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전 글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 특히 가정생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사회적 참여의 중요성을 언급해 보고자 하겠습니다.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 위해선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 필요합니다.
주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에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게 대부분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아,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천시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그저, 특정 계층들을 위한 예수님이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사회적으로도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셨는지, 어려운 자들을 돌보셨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성품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즉, 사회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나타난 행동들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이미지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인들이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무작정적인 비난들도 존재하겠지만, 그만큼 세상의 빛으로 기독인들이 살지 못했던 모습들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 가운데 작지만 소중한 실천을 개인의 삶 가운데, 사회적 참여 가운데 흘려보낸다면 왜곡된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벗어질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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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지나치게 영적인 것에 치중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에 치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가정을 이루고 결혼 생활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특히, 영적인 부분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많이 살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셔야 그 범위 내에서만 인간은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을 해 줘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 가운데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이 바로 가정입니다.

결혼은 남녀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성하고 거룩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결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왜곡된 개념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부부는 아이를 갖게 됩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있어서 헌신적인 사랑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이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더욱더 알고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이 아이에게 가면 갈수록,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도 이보다 더 깊겠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반대로, 아이도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사랑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깨닫게 되며, 영적인 원리,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에,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 깨어지고 자식이 학대 당하는 상태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사랑에 대한 바른 관념을 갖겠습니까?

그래서, 가정이란 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부부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향해 존중하고, 서로를 향해 사랑과 신뢰에 바탕을 두며 희생과 섬김이 있을 때, 예수님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지를 더욱더 깊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를 향한 사랑과 신뢰가 없고, 외도를 한다거나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섬김 희생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남녀가 만나서 하나님 안의 아름다운 교제를 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갖는다는 것은 단순한 남녀간의 하나됨 이상의 영적인 원리와 연결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더 알아가도록 남녀가 가정을 이루도록 만드셨고,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도록 만드셨고, 세상 가운데 영향을 발휘하는 것이 어떤지를 알도록 이 세상 가운데 두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영적인 것이다 육적인 것이다라고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몸은 하나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을 날마다 알아가는 데 힘써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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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 NIV 성경 번역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라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그것이 다 유익하지 않다, 그것에 지배를 받아서는 안된다라는 바울의 논리가 맞서고 있습니다.
생각해 볼 점)
어떤 것이 우리에게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유익하지 못하게 하거나, 그것의 지배를 받는 것들은 없는지?
아주 작은 것에서 부터 시작하면, 가령, 드라마를 열심히 본다. 뭐 이런 것이 그닥 나쁘지는 않지만 너무 많이 보면 유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될 수도 있겠죠. 운동도 마찬가지겠구요. 운동 중독에 걸린 사람도 보았습니다. ^^;;;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중략)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 이것도 12절과 같은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라는 단순화된 논리, 몸의 한 부분이 기능적으로만 존재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몸도 또한 성적으로 자유롭게 관계를 가져도 되는 것으로 그것이 몸의 존재이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몸은 음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를 위하여 있고, 주도 몸을 위하여 계신다라는 논리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14. 하나님이 주를 살리신 것처럼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 이 부분은 몸의 중요성을 언급하기 위해, 몸이라는 것은 단순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도 몸의 부활이 같이 이루어졌듯이, 우리도 부활의 상태에서 몸을 입게 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생각해 볼 점)
우리의 몸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요? (14절부터 20절 사이에)
1. 부활에 참여한다.
2. 성령의 전이다.
3.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4. 값으로 사신 것이다.
5.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몸에 대한 관념과 많이 틀리지요.
창조시에도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아주 정성들여 만드셨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성육신 하셨지요. 몸은 하나님의 성령을 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육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영적인 부분들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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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하나님 안에서 사람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잘 변화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격 또는 성품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더라도 그런 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도 열정은 앞섰지만, 예수님을 잘 부인하고 용기가 없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오순절 성령 이후에 강력한 설교를 회중 앞에서 했지만, 할례를 받지 않던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고 있다가 할례받은 무리들이 오게 되니까 성급히 자리를 떠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에게 책망을 받게 된 내용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울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의욕이 앞서고 열정이 앞서다보니, 자기랑 생각이 틀린 사람들을 잘 품는다기 보다는 같이 사역을 하지 못하고 떠나 보낸 경우를 또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이 나이가 더 들고 하나님 안에서 점점 변화되게 되었을 때, 이전과는 볼 수 없었던 인격적인 성숙함을 보이게 되고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며 사랑으로 감싸 안았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변에서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으레짐작으로 읍박지르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땐 정말 답답하고 미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참고 있자니 속상하고 앞으로 만나지 말까 생각하자니, 예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것이고. 이런 과정들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가장 어려운 것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전하는 메세지가 사람들에게 강력한 도전이 되길 원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는 것은 메세지를 전하는 사람의 인격적인 면에서 감동을 받게 되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메세지에 도전받았다 할찌라도 나중에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떠함을 알게 될 때 받는 상실감이 큰 것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로 부족한 사람을 쓰셨다고 해서 내가 인격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다 다루신다라고 하는 논리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자체가 정당화되지 못한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감정적으로는 그 사람의 인격을 보면서 메세지를 판단하려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마음의 중심을 잘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로 사용되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 세상가운데 우리의 몸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외적 행동이 사람들에 의해서 판단되고 내적인 부분을 추정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깊게 깨달은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더라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항상, 자신의 인격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작지만 시도하는 것 하고, 내가 이렇게 부족하더라도 주님이 쓰시는데, 부족한 부분의 영향력은 주님이 책임지시겠지 이렇게 말하는 것 하고는 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자의 생각을 가진 분들의 의견에 동감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 생각은 즉, 영적인 것만 소중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는 영지주의적 사상에 일부 물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를 너무나 쉽게 생각하지만, 영육 간의 분리의 사고는 우리 가운데 너무나 크게 존재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도 너무나 소홀히 생각하기 쉽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인격이, 우리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영적으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혹은 우리의 외적인 행동이 복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사는 것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기에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주님께 변화되길 원하며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켜 가는 것이지, 은혜가 모든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정당화 시키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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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지 여러 날들이 흘렀습니다.
제 안에 점점 기도가 자연스러워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같이 나누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넓은 마음을 갖기 못했던 모습에서
점점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압박감이 있습니다.
이것이 외식적인 기도이면 어떻하나? 이 기도가 기복적이면 어떻하나?
정작 이런 압박관념 때문에 기도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도 이런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괜히 내 기도, 나의 필요에 대해서 기도하면 죄책감이 느껴지고
뭔가 광범위하고 큰 기도가 없을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점점 기도하지 못하고 기도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경우에 오히려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생각보다 외식이니,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수준에 머무느니를 논할 단계는 아닐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다보면, 점점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지금의 우리의 기도속엔 적다할찌라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부족함을 아시고 덮으시고 주의 뜻을 알도록 변화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칼빈이 이런 이야기를 했더군요.
신자들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정결케 된다.
우리가 기도를 잘못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가 정결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그동안 기도에 대해 위와 같은 생각을 해 왔었는데,
칼빈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듣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과 우리의 모든 행동의 중심에는 의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정받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가 어떤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보좌 앞에 그리스도로 힘입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보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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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는 의식적으로 사람들을 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또는 내가 본받아야 할 사람, 내가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

성경을 볼 때도 이런 의식이 작용합니다.
아브라함, 요셉, 다윗 등을 보면 본받아야 하고
하갈, 이스마엘, 에서 등을 보면 본받지 말아야 하겠다라는 생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안에 있는 개성적이고 다양적인 것이 무시되거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해야지 하는 기준에 벗어나게 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절망 가운데 사로잡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리는 신앙의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끊임없이 긍정을 외치고, 큰 소리로 기도하고,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교회 봉사에 몰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웃고...
혹시 이런 모습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또는 이런 모습이 신앙의 표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 듣게 되는데,
부모가 기대하던 이상적인 자식의 모습을 지니지 못해 끊임없이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자녀들을 보게 되고
교회에서 기대하는 이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지니지 못한 것 같아 절망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하나님은 과연 사람을 차별하셨던가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존중받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았고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그 과정속에 아브라함 등의 우리가 신앙적으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선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로로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선택은 과연 그 사람들의 어떤 행동적 뛰어남이었을까요?
그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적인 인류를 향한 사랑의 선택 중 일부였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선택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과정 동안 많은 사람들이 조연으로 보여지는 과정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버려졌던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보면 뛰어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도 실체를 멀리서 희미하게 보았다라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멀리서 보고 기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구약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명백히 보지 못하였던 것이지요.
약간의 비약을 더하자면,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나 하갈 같은 사람이나 그닥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신약으로 가면
이제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백히 압니다.
따라서, 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죠.
우리가 좋게 보던 아브라함 같은 사람도
우리가 안 좋게 보던 하갈과 같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제는 모두 다 하나님 안에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이런 구분들이 존재하지 아니하고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격이 이러하든, 저러하든 신앙의 바람직한 표준이 이러이러한 모습을 지녀야하든, 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며 상처주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한 가족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성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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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 저녁 8시 30분부터 10시까지
제가 섬기는 교회 청년부에서 기도회를 합니다.

몇 명 모이진 않지만
주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많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수요일 그 시간을 끝까지 지켜 주고 그 자리에서 같이 기도하는 청년들을 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확장되는 것을 기대해 봅니다.

창세기에 보면 롯을 위해 간청하는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의인 10명이 있으면 그 성을 멸망시키지 말아주십시요.

주께서는 항상 가능성을 보시는 것 같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도무지 주의 사람을 통해 가능하지 않을 때는(주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없어서)
심판하시며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의인 10명이 있으면 주님 이 땅에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을 통해 일하실 수 있으시니까요?
이런 간청의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한명이 있더라도 주님 그 한 명의 가능성을 보시고
이 땅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요. 이렇게 간청하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그 의인의 무리에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악의 길로 가더라도
그 길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의인의 무리에 들며, 주님의 뜻을 이 땅가운데 전하며
주의 거룩함이 이 땅 가운데 설 수 있도록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예배자 -  트리니티 라이브워쉽/설경욱 사.곡 +

~~ ♬♪♩ 예배자 ♬♪♩ ~~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 곳에서 주를 예배하리라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그 곳에서 나 주를 찬양하리라
누구도 헌신하지 않는 그 곳에서 주께 헌신하리라br />누구도 증거하지 않는 그 곳에서 나 주를 증거하리라

내가 밟는 모든땅 주를 예배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덮어지게 하소서 내가 선 이 곳
주의 거룩한곳 되게 하소서 주의 향기로 물들이소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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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5: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1)
관찰: 자주 반복 되는 단어 중에 너희라는 단어가 있다.
해석 :문맥상에서 볼 때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음행을 범한 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고 너희라는 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문제 제기에 있어서 음행을 범한 자가 원인이 되었지만 그 죄에 대한 처리 방법이나 그 죄에 대한 부분들에 있어서 공동체에 공동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적용 :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교회 구성원들의 잘못에 대해 공동책임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수반되는 것이다. 사랑만 강조하다가 방임으로 흐르지는 않는지 생각을 해 봐야 할 것이다.

2)
관찰 :
5:2  너희가 교만하여 졌다.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교만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해석) 5:8절에 보면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순전함과 진실함의 표현을 쓰고 있다. 순전함과 진실함은 문맥에서 제기된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진실함의 영어 표현은 truth로 되어 있는데, 진리를 말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만이란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기준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보다는 자기의 기준 자기의 생각대로 사는 행동들을 범했다. 구약에서도 보면 구원자가 하나님이기 보다는 애굽이나 바벨론을 의지할 때가 많은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교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공동체에 음행의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즉,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대해야지, 고린도에 유행하였던 영지주의에 바탕을 두어 그것에 따라 판단하며 면죄부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적용)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을 권면할 때 어떤 기준을 갖고 접근하는가?

3)
관찰:
5:5 사탄을 언급한 부분
해석 :
이 부분은 해석하기 너무 어렵다. 저자의 의도는 사탄 자체에 있지는 않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사탄에게 내어줌은 영적으로 구원으로 이루게 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은 사탄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사탄의 존재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유익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적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탄에 의해 시험받으셨다. 사탄은 자기의 존재의 거대성을 생각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보잘 것 없는 존재였으며 세력없는 하나의 자기 교만의 절정이었다. 하나님은 사탄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데 이용하셨다.
결국, 여기서 볼 수 있는 점은 사탄이 자기의 의도를 행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 안에서 이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의미가 문맥상 해석 가능하다. 교회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느끼는 것은 탕자의 비유이다.

4)
관찰:
5:7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해석 :
결국 논리체계는 예수께서 너희를 위해 희생되셨으니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는 것이다.
먼저 나오는 것은 예수가 무엇을 하셨느냐라는 것이다.
바울의 논리는 항상 이런 식으로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셨으니, 이제 어떻게 너희가 살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5:8
관찰 :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해석 :순전함은 음행의 부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저자는 음행의 문제에 대해 순전함이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고 있고
음행의 문제에 대해 방임을 하는 공동체를 보며 교만에 따라 너희의 뜻대로 판단하지 말고
진실함, 즉, 진리 위에 서라고 말하고 있다.

더 생각해 보기:
5:1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다.
 일단 이 말 자체에는 교회 공동체가 이방인들의 모습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안 믿는 공동체와 행위적인 면에서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 공동체는 구별되고 있는가?
 구별되고 있지 않다면 어느 부분이 특별하게 그런가?
 문맥에서는 음행의 특정 현상을 다루고 있지만, 보편적 진리를 추론하자면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부분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거룩함이 교회 가운데 있는것인가?

5:6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로 퍼진다.
죄의 전염성이다.
내가 지은 죄가 공동체에 해를 가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죄에 의해 공동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
죄에 대한 결과가 공동체로 확장되는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는가?
신학적으로 보면 우리 한 사람의 죄가 공동체 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까지 만들었다.
(아담 한 사람의 죄의 확장성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죄 인식에 있어서 공동체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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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4: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4: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4:9 내가 생각하건대
-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무언가 어려움을 겪게 될 경우에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들, 내가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들을 겪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생긴다.
 내가 생각하건대라는 표현을 하나님께 대해 쓸 날들이 우리 인생가운데는 많다.
4:10
-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는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게 만들고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일이라는 것을 알 때 그런 회의와 물음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해 볼 점 :
내가 생각하건대 나에게 왜 이런 어려운 일이 닥칠까? 라는 의문이 생길 때
점검을 해 볼 것들이 있다.
그리스도 때문에 이런 일들이 닥친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나의 욕심으로 인한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우리는 어려움에 대해 자책하거나 자신의 신앙 문제로 돌리는 등의 좌절 속으로 자신을 집어 넣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왜 이런 상황이 내게 닥쳐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신앙의 나쁜 표현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며 성경적 질문이다.
예수님도 이런 질문을 본인에게 스스로 하실 때가 있으셨다.

4:10-13
대조의 표현들
- 신앙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 뜻을 아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고난이 있지만, 자신의 고난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그만큼 하나님 안에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산다면 인생이 겉보기에도 잘 풀릴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잘 풀리지 않아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인정 못 받고, 후원도 못 받고 자기가 스스로 수고하여 돈을 벌고 그것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써야 하는 경우도 있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비교하게 된다. 나는 죽도록 고생하여 이 정도로 성장하였는데, 저 사람은 기도 한 번 하니 어디서 재정도 흘러들어오고 하나님이 다 채우셨다 고백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좌절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와 다를 때가 많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라 간다는 것은 인정 못받고 고생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자신이 대접 못 받는 것에 대해 스스로 좌절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 봐야 할 점들 -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어떠하셨는가? 제자들, 사람들을 돌보면서 정작 자신은 굶주리실 때도 많으셨고, 쉬지 못하실 때도 많으셨다. 머리 둘 곳도 없으시고, 고난의 길을 묵묵히 가셨다.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4:14
바울은 사랑안에서 권면하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이 본이 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정도도 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스스로의 자괴감을 가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무슨 충고나 무슨 훈계도 사랑안에서 하지 않으면 오히려 해를 끼칠 때가 많이 있다.
사랑안에서 권면하는가?

4:15
스승과 아버지
일만 스승과 아버지의 대조
대조 되었다는 것은 은연중에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만 스승보다 아버지가 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복음안에서 자녀를 낳았다라는 말은 무엇인가?
스승은 아마도 삶의 방향성을 충고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번역본에 보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을 스승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살다보면 스승같은 사람들은 많다. 특히나 교회에서 충고를 해 주려고 하는 사람은 정말 많다.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그렇게 살면 안되는 거야, 그건 옳지 않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정말 그 어려움을 헤쳐나오도록 자신의 것을 희생하며 시간 내고 기도해주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다. 또한, 단순히 가르침을 주려는 사람은 많지만, 제자를 삼아 신앙 안에서 성장하도록 열정을 다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일만 스승보다는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제자 삼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멋있어 보이는 말 한마디를 날리는 스승인가?
고린도 사회에서도 스승은 많았다. 그러나, 복음안에 서도록 눈물로 양육하고 섬기는 아버지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17절에 디모데를 아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로 양육하였듯이,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자녀인 디모데들이 많이 나타나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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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에서 강의 하던 한 분이 자주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다보면 우리가 하는 행동이 성경적 사고에 바탕을 둔 것인가에 대해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쓸 데 없이 자신의 행동을 정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추측으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좌절가운데 빠져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말씀 가운데서 우리의 행동을 들여다보고 이것이 말씀과 비추어보아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괜한 정죄감속에 우리를 집어 넣을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Is it biblical?

우리의 행동에 대해 위의 질문을 던지면서 말씀은 우리 행동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찾아본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에 많은 유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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