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게시한 글에는 성경을 읽고 성경기자(저자는 성령님)가 전달하려고 했던 메세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관찰- 반복, 대조, 목록..등을 통해
 
그리고 단락제목을 달아보고 책의 구조를 통해서 기자가 전하고자 했던 알아보았습니다.
 
이제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해석이라고 했을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단순히 '이것은 무슨뜻인가? ' 라고 질문을 하기 전에
 
글을 쓴 저자가 있다면 그 글을 받아보는 대상을 염두에 두고 저자가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장지연이 쓴 "시일야 방성대곡" 은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이 논설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고, 을사오적은 우리나라를 남에게 팔아 백성을 노예로 만드려는 매국노임을 규정하였다. 또 고종 황제가 을사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무효임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일제 강점기에 있던 조선백성들 (1905년 11월 20일)을 염두에 두고 발표한 글이었죠

 

을사조약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굴욕적인 사건이었는데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모든 글들은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기록됩니다.

 

성경도 그 기록된 시기가 있고 그것을 기록한 저자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이러한 상황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몇가지를 살펴 볼까요

 

성경의 맨 처음 책 창세기 그리고 연달아 기록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두 모세가 기록했다고 추정을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언제적 사람이었냐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향하였던 대열에서 가장 선봉적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성경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 사실이지만 이처럼 모세는 430년간 애굽의 종살이를 마치고 곧 광야에서 방황하게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책들을 광야에서 집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때에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지루하게 느껴 졌던 많은 족보들이 애굽의 종에서 방금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생각해볼 문제이지요!!!

 
우리민족은 대체 왜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야 했는가?
우리가 가야할 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땅인가?
우리가 정복해야할 적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에게 주신 약속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등등 여러가지 의문들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를 주는 책들이 바로 모세오경입니다!~
 
한가지 더 살펴 볼까요?
 
앞 글에 살펴보았던 디도서를 봅시다!~
 
디도서는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디도와 관련된 책이지요!~
 
본문안에서 보면 디도서는 사도 바울이 그가 아들같이 여기는 그의 제자 디도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디도는 사도행전에서 보면 사도바울과 전도여행때 동행했었고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모르지만 사도바울과 함께 그레데를 방문했다가 그레데에서 몇가지 일들을 위해서 그레데에 남겨졌습니다..
 
그는 아직 젊은 사람이었는데 장로들을 세우는 일과 교회안에 거짓교사들을 다스리는 문제등 몇가지 일들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디도서에 보면 디도 개인에게 하는 얘기들이 주종을 이루지만 당시 서신이 교회안에서 읽혀졌으리라 추정되기 때문에 디도 뿐 아니라 그레데 교회 교인들도 염두에 두고 디도서를 썼을 것입니다..
 
디도는 바른 교훈을 가르쳐야 할 뿐아니라 본을 보여야 했습니다.
 
또한 꾸짖어야 할 대상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지침들(목록으로 관찰함)뿐 만 아니라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어떻게(꾸짖어라) 다스려야 할지등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레데 사람들 중에는 거짓말도 잘하고 술 취한 사람들 또 유대계거짓교사들등 쉽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디도서는 그레데 교회들에서 읽혀 졌을 때 디도에게는 권위를 갖게하고 디도개인에게는 구체적인 목양의 방법들을 배우게 합니다!~
 
정리하자면 창세기~신명기까지는 약속의 땅(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며
 
디도서는 사도바울이 그의 제자 디도와 그레데 교회를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책을 읽을 때에는 이 사람들(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디도 그리고 그레데 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글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이지요
 
이것이 가장 올바른 해석입니다!!!
 
여기까지 두서없이 얘기를 늘어놨는데 이해가 되시는지요?
 
여기까지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성경을 해석할 때 "원독자"라는 개념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해석하시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관찰입니다!~
 
관찰을 통해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것을 근거로 그렇다면 "이것이 원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고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경을 공부할 때
 
저자?
독자?
언제기록된것?
어디서 기록된것?
 
독자들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
 
어떤 문학양식?
 
이러한 요소들을 간략하게 라도 꼭 조사를 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적겠습니다..

제가 성경연구학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느꼈던 것들을 몇가지 나누면서 성경연구에 대한 방법들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제가 성경공부모임을 나가서 느낀 것은 성경공부에 대한도움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실제로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아이러니는 이러한 분들이 실제로는 성경을 읽지 않는 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는 성경의 보화를 캘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지식이나 지혜로 이해하기 힘든 영적인 부분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할 때 성령을 통해서 기록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썼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가 썼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모세의 모든 문화적인 환경과 상황들까지 사용하셔서 글을 남기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면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온전히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기전에 겸손하게 우리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성경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공부하는 순서는 마음대로 한 책을 선택해서 시작할 수 있지만 각 책들의 연관성을 무시할수는 없습니다..(이부분은 좀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우선은 생략하겠습니다)


우선 역사적인 사건별로 시간 순서로 구성되어있는 역사서는

창세기부터 창,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하, 왕상하, 에,느,스까지 순서대로 읽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레, 신, 룻, 에스더는 빼고 보더라도 역사적인 순서대로 읽는데 문제는 없습니다)


또한 신약에서도

누가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의 서신서들(서신서도 연대별로 볼수 있는데 사도행전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전도여행 순서를 보면서 서신들의 연대를 잡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갈, 살전후, 로마서, 고전후, 엡, 골, 몬,빌, 딛,딤전후)을 읽으면 예수님의 나심부터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들을 볼 수 있고 바울사도의 회심과 그의 사역을 통한 성령의 역사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성경을 순서대로 연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고


여기서 다시한번 정리하자면


우선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시작한다!~


다음은 성경을 읽는다.(한책을 선택해서 읽되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다 읽는다-이것은 중요함-영화를 며칠 나누어서 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런데 우선은 짧은 책으로 시도하면서 성경공부의 재미를 붙여보자. 추천할 책은 디도서다. 짧지만 성경공부의 방법론을 익힐때도 참 좋은 책이라 생각이 된다.


실습


그러면 디도서로 일주일정도 공부를 해보자!~


준비물은 사모하는 마음, 성경, 색연필(12색이상)이다.


우선은 디도서를 펴놓고 기도하자!~


그리고 디도서를 한번 읽어보자(약 10분정도면 한번 읽을 수 있을 것이다)이때는 책전체의 내용이 무엇인지 감을 잡는다. 아!~ 바울이 디도에게 무슨말을 할려고 했구나!~ 정도만 알아도 된다.. 아니면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자.. 앞으로 디도서를 5번이상 읽게 될것이기 때문에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이제 두번째로 성경을 읽으면서 색연필(12색정도)을 꺼내보자!~


디도서를 읽으면서 누가 누구에게 썼는지 색칠해보자!~ 1:1, 4절에 정답이 있다..


반복되는 단어나 주제들이 있는지 찾아서 색칠해 보자!~ "이는"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교훈", "선한 일"도 보이는가? 우선은 장을 가리지 말고 찾아보자. 또 "구주"라는 말이 반복되기도 한다.


또 어떤 인물이 나오는지 살펴보자. "디도", "장로들", "감독", "할례당", "그레데인"등등이 나온다.


대조되는 말들을 찾아보자.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과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장이"가 대조가 되는 말이다. 또 1:6"불순종하는 일이 없는"과 1:10 "복종치 아니하고"가 대조가 된다.. 1:16 "선한 일을 버리는 자"와 2:7 "선한일의 본을 보여"도 대조가 된다.. 이런식으로 본문안에서 여러가지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차근 차근 색칠하면서 읽어가다 보면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될것이다..


어쩌면 목록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5-9 장로들(감독)의 조건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

하나님의 청지기로 책망할 것이 없고

제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디도서를 읽으면서 이정도를 관찰한 사람이라면 아주 Excellent!~ 한 사람이며 말씀의 진보가 급속도로 있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봅시다!~


디도서를 세번째로 읽으면서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단락별로 구분하면서 내용을 정리해보십시요.


예를 들어서

1:1-3 하나님이 바울에게 맡기신 것

   4   디도에게

   5-9 장로들을 세우라는 구체적인 내용

   10-16 그레데사람들의 특징

2:1-10 그레데교인들을 위한 지침

   11-14 예수님이 하신일

   15-3:3 디도가 할 일

    .........................................등등

이렇게 적어가면 디도서내용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단락은 본인이 직접 나눠보시거나 나눠진 성경 예)NIV등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단락내용을 요약해서 제목을 잡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 너무 주관적으로 흐를수 있기 때문에  본문에 나와있는 단어만 사용하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단락제목을 통해서 좀 더 큰 덩어리를 잡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문학작품의 단위를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어>문장>단락>장>소단원>대단원>책>성경으로 단위를 높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권의 책은 이처럼 단어들이 모여서 문장이 되고 문장들이 모여서 단락이 됩니다!~


각 단락들은 장을 이루고 소단원 대단원 그리고 책이라는 완성품으로 만들어 집니다..


성경도 마찬가지로 각 책들 66권이 모여서 하나의 큰 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디도서로 가서 디도서의 구조를 살펴봅시다!~


디도서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나누시겠습니까?


저는 2:10절과 2:11절 사이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래서 1:1-2:10 까지는 "디도에게 부여된 임무"

          2:11-3:15 까지는  "디도가 가르쳐야 할 것들"


그러면 한번 A4용지에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 봅시다!~


첫번째 단락을 나누고


두번째 단락제목을 적고


세번째 단락을 두개의 장(혹은 대단원)으로 묶어본다.


네번째 제목을 달아본다!~


여기까지 잘 따라 오셨나요?


너무 많은 내용을 적은거 같아서 좀 미안한 마음이 있네요..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서 얻게되는 기쁨은 모든 곤란을 상쇄하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이랍니다..


여기까지 해 보신 분들은 두가지를 남겼을 것입니다


우선 색연필로 부지런히 관찰한 흔적으로 성경책이 좀 칼라풀해져서(?) 한눈에 무슨 내용들이 들어있는지 좀 더 쉽게 들여다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A4한장에 디도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것을 우리는 수평차트라고 부른답니다)것을 만들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관찰한 것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적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에서 3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이 부분은 알다시피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서로 위탁되어야 하는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때 약간은 오해의 소지가 있게 됩니다.
5장 31절 32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31절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들이 한 육체가 될지나
32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잘 설명하기 위해서 꺼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33절에서 보면 32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를 했지만, 33절에서 아내와 남편사이에 이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논리는 순환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관계는 어떠한가? 를 설명하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져오는데, 그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이상적인 관계안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 세상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참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은 창조때부터 남편과 아내를 한 몸이 되라고 하셨고, 한 몸 처럼 서로를 아끼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지만 죄로 가득찬 인간의 모습은 완전한 하나님의 남편과 아내를 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한다면 완전하지 못한 관계로 적용하여 잘못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하고 이상적인 남편과 아내의 관계(바울의 생각이 포함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시 주신 그 말씀의 관계를 사용하여 남편과 아내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설명한 후,
그 관계를 생각하도록 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도 이와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독자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서로 어떻다는 것을 잘 이해하게 되며, 그리스도가 자신을 교회를 위해서 주셨으니, 교회(에클레시아,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의 모임)도 그리스도께 복종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에베소서의 전체 주제인 교회(성도들)가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을 행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5장 22절부터 33절까지 분량상으로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 ; 5장 22절, 23절 전반부, 24절 후반부, 25절 전반부, 28절, 29절 전반부, 33절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 23절 후반부, 24절 전반부, 25절후반부 부터 27절까지, 29절 후반부부터 32절까지

분량으로보면 역시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32절에서 바울은 분명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죠.
33절에서는 그러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했으나,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존경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에베소서를 나눈다면,
5장 22절에서 32절까지
그 다음 5장 33절에서부터 6장 9절까지를 나누겠습니다.
전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함으로 그리스도에게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후자는 바울이 각 관계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바른 것 같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 거죠.

*** 오해되기 쉬운 부분들.
1. 남편과 아내의 권한 관계 - 이것은 이 문맥에서 핵심이 아닙니다. 이 문맥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에, 부수적인 것보다는 중점 사항을 파악하도록 합시다.
2. 5장 26절 27절은 철저히 그리스도가 교회를 어떻게 하셨는지를 나타냅니다. 28절에 이와같이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이렇게 하라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앞에는 남편과 아내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3일정도를 에베소서에만 매달렸습니다. 수십번을 읽고 다른 번역본으로도 다른 언어로도 읽어보았으나, 에베소서가 명확히 말하는 바를 이해하기란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자체가 어렵게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 제 안에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하나님께 에베소서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면서 에베소서를 다시 읽고 다시 읽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그 논리적 구조도 그렇고, 그 사상들도 정말로 놀랍습니다.
단어 하나 하나의 사용에서도 전체적인 주제와 연결되는 고리가 크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를 1장 1절부터 하나 하나 적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에베소서 끝장 끝절까지 쓰려면 정말 많은 시간동안 꼬박 적어야 할 것 같아 대략적인 개요만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가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는가를 일단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베소서는 편지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자가 수신자를 염두해 두고 쓴 것이죠.
1:1 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단 수신자는 에베소라는 특정 장소에 있던 성도들과, 그리고 에베소에 있던지 아니던지 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쓰여 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특정 지역 성도들과, 특정 지역이 아닌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여진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장에서 보면 이방인과 유대인에 속한 사람들 사이의 문제점등을 지적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편지 수신 계층은 유대인들과 유대인들 외에 이방인들에게까지도 확장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신자들에게 있었던 문제점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2장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졌던 이방인들 사이의 분쟁들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4장 17절부터 5장 21절 정도까지 보면, 도덕적 타락의 모습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음행이라든가, 악독, 방탕 등등의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따르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은 수신자들의 모습 속에 위와 같은 문제점들이 있음을 볼 수 있는거죠.

배경요소들을 다시 적어보겠습니다.
에베소 지역의 교회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다. 그 갈등은 자신만이 하나님의 선택되고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종류의 갈등들이었다. 또한, 교회 내에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옛날의 음행과 더러움, 탐함, 악독등을 버리지 못하고 그 길로 계속해 따르던 모습들이 있었다.
물론, 더 자세히 들어갈 수도 있지만, 이 정도만 적어 보겠습니다.


논리적 구조를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에서 3장까지는 Theology 부분입니다. 이론적인 부분이구요,
4장에서 마지막장까지는 application 부분으로 실천적인 부분이지요.
즉, 1장에서 3장까지는 4장에서 마지막장까지의 실천을 유도하기 위한 동기적 부여를 제공하기 위한 장입니다.

배경과 논리적 구조에 관련된 부분은 여러 번만 읽어보셔도 금방 찾아내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 계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정말 많이 반복됩니다. 또는 비슷한 말인 예수 안에서, 주 안에서 등등 수없이 반복됩니다.
즉,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를 빼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뭐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는 것이 에베소서의 핵심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사랑을 보여 주셨으므로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음행, 더러움들, 탐함들을 버리라는 이유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영광스러운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와 소망을 갖게 되었으므로 옛 사람의 모습들이었던 타락의 모습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서로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로 부르셨고 서로 도와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도록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이에서도 서로에게 사랑하고 아낄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성도들로 구성된 공동체, 장소의 개념아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순종하고,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바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종과 상전의 관계도 그리스도안에서 생각해 보면 서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안에서 생각하고 행하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알아야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6장 10절부터 끝까지)
모든 관계에 있어서 하나되게 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하고 서로를 섬기게 되기 위해서는 6장 10절부터의 방법대로 따라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략적인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를 가장 잘 요약한 성경구절을 찾으라면, 1장 10절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함이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일이나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동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확장하면,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해서 주께 하듯 해야 한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을 두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정말 대단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여기에는 시간의 시작과 공간의 시작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시간과 공간안에 인간을 두셨습니다. 여기서 신학적, 철학적인 이야기를 집어 넣으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쉽게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 가운데 사람을 두셨을까요? 그리고 아담, 하와 둘만 영원토록 살도록 하지 않으셨을까요? 생육하고 번성하라.
 좌우지간 태초부터 공동체의 개념이 존재하게 됩니다.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그 삼위의 조화로운 교제를 인간 세상에도 공동체 안에 표현하십니다.
 즉, 인간은 혼자서는 하나님에 대해 제한적인 부분만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철저히 공동체 지향적입니다. 혼자 신앙이 커가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해 기도하고 신앙이 자라갈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신약의 바울서신의 대부분은 다 공동체의 성장을 아주 애절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 성경공부를 정말 좋아합니다. 혼자 하는 성경공부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성경 공부를 좋아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각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제가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수십배는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은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시고 광활하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장점이 됩니다.

신학도 그런 맥락에서 저는 봅니다. 저 혼자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전, 깔뱅을 공부하면서 깔뱅이 만났던 하나님을 듣습니다. 어거스틴, 루터, 바르트 등 수 많은 신학자들과 그의 사상들을 통해 그들이 만난 하나님을 듣습니다. 물론, 그들의 사상이 제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보는 것과 다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나누어도 그 안에 제가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을 수 있다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보류시킵니다.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성경에 대한 공부가 선행 또는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 서적을 읽을 정도의 정성이나 그 이상으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깨닫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식에의 추구가  신학서적이나 위대한 신학적 사상가들에 대한 열정을 낳습니다. 하지만, 성경 자체에 대한 열정은 그에 비해 떨어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신학자들과 대담을 하기 위해선 나도 그 신학자들이 만난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서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양한 생각들을 경험하며 그 신학자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너무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만난 그 넓고 깊으심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신학을 하면서 감사한 것중의 하나입니다.

*** 하나님만 위주로 한다는 세계관(가치관)의 위험성
 오늘날의 많은 크리스챤들이 듣고픈 말이 신앙 좋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은 신앙적인 부분들이 좋다 안 좋다를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지만, 적어도 외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좋다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신앙의 좋은 점을 드러낼 수 있다는 기대에서 그 외형적인 무언가를 가지길 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외형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은 어느 정도 사상이나 행동에 있어서 공부를 많이 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과거보다는 약간은 긍정적으로 많이 안다는 생각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삶입니다.
 얼틋 보면 굉장히 좋아보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무엇이든지 하나님만 바라보겠다. 그 외의 다른 것은 필요없다 뭐 이런식의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며 하나님 위주로만 살겠다는 세계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 보면서 그 외에는 다 소용없다고 말하는 가치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을 배제한 관점이며 참 위험한 요소입니다.
 진정한 성경적 관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음은 그 사랑을 이웃을 향해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말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 지향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이야기만 많이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안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있다고는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전 살면서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이 무례한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물론, 크리스챤이라고 해서 특별이 더 무례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무례함이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이 무례함은 은연중에 내재된 협박과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분명 그들과 대화를 하면 그들만큼 신앙 좋은 사람을 볼 수 없을 만큼 하나님 지향적입니다. 그렇지만, 따뜻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사람안에 인간을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속한 것이라는 어떤 영역과 그렇지 않은 어떤 영역으로 나누며, 하나님 안에 속한 영역이라고 여기는 부분에서만 활동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제가 얼마전 모 학습법에 대한 어느 전도사의 강의를 우연히 들으면서 굉장히 실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인본주의적 학습법을 쓰레기 같다고 표현하면서 신본주의적 학습법의 중요성을 말했습니다. 내용인즉슨, 신앙이 좋아보이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제가 위에적은 그런 유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좌우지간, 제가 마음에 실망했던 것은, 쓰레기 같다는 표현이 너무 거슬려서 싫었고 다음은 그 분 안에 있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인 학습방법은 다 쓰레기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인 측면을 사용해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모든 것들을 통하여서 역사를 주관해 오셨습니다. 어떤 신본주의적인 특별한 것이 있어서 그것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 세상까지 확장되지 못한 것은 마치 하나님을 위한 유토피아적 세상을 만들고 그곳에서만 역사하시는 제한된 하나님을 만드는 위험한 일입니다.
 좀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인간을 통해 다양하게 나오는 것들이 나쁜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과 배제되는 곳, 도덕적, 영적인 측면들이 붕괴되는 곳으로 사용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안에서 이웃을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발현되는 것을 올바른 신앙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면도 이런 면에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안에 무너진 영역들을 회복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진짜로 하나님 위주로 하는 세계관인 것입니다.
하나님 위주로 한다고 하면서, 왜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사랑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이런 행동들은 진정한 하나님 위주로 사는 삶이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 주변을 관찰해 보십시요.
우리 주변에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을 한 번 분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무지 좋은데, 왠지 이 사람만 만나면 숨이 막히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해 보지는 않으셨는지?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서 이 부분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요.
*** 이웃을 향한, 인간을 향한, 세상을 향한 사랑(하나님안에서의)이 있는지? ***



 

예수전도단에서 처음에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이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바빠서 하나님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들이 별로 없어서 집중하지 못하고 듣질 못할 때가 많다.

하나님 음성 듣기에 대해 훈련받다 보면 신기한 일이 많이 생기기도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정말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며, 또는 예언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재미를 느끼게 되며 그 경험들을 통해서 믿음이 더욱더 자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단계들이 지나면서 부작용도 생기게 된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거의 자동적인 반응이다.
사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만은 아니다. 다윗 같은 경우는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갈 때, 올라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묻는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아주 심하게 비약을 하자면 점치는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러 다닌다. 점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명확한 지침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 음성 듣기가 이런 형태가 되면 안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안 하시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이시다.
우리의 문제로 인해 하나님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기도제목으로 하나님을 강요하는 등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올바른 하나님의 음성 듣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냥 매순간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듣고 말씀안하시면 그대로를 감사드리는 것이다.

올바른 하나님 음성 듣기를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이끄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것 자체가 벌써 조건부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두는 사람은 그냥 하나님 자체로 만족하며 하나님께 모든 상황 속에서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꼭 필요하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아마 한번쯤 하나님이 나에게 계획해 놓으셨고, 원하시는 비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해 봤을 것 같다.
교회에서도 비젼에 대해서 많이 가르친다.
너를 통해서 열방이 변할 것이다. 너는 정말로 소중한 존재이다. 너를 통해서 한국 사회가 변화될 것이다. 너에게 정말 멋진 배우자를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다. 등등...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키길 원하시며, 하나님의 계획 안에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하신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비젼은 우리의 비젼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뭔가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큰 성취적인 것들이 일어나길 원하고 자신이 그 통로가 되길 원한다.
하지만, 비젼의 크고 작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것이 참 대단한 것이다라고 하면 그것이 큰 것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를 통해 열방이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작은 것이라고 하시면 그것은 작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땅의 많은 기독인들이 자꾸 자신의 머릿속에 뭔가 큰 것을 설정해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큰 비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자기가 뭔가 작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면, 또는, 자신의 일상 생활의 반복적인 일들을 하게 될 때 그것에 답답해 하고 뭔가 하나님이 새로운 것을 주시길 원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를 찾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며, 그분의 뜻에 우리의 생각을 맞추는 것이다.

비록, 일상 생활에서 영향력을 많이 미치지는 못해도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신 뜻을 찾으며 감사하고 그것을 세상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보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이것이 올바른 관점인 것 같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들의 통로이다.

따라서,
난 환경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

이 말은
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불평하지 말아야 하며
난 어떤 사람들보다 우월감을 갖지 말고 학생의 위치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가 꼭 기억해야 할 점이다.
내가 소그룹을 인도한다고 하여도, 난 그냥 그곳의 일원일 뿐이지 리더는 아니다.
리더는 성령이시고, 성령께서는 모든 멤버들의 입을 통해 말씀을 가르치신다.
따라서 나는 내 입을 성령께 맡기고, 다른 멤버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소그룹의 모습이며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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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보면, 신앙 훈련을 많이 받았다는 사람 중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훈련을 많이 받았으니까 그만큼 많이 안다는 의미의 생각들...
그리고 교회 나온지 오래 안 된 사람들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역사들을 제한할 소지가 충분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각 개인이 훈련받은 것과 성장 과정 속에서 연단시키신 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께 순종한다는 것은 모든 공동체의 멤버들을 하나님의 통로로 여기며
그 멤버들에게 서로 겸손과 온유함으로 배워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는 자가 되는 것... 섬기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보면, 신학을 했다는 이유로, 어디에서 훈련받았다는 이유로 그것을 하나의 권위처럼 내세우는 경향이 많아 자랑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전체 몸의 한 부분으로 조금 더 제 기능을 하기 위해 모양을 갖춰가는 것이지, 머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몸의 부분들에 비해 우월한 것도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머리고 우리는 모두 몸의 한 부분이며 서로가 맡은 부분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당신은 어떻습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곳에서 당신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이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해 봅니다.

그렇지만 그 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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