까? 예수님이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언제나 은혜로 섬겨주시는 어머니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그 정성과 섬김의 자리, 이 자리로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식탁에 아무런 조건없이 감사함으로 참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그냥 일방적으로 베풀어두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사랑의 식탁으로 초대하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며 사랑한다 말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외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고 풍성함의 길인지를 깊게 알기를 원합니다. 방황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평생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겨서 그 사랑을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자로, 주님의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의 식탁에 같이 참여할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말씀을 통해 생각하는 삶

고린도전서 10장 15절

나는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어느 집회에 한 모임에 아멘녀가 있었습니다. 신일 형제가 절 보고 된장남이라고 부르듯이 성별에 따라 차별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아멘녀는 집회에서 목사님이 설교 할 때마다 아멘 아멘을 말합니다. 뭐 다 같이 아멘이라는 말로 화답할 때는 괜찮지만 목사님이 뭐 한 마디 꺼내면 다 아멘합니다. 정말 귀에 거슬려서 예배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 누가 입에 지퍼를 닫을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틀린 이야기를 해도 아멘, 농담을 해도 아멘.

 

 국어사전에는 아멘이라는 뜻을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듣고 자기 머릿속에 동의가 된다고 생각했을 때 그 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때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의 문제점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생각 없이 아멘을 남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 없이 아멘 아멘을 남발하니까 삶에서 변화가 없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오해 중의 하나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믿으라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러려면 무엇 때문에 이성을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공중의 나는 새를,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셨습니까? 오해 중의 하나는 예수님은 논리적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굉장히 논리적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마가복음 3:22-27절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예수님보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것이다라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나라가 분쟁하면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라는 논리로 공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냉철한 지성과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율법사 하나가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형식에 얽매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마음과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얼마나 생각이 많으신 분이셨겠습니까? 우리 안에도 이런 태도가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묻고 또 물어도 귀한 질문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는 이성적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정말 이성적인데 비해 기독교는 이성적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같이 이성을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걸 싫어했던 세대가 또 있었을까요? 다들 경험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대학을 봐도 그렇습니다. 철학과 물리학이라는 과목이 인기가 있습니까? 신대원에서도 조직신학이라는 변증학이 별로 인기가 없고 다들 실천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관심이 있으며 경험하는 것에 초점이 많습니다.

 

  SBS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다큐에서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술집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비추면서 한 사람과 인터뷰 했습니다. 왜 교회를 안다니냐? 그런데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성적이지 않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뭔가 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유럽 청년들이 불교나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기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반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자기가 정말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의 기쁨을 누려 본 다음에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 때의 기쁨과 비교해야 합니다. 전자를 경험해 보지도 못하면서 후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다가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 충만하여져서 세상의 기쁨이 아무것도 아니었노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왜 그런 것들은 살펴보지 않습니까? 다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쪽만 생각해 보고 다른 쪽은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이성은 결단과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삶에서 변화를 일으킨 것들이 있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졌습니까? 어떤 것에 도전 받아서 나의 삶을 생각해 보니 그것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이 바뀔 수 없겠구나라는 철저한 인식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이성을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받고도 단지 감정적으로만 반응하고 정말 그것이 나한테 필요함을 뼈저리게 인식하여 이렇게 해야 겠다라는 결심으로 나가는 이성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지를 일으키는 것은 이성의 명령에 의해서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읽을 때 왜 그런 말씀이 있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설교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아멘 하지 마시고,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 담긴 말씀인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교회에서 상처 받았다고 하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이성을 사용하지 않아서 넘어졌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어서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면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걸 못하니 상처받습니다. 무너집니다. 쓴 뿌리가 생깁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더라도 분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것을 분별하기 위해선 여러분은 말씀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참 신기한 현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선교 단체에서 훈련 받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겠는데, 훈련이 끝난 다음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 잘 안 들린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왜 옛날 초대 교회 시절에는 병자들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오늘날에는 조금밖에 안 일어나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린다고 뜻을 모르겠다고 방황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럼 다음과 같은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면서 광야에서 오랫동안 생활 했습니다. 먹을 물도 없고 양식도 없었습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무슨 양식을 많이 준비해 나왔겠습니까?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 했습니다. 그럼 먹을 것과 물은 어디서 구합니까? 아무것도 없는 광야 생활을 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구할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또는 전쟁을 해서 전리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공급하는 방법을 주된 방법으로 채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공급자 되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5:12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5: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만나가 그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해에 땅에서 나는 소출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병 고침의 기적들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병원이 없는 곳입니다. 치료 수단이 없는 곳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재정적인 공급이 가장 잘 채워지는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경제적인 것을 도무지 채움 받을 수 없는 곳입니다. 방글라데시에 갔더니 제자훈련 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무슬림 국가라서 도무지 크리스쳔들에게 경제적 뒷받침을 해 줄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놀랍도록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하나님의 음성이 명확하게 들려지는 곳은 어디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없고 위험한 지역에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린다고 말하십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 놓은 책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면 왜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이 사용해서 먹으라라고 말하는데 아직도 만나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소출물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알 수 없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생각하여 보라, 말씀을 통해 이 분이 진정한 구원자가 아닌가 생각하여 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이 예언한 분이 바로 이 분이다라고 여러 증거를 대며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메시야는 아직 안 오셨어라고 말하며 다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제외시켜 놓고 어떤 다른 말씀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바울도 이 세상에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상고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날마다 성경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헬라인들의 관심은 지적인 곳에 있었습니다. 남자도 그 당시에는 지적 교육을 받은 대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해마십시오. 믿음은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이성을 사용하면 사용할 수록 우리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성 사용의 최종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즉, 인간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잘난체를 하는 것이지, 진짜 이성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파스칼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종착점은 이성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정말 신이 존재하고 신이 가르쳐준 종교라면 다음과 같은 것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신이 완전해야 하며 신의 길, 신이 제시해 주는 길 또한 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신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겠지요? 인간이 범하는 범죄적인 것들을 신이 행한다면 신이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그것이 완전하고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신명기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 종교가 보면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악한 행동을 하도록 권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런 종교들은 한계가 있는 인간이 만든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이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리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다면 무슨 신이겠습니까?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것을 반증하지 않겠습니까?

 세계사를 읽어보면 문명의 시작에 대해서 나옵니다. 큰 강 근처에 인류는 문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량을 조절하지 못해 농사가 잘 될 때도 있지만 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그 유량을 조절해 줄 절대자 즉, 신들을 만들게 됩니다. 물의 신, 바람의 신, 농사의 신 등등을 말입니다. 윤회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한국 기독교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김용옥 교수의 책입니다.)이라는 책을 보면 윤회 사상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곡식들이 자라고 없어지고 또 시간이 지나면 곡식들이 자라는 것을 보며 자연은 순환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윤회 사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나옵니다. 이해 되지요? 내가 이해하는데 인간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심지어 세계의 유명한 신학 대학원 교수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삼위일체도 아직까지 이해되지 않는 교리이며,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라는 것도 정확히 설명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모든 인간의 이해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 있어야 진짜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2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하시고 있습니다.


 지혜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스스로 판단하여 보십시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예수를 믿어도 난 왜 예수를 믿는가? 예수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견고한 반석 가운데 서게 됩니다. 또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고 결론을 내리시며 그대로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줄 것입니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지금 저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가지고 명확하게 주의 뜻을 이해한다면 저는 과감히 그것을 행할 것입니다.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저에게 괴로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도 일주일 동안 싸워보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게 새겨 보십시오. 삶을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매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성경은 이 시대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답을 내리고 있지 않다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과감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있는 자들아,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생각하여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혜있다 하면서 쓸 데 없이 다른 일을 생각하느라 정작 하나님 뜻을 생각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일에는 잘 생각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5절을 읽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기도하며 생각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통해 주의 뜻을 발견하며 실천하길 원하오니, 우리 가운데 주의 지혜로 채우시고, 주의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게 해 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특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를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차를 타고 다니면 극동방송을 자주 듣게 된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가 많은데, 듣다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많다. 그들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고 정죄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애정이 있다. 말씀을 균형있게 가르쳐서 좋은 영향력들을 주길 바란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무지 요구되는 것이다. 나 자신도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며 그렇게 살지 못하기에 항상 하나님께 눈물나도록 죄송스럽다.

한 목사님의 설교를 몇 번 들었는데, 이 분은 우리나라에서 강해설교를 가장 잘 하기로 유명하신 모 교회의 목사님이다. 최근 몇 번의 설교는 십일조와 관련된 것이었고 헌금과 관련된 것이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철저하게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난 왜 사람들이 말씀을 균형있게 못 보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내 것이라고 말할 때 여러 가지가 있었다. 십일조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그런데, 다른 것의 비중이 훨씬 큰데, 십일조에 대한 부분이 하나님이 내것이라고 말한 가장 큰 것처럼 말씀을 곳곳에서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심스럽다.
하나님의 관심이 물질에 있었는가?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었다. 창조때에도 인간을 위해 모든 자연을 만드시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노아의 홍수때도 인간이 잘못하여 창조의 모든 것도 같이 멸망당하였다.

아래는, 하나님이 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하신 것을 성경에서 찾은 것이다. 이 외에도 더 있다.

 

Mine이라고 나와 있는

[Ex.13:2]Consecrate to me all the firstborn; whatever is the first to open the womb among the Israelites, of human beings and animals, is mine.

[Ex.19:5]Now therefore, if you obey my voice and keep my covenant, you shall be my treasured possession out of all the peoples. Indeed, the whole earth is mine,

[Ex.34:19]All that first opens the womb is mine, all your male livestock, the firstborn of cow and sheep.


[Lev.20:26]You shall be holy to me; for I the LORD am holy, and I have separated you from the other peoples to be mine.

[Lev.25:23]The land shall not be sold in perpetuity, for the land is mine; with me you are but aliens and tenants.


[Num.3:12]I hereby accept the Levites from among the Israelites as substitutes for all the firstborn that open the womb among the Israelites. The Levites shall be mine,

[Num.3:13]for all the firstborn are mine; when I killed all the firstborn in the land of Egypt, I consecrated for my own all the firstborn in Israel, both human and animal; they shall be mine. I am the LORD.

[Num.3:45]Accept the Levites as substitutes for all the firstborn among the Israelites, and the livestock of the Levites as substitutes for their livestock; and the Levites shall be mine. I am the LORD.

[Num.8:14]Thus you shall separate the Levites from among the other Israelites, and the Levites shall be mine.

[Num.8:17]For all the firstborn among the Israelites are mine, both human and animal. On the day that I struck down all the firstborn in the land of Egypt I consecrated them for myself,


[Ps.50:10]For every wild animal of the forest is mine, the cattle on a thousand hills.

[Ps.50:11]I know all the birds of the air, and all that moves in the field is mine.

[Ps.50:12]"If I were hungry, I would not tell you, for the world and all that is in it is mine.

[Ps.60:7]Gilead is mine, and Manasseh is mine; Ephraim is my helmet; Judah is my scepter.

[Ps.108:8]Gilead is mine; Manasseh is mine; Ephraim is my helmet; Judah is my scepter.


[Is.43:1]But now thus says the LORD, he who created you, O Jacob, he who formed you, O Israel: Do not fear, for I have redeemed you; I have called you by name, you are mine.

[Is.66:2]All these things my hand has made, and so all these things are mine, says the LORD. But this is the one to whom I will look, to the humble and contrite in spirit, who trembles at my word.


[Ezek.16:8]I passed by you again and looked on you; you were at the age for love. I spread the edge of my cloak over you, and covered your nakedness: I pledged myself to you and entered into a covenant with you, says the Lord GOD, and you became mine.

[Ezek.18:4]Know that all lives are mine; the life of the parent as well as the life of the child is mine: it is only the person who sins that shall die.


[Hag.2:8]The silver is mine, and the gold is mine, says the LORD of hosts.


[Mal.3:17]They shall be mine, says the LORD of hosts, my special possession on the day when I act, and I will spare them as parents spare their children who serve them.

하나님이 내 것이라고 말할 때 가장 빈도있게 말한 것은 사람이었다. 너희들은 내가 창조한 사람이다.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다. 이 점이 가장 많이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너희가 가진 모든 것들도 내가 준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섬기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살고 자기가 가진 것이 다 자기 것이고 자신 존재 자체도 그냥 생겨난 존재라고 믿고 살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이 내가 만들었으니 나를 따르는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무엇을 바치라는 의미보다 너희는 나의 백성임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더 가까운 것이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가장 큰 의미였다. 십계명의 첫 계명처럼 말이다.
십일조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왜 십계명에 십일조 내라는 이야기가 안 들어가 있는가?
십일조는 하나님 것이라고 십일조 바치라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교회를 운영하는 데 있어 돈이 필요하다고 이야기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구제나 사역자들 사례에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십일조 자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부터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별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인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p.s.
이런 맥락에서 사역자는 교인들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그들을 섬겨야 한다.

고린도전서 10:11-14절

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영지주의는 고린도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영지주의 요소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가 고린도 교회 당시의 가장 강력한 이단적인 요소였듯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영지주의적 요소가 가장 강력한 이단적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결국 육과 영을 분리하여 영적인 것에만 모든 관심을 두던 사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육에 관련된 것들은 경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바울은 우리의 삶도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육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요소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단지 형상일 뿐이지, 영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영과 육을 분리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육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왜 하나님은 육이라는 것을 정성들여 만드셨겠습니까? 그리고, 왜 육이 존재하는 역사라는 공간가운데 두셨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육을 왜 입으셨겠습니까? 또한 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육을 입으셨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또한 부활 할 때 육을 입을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에는 육은 영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도 영적인 것만 소중하게 여겨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몸과 관련된 것들, 역사 같은 것에 관심이 없거나 소홀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태도는 영지주의적 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두 가지의 선택이 우리 가운데 던져져 있습니다. 하나는 올바른 믿음의 본을 보이는 것이고, 하나는 믿음에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데까지 자라길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도 버려지길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4:5-7절에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따르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다라고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34: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34: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 첫 번째의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밝히신 하나님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해서 자비롭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고 은혜롭지 아니하고 화를 잘 내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입니다. 두 번째는 벌을 면제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보이신 것을 요약하면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이유는 어떤 사람도 멸망하길 원하시지 않고 생명의 길로 오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6장 9-11절을 읽으면서 기억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죄인들이 정죄당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다시금 새롭게 되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계속해서 부인하고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멸망당하는 일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니느웨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얼마나 잔인한 사람들이었습니까? 니느웨는 바벨론의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무자비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가르고 사람들의 목을 베어 창 끝에 꿰어 놓는 등 그 잔학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은혜로우신 것을 알고 그곳에 가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마음이었겠지요. 니느웨는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회개는 일시적인 회개였습니다. 결국 나훔서에서 보듯이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께 돌아올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부인하고 그 분께 마음을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불현듯 임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30에는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직접적인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은 과거 이스라엘에게 행했던 것 같이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주님의 재림의 날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 때까지, 또는 우리가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떠나는 그 때까지 우리를 오래 참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시고 자비가 많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역사가 반면교사가 되었습니다. 반면교사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다른 사람이나 사물(事物)의 부정적(否定的)인 측면(側面)에서 가르침을 얻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끝끝내 돌아오지 않을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에 귀를 기울이시겠습니까? 아니면 끝끝내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반면교사로 남겠습니까?


제가 다니는 신대원에 참 훌륭한 교수님이자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저희 학교는 일주일에 네 번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 때, 여러 교회의 목사님들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렇지만 모든 말씀이 다 성경에 바탕을 둔 말씀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랑을 늘어 놓으시는 분도 있으시고, 어떻게 교회 성도들의 숫자를 늘리셨는지를 말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시지 않는 일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어려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님은 이런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배울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한 가지는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들을 배우려고 하고, 만약 설교에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반면교사로 삼으면 된다는 취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무장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성숙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무언가 안 좋은 것을 보았을 때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고 교회는 이런 곳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면 안되겠다라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참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그 분들입니다. 우리야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으면 되지만, 그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이제는 우리가 힘써 배워야 할 것 즉, 그리스도인으로 무엇을 본을 보이면서 살아야 되는지 말해 보겠습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라고 하여서 어떤 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절하지 않는 것만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중에 많은 분들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는 그런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게 됩니다. 그것은 다른 신이 아니었고 그들이 하나님이라는 신을 금송아지 형태로 만들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우상 숭배를 혹시나 하지 않고 있습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내가 만든 이미지에 국한시키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를 위한 도구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우상 숭배는 우리가 평생 싸워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설교 시간에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상 숭배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그 영향력들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우리가 더욱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우상들입니다.

이 우상에게서 피하라라고 14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피하라라는 원어적 의미는 도망치라에 가깝습니다. 그만큼 우상 숭배의 영향력이 심각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개척한 이재철 목사님의 이야기를 얼마 전 서점에서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두 가지에 참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며 교회 가운데 만난 모든 사람들과의 교제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겸손한 자세였습니다.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다고, 심지어 어려운 상황에서나 자신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큰 복이었음을 고백하는 태도였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을 교회에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히려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큰 특권이 있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안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참 부끄러움이 많았습니다. 동막교회 청년부를 맡으면서 제 안에 많은 기쁨이 있었지만, 때로는 무언가 제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듯하여 답답해 하며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축복의 통로임을 잊어버릴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다 날 정도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우리 앞에 상황을 보면서 그것들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 감동 받은 것은 교회 이름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회 이름은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었다가 교회 공동체의 어떤 사람의 영향력이 커져서 주님의 교회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교회가 되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임기를 딱 10년으로 못 박고 10년이 지나면 교회를 떠나기로 하면서 사역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읽은 책도 10년이 지났을 때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눈 것이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참 본이 되는 목사님 중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우상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게 될 까봐 이 모든 것들을 계획하며 실천하며 산 분이었습니다. 저도 그런 뜻을 생각해 보며 저 또한 이재철 목사님을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지 아니하기 위해 과감하게 그 책을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책들도 있지만 그 분의 책을 더 읽으려는 욕심을 내려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 이재철 목사님을 우상으로 만들려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어떤 우상을 우리는 섬기고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의 설교만 들어야 은혜가 되고 다른 분의 설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그 목사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 예배에만 참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또한 그 교회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어느 자리에서나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의 동기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어떤 큰 모임에 스타이신 한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돌아가면서 설교자들이 와서 말씀을 전하는 이 모임은 이 분이 설교하실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리고 인지도가 별로 없는 분이 말씀을 전하실 때는 자리가 많이 빕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우상 숭배의 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이지, 어떤 상황을 즐기는 자는 아닌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장 20절에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12절에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 자신이 돋보이려고 하고,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 우리의 삶이 움직여지고 공동체가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우상 숭배에서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해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다른 이미지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인 로마 압제에서 벗어나게 할 분으로만 인식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바로 너희들이 원하는 이런 왕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리를 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미지에 부합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도 바로 우상을 섬기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은 4장 8-9절에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권세를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들 단호히 배척하면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0일 광야에서의 우상 숭배와 관련된 이런 사단의 시험은 40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평생의 삶을 통해서 사단은 계속 이렇게 속삭입니다. 죄인을 대속하는 역할이 아니라 정치적인 왕이 되라고, 너의 능력을 보여서 사람들을 굴복시키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7장 40절에 예수님보고 사람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사실 때 평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고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다른 이미지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과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이제 우상 섬기는 문제에서부터 우리는 자유이고 절대 우상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음이 혹시 있으십니까? 예수님처럼 우리는 평생의 삶 가운데 똑같은 말을 사단으로부터 듣게 되고 마음 속에 우리가 주인으로 섬기는 예수님 외에 다른 것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우상에서 벗어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말씀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우리의 편견을 내려 놓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가 원하는 말씀만 듣는 것도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헌금을 강조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헌금을 못할 때 우리의 마음은 왠지 죄책감을 느끼고 자유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너희가 정작 헌금을 하면서 진짜 중요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하면 죄책감이 없고 헌금을 못하면 죄책감이 있으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더 죄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들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상의 한 형태인 것입니다.

저는 이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강력한 우상은 바로 물질의 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는 물질적인 것이 해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지배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회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함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예레미야 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 문제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땅을 산다면 어찌 불의가 판치며 물질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하여 그 사람을 예수님보다 더 신뢰하는 이상 우리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만의 주가 아니라 모든 만물과 모든 사람의 주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이 이 나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도록 기도해야 하지, 어떤 사람이 주가 되도록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역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이었습니다.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단지 일본을 향한 애국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장로교 총회에서 결의(1938년 9월10일 장로교 역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하였고 많은 목사님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하였습니다. 분명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우상숭배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은 우상숭배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신사참배를 거절하다가 죽임을 당한 주기철 목사님의 사례를 아실 것입니다. 신사참배한 목사님들을 맹비난한 목사님들이 장로교의 한 분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참 재밌는 것은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셨을 때 자식들이 갈 곳이 없어서 그 분파의 목사님들을 찾아가서, 자기들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매몰차게 거절당해서 주기철 목사님의 자녀들은 이리저리 방황했다고 합니다. 장로교 통합측의 한경직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참여한 것을 일생동안 참회하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모든 것 되신다고 고백하며 죄인의 심정으로 사셨습니다.("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1992년 당시 영락교회 원로 목사이던 고(故) 한경직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자리에서 이처럼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주기철 목사님의 자녀들을 매몰차게 쫓아냈던 그 분들은 우상숭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우상숭배인 자기 의를 우상으로 섬기고 사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한 잘못은 있지만 자기 의를 예수보다 더 내세우고 이웃 사랑보다 더 내세운다면 그것자체도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을 신으로 섬깁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의 보호자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애굽이라는 나라가 자신들을 바벨론으로부터 지켜줄 보호자라고 애굽으로 가자 애굽을 중시하자라고 말하고 있을 때 선지자들은 애굽이 너희의 보호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호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를 도와 준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그 모든 역사 가운데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의 보호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보호자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 인생의 보호자요 반석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이 아니라 나의 구원 나의 반석 오로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에게서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평생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우상 숭배에서 넘어지지 않을까 조심하며 우상 숭배에서 피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 숭배의 덫에 빠져들어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우상 숭배는 모든 죄의 시작입니다. 과거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라는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역하고 다른 것을 따르기로 결정하면서 죄가 들어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다음과 같은 영혼의 고백이 늘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시편 62편의 한 부분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우리의 근원되십니다.

성경을 공부 하면서 곤혹스러웠던 것 중의 하나가 의지와 은혜와의 관계입니다.
의지를 강조하다보면 은혜를 감소시키지 않을까 이런 긴장감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됩니다.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학생부에 끌려와서 선생님에게 매를 맞으면서 가장 황당하고 억울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뭘 잘 못했는지를 가르쳐 주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매를 맞는 것입니다.
어떤 선생님은 이런 이런 점이 너가 잘못했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서 그래서 너는 매를 맞아야 하는 거야, 벌을 받아야 하는 거야 설명을 해 줍니다.
그럴 때 매를 맞는 아이도 표정이 나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면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교사로 가르쳐 주십니다. 너가 무엇을 잘못하지 않았니? 또는 이런 것을 해야 하지 않겠니? 이렇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선 우리의 의지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 되었고 요구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요구되는지를 알고 그 다음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단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슬픈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우리 가운데 잘못한 것이 없고 아무것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떤 음성도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우리의 본성 때문이며 우리가 들을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누군가가 우리가 잘못했다고 충고해 주는 것만큼 감사한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사역자이다 보니 저에게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슬플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분명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저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있을텐데 사역자라는 위치에 있다보니 기회가 많이 줄어드는 것을 느낍니다.
분명 사역자가 아니면 같이 삶을 나누면서 저에게 충고해 주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고 우리가 할 일을 가르쳐 주십니다. 의지를 드려서 고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참 은혜입니다.

정리해 보면
우리에게 의지를 드려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 그렇게 되는 것 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큰 틀 속에 우리의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되지 않겠니라는 의지적 결단을 요구하는데서 자유롭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삶을 고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시구나 감사합니다. 이렇게요. ^^
승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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