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여호수아 1:1-9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면 우리에게 많은 의미가 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보호 아래 있으면 그냥 좋겠다 이런 느낌이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떠나 보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의나 타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부모님 두 분과 같이 못 지내는 경우도 있고, 또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나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인생을 포기하고 싶다는 절망감이 들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달려가야 할 목적지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런 마음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봐도 우리는 분명한 목적지인 하나님의 그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길을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를 굳이 집어 넣지는 않겠습니다.
여호수아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세가 죽은후...
모세라는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어떤 존재 였을까요?
모세는 이집트 땅에서 노예 상태로 고생하던 사람들을 이끌고 광야 길을 헤쳐 나온 지도자였습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많은 기적들을 보여 주셨고,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친밀했었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모세에게 나아와 재판을 요구했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모세를 불러서 하나님께 기도하게끔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들 가운데 넘쳤고 그들은 광야 가운데서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세에게 반역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있지만 같이 고생하며 모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봤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세라는 사람은 큰 기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세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라는 사람이 후계자로 지명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에서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신이 의지할 수 있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그 훌륭한 지도자 모세가 죽었을 때, 아마 상실감도 크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끝까지 그 목적지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두려움 등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 첫 부분에 보면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런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버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속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니까 두려워 말고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천 지침을 주십니다.

아무리 어떤 말들이 좋아도 그 말들을 내 안에 기억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 말들이 우리 가운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실천 지침을 주셨습니다.
1. 강하고 담대하라. (마음에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신 거죠.) (1:7)
2. 율법을 지켜 행하고 그대로 따라함. (율법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 가운데 어떻게 승리하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가가 기록되어 있죠. cf.물론, 여기서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확신을 갖고 살 수 있는 것이죠. (1:9)

세상에서 익숙한 곳에서부터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도우심을 의지하며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안에서 용기와 힘을 가진다면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이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사는 삶 이 삶이 바로 생명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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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리된 것입니다.

살다보면 사람들이 이런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이야기...
우리는 주변에서 참 안타까운 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자식을 보고 싶은데 자식과 떨어져 지내는 이야기들... 특히, 전쟁의 참화 속에서 자식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는데도 도와줄 수 없는 것을 보며 극심하게 울부짖는 부모의 모습들...
이런 것들을 대하면 우리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창세기의 생명 나무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 안에 아담과 하와를 두시며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에 대한 명령을 어깁니다. 창세기 2:17
어떤 사람들은 선악과를 왜 만드셨느냐? 이게 실제로 존재했느냐라고 따지기도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주관심사가 아닙니다. 단지, 인간이 반역했고,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죄를 어기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3:5절에 뱀(사단)이 속였습니다.
어떤 것을 미끼로 하였냐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여 속였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악과는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상징합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좋습니다. 누구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며 그 보호자 아래서 보살핌을 받는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호의 테두리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보호자였습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는 것을 떠나려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관계의 단절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지옥과 같은 상태입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반역의 마음을 갖고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정말 너무나 화나고 멸하시려고 했다면 가죽옷을 입혀서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고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3:21

하나님이 왜 에덴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보낼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창세기 3:22 에 나옵니다.
1. 죄를 범해서
2. 생명 나무 열매도 먹고 영생할까봐...

하나님은 인간이 영생 하는 것에 대해 시기하시기 때문에 쫓아내셨을까요?
절대 그것이 아닙니다.

죄로 오염된 사람은 결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영생나무 실과를 먹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본다면 죄 상태에서 영원한 상태로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원토록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과 함께 하며 모든 것을 누리고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가 없기 위해서는 죄에 오염된 것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옛 사람은 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이 옛 사람이 죄와 함께 그리스도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에서 깨끗해 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한 이유로 하나님이 시기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어떤 분은 그건 추측이 아니냐? 그렇게 이야기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근거가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게 된 자, 죄가 사하심을 받은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 나무 실과를 먹게 될 것이라고 요한 계시록 22: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개역한글이나 개역개정의 의미는 원어에 비해 다소 추상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가 없어졌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에 따라 생명 나무 실과로 상징되는 영원한 생명 속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하는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꾀에 넘어가 죄로 타락한 우리들에게 이런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적용점들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죄 속에서 계속 거하는 것은 사단에게 지배 당하며 하나님과 단절되는 지옥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의 결과들이 오늘날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단은 우리를 멸하려 하고 죽이려 하고 속이려 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쁜 생각들이 너는 쓸데 없는 존재다. 죽어버려라하고 유혹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며 하나님의 모든 것이라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의 물줄기가 생수의 근원에 연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죄 속에서 하나님과 단절되었지만 예수를 받아들이면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의 죄된 옛사람이 죽으며 하나님과 연결되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인해 얻어진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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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리된 것입니다.
오늘 길 가면서 생각들을 해 본 것이 있어서 적어봅니다.
얼마전에, 신대원 동아리 아나톨레에서 담당 간사 목사님께서 하신 이야기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이 나왔을 때, 친히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그들의 연약함을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전엔 장애를 가지셔서 휠체어 생활을 하시는 한 목사님이 채플에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누가복음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은 그냥 병들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솔직한 상태가 기록되어 있다고... 거기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까지 자신의 상태에 대해 포장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씀...

그러면서 내 자신을 한 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변에서 누가 가난하다고 병들어 아프다고 하면 뭐라고 하나?
흔히 쉽게,
기도하겠다, 그런 가난함들에는 병듦에는 다 영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이런 말을 너무나 자주 해 왔던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이 찾아왔을 때  육체적인 것이 낫는데 관심을 가지지 말고 영적인 것에 더욱더 관심을 가져라 이렇게 하셨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병든자를 고쳐주시고 또한 영적인 의미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누가 힘들다고 하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형태의 영지주의(육에 속한 것은 무조건 나쁘고 영에 속한 것만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형태의 사상)에 물들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은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육적인 우리의 생활도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성육신의 비밀이 여기에 감추어진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선 실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돕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도 이런 맥락에서 가난한 자를 직접 돕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기독인들의 목표라면
영육간의 조화가 나타나도록 이 땅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첫번째인데,
야고보서의 전체적인 의미를 훑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 야고보서에 대해서 많이 들으면서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위가 같이 가야하고, 행위의 중요성이 또한 부각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믿음 외에 행위적인 요소들이 수반이 되어야 참된 믿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서를 듣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야고보서에 대해서 많이 묵상하고 야고보서를 공부하면서 야고보서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라는 것이 모든 말 안에 전제로 깔려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석을 거의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적는 것은 순전히 성경을 수없이 반복해 읽으면서 문맥 단위로 끊어 읽으면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들은 무엇인지, 대조나, 비교 등등을 계속 찾아내면서 적는 것입니다. 전 성경이 성령의 조명에 의해 스스로 제 가운데 계시되는 것을 믿습니다.

야고보서에서 반복되고 있는 몇몇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걸 적어보면
인내, 믿음, 지혜, 화평, 구하라, 세상적 가치관(정욕), 혀의 잘못된 사용,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 가난한자, 부한자, 종말론적 시급성 등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여러번 읽어보시면 제가 위에 적은 것들의 반복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반복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적어 보겠습니다.

야고보서는 일단 흩어져 있는 유대 기독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의 사상이나 그 지역의 가치관들에 물들 위험이 큰 지경에 처해있게 됩니다. 이것도 야고보서를 여러번 읽으시면 쉽게 추측가능합니다. 그 가운데 물질적인 가치관이 특히 큰 위험을 공동체에 줍니다.
교회 안에서 가진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하고, 교회 안에서 대접받으려 하고, 세상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힌 채로 다른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랬을 때, 가난한 자들은 자기가 가지지 못했음을 비관하는 일들이 생기게 되고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받아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가운데서는 가난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병든 사람들도 있고 여러 가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직접적으로 돕기 보다는 무시하고, 무시하지는 않더라도 말로만 위로하는 그런 일들이 발생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이런 배경을 우리가 찾을 수 있는데 위에 반복되는 단어를 연결해 보겠습니다.
우선 신약은 종말론적 시급성이 있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믿음을 잃게 되어 주님의 재림시 심판을 받게 되지 않도록 어떻게든지 믿음의 연약함을 도울 필요가 있었던 것죠. 또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선 시험가운데서도 인내가 정말 요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기독인들이 하나님의 가치관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세상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부한자가 가난한자를 무시한다던가 하는 일이 발생해 믿음을 잃어버리게끔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의 잘못된 사용에 대해서 경계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실제적인 행위에 의해서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돕지 않는 일들이 또한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공동체 간에 믿음을 서로 유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화평을 이루어내야 하는데, 그것은 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결국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믿음을 서로 지키주기 위해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이제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죠?
야고보서는 내 믿음이 행동에 의해서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보다는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믿음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이 믿음을 서로 지키도록 격려하기 위해 실천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서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구체적으로 야고보서 장절을 언급하면서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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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최춘선 할아버지의 영상이 인기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영상을 보던 교회 형이 너무 감격하셔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씀...
내가 그 영상을 보는데, 최춘선 할아버지가 안 보이고 예수님이 보이더라.

그리고 저도 그 영상을 보았는데, 정말 최춘선 할아버지가 안 보이고 자꾸 예수님이 떠오르고 보이더군요.

오늘 박** 교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예수님이 보여야 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전 요한복음 1장을 묵상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보면서
저의 삶 가운데도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 행동 하나 마다 발걸음 하나 하나 마다 그 안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이 드러난다면, 예수님의 생각과 뜻이 나에게 육신화 되어 그 성육신의 비밀을 내 육신에 직접 채운다면 좋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내가 말 할 때마다 내가 없어지고 예수님이 다른 사람에게 느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전 저 자신을 볼 때마다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고 제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 안에서 성육신되셔서 제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이 자꾸 드러나고 그 로고스가 제 안에 충만히 역사하지 않는 모습요.

우리 안에 예수님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참 재밌습니다. 오늘 어떤 형제가 자신의 의를 내세웠던 모습을 나눠주며 하나님 뜻을 이루길 원한다고 하나님 불쌍히 여겨 달라는 취지의 얘기를 하는데, 그 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한 장면이 보였습니다.

참 감격했습니다.

분명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의 삶 가운데 작든지 크든지 나타날 것입니다.

그 성육신의 충만이 우리 삶 가운데 많이 나타난다면 말이 없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를 알게 될 것입니다.

전 그 성육신의 삶을 제 안에 더더욱 채우길 원합니다.

지금은 1퍼센트도 훨씬 안되게 채우고 있지만, 내 삶이 예수님의 삶이 되길 원하며 그렇게까지 자라가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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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위의 생각들을 한동안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모 교수님을 통해, 모 형제님(너무 고마워요^^ 알죠? 내 맘)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네요.

오늘은 사사기의 내용에 대해서 나눠 보려고 합니다.
사사기의 핵심 주제는 죄의 싸이클입니다.
죄를 짓고 -> 그 죄로부터 파생된 어려움 -> 그 어려움에 대한 하나님께 간청 -> 하나님의 구원
위의 사이클이 처음부터 계속 반복되죠.
그렇다면 이 싸이클이 왜 반복될까요?
그것은 바로 죄와 타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장, 2장에서는 바로 윗 부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을 멸하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남겨 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이방 사람들의 죄악에 물들고 결국 그들의 삶이 실패로 이끌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이 멸해지지 않은 것, 즉 죄가 멸해지지 않은 것 자체에 초점을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기회로 삼으십니다.
3장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남겨진 이방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쟁은 왜 필요할까요? 그것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으려면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걸 그들의 생활 가운데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자신의 힘만 의지하게 되면 결국은 죄의 사이클 속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민들을 완전히 멸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들을 자꾸만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에 반복되는 구절중의 하나는 "그들이 자기 뜻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사기의 패배적인 모습은 다윗을 통해 완전함으로 바뀝니다.
사무엘상하가 바로 사사기의 불완전성을 다윗을 통해 극복하는 모습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끌어지는데요. 이런 점은 신약으로 예수의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 최종 승리까지 연결됩니다.
너무 멀리까지는 안 나가려고 합니다.

사무엘상 17장 47절의 다윗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다윗의 이 고백을 잘 들어보면, 하나님이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실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은 바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였는지를 드러내보여주는 하이라이트된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실제적인 전쟁뿐만 아니라 영적 전쟁이 어느 때보다도 극심합니다.
이런 혼란스럽고 어려운 상황이 안타깝긴 하지만,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우리 가운데 제시합니다.
순간 순간마다 다윗의 고백처럼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선포하고, 자신의 무기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이겨나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님처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한 번 우리의 죄의 모습들을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사기처럼 죄의 싸이클 가운데 똑같이 반복된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전쟁이 하나님 가운데 속한 것임을 크게 선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같이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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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하신 나의 주 의의 길로 날 인도하소서
행하신 모든 일 주님의 영광 다 경배합니다
예배합니다 찬양합니다 주님만 날 다스리소서
예배합니다 찬양합니다 주님 홀로 높임을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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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을 꼽자면 나그네 정신의 부재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만 살고 곧 영원한 본향으로 갈 존재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철저히 나그네 적인 삶일 뿐인데, 이걸 잊고 산다.

그래서, 나그네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소유에 집착한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자기 돈으로 다른 곳에 베풀기보다는 집을 사려고 하고 차를 사려고 하고, 자기 소유를 늘리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

나그네는 자기의 소유에 대한 집착이 없다. 왜냐면 곧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물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섬기는 일들이 없는 것이다.
이 땅의 기독인들이, 그리고 내가 나그네 정신을 가지고 산다면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과 약자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쳐 날 것이다.

비단 기독인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한국인들이 나그네 정신을 가질 때
이 사회는 더욱더 부가 나누어지며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나 싶다.

자기것을 더 가지기 위해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를 경쟁 상대로 인식하기 보다
같은 나그네로서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료로서 서로를 격려하고
우물에서 물 한 그릇을 떠서 다른 나그네에게 줄 수 있는 정신이 필요한 것 같다.

구약에 보면,
우물물들을 차지하기 위한 목자들의 싸움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나그네의 정신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들을 다른 목자들을 위해 양보한다.
그들은 나그네의 정신을 가졌고, 다른 나그네를 격려하는데 힘썼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우물을 포기하고, 자기가 판 우물도 다른 나그네들을 위해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구절이 있다.
예수님도 철저히 자신에게서 나오는 이 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왜냐면, 예수님 자신이 본향을 찾아가는 본이 되셨고, 어떻게 나그네 삶을 사는지를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나그네가 되자.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나그네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번째, 우물을 파자.
둘째, 그 우물을 주든지, 나눠주자.

나그네는 자기가 수고해서 무엇을 이루어도 그것을 그냥 주고 떠난다. 이것이 진정한 나그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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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우리라는 용어를 굉장히 좋아하고 그 테두리 안에 사람들을 묶고 행동하는 것을 은연중에 강요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안에서도 이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우리 교회, 우리 교단, 우리 신학 등등...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우리라는 범주로 예수를 묶으려고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시다시피 선민 사상이 강합니다. 그리고 우리라는 범주로 묶길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가 듣기론 한국 문화와 많이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좌우지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 요한이다, 엘리야다, 예레미야다 선지자이다 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범주에 예수 그리스도를 갖다 놓고 자기와 같이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마16:14)
이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열심당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앞에 나아오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가 "우리"라는 범주에 묶일 수 있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우리라는 범주를 깨뜨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범주를 깨뜨리셨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때,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을 바른 고백으로 인정하십니다.
또한, 사람들에게도 우리라는 개념보다 하나님안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가르칩니다.
간단히 나타내면
우리 -> 하나님 안에
 로 가는 것입니다.

비단 예수님뿐만 아니라, 바울시대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너는 무슨파냐? 바울파냐? 아볼로파냐? 그리스도파냐? 이렇게 묻는 일들이 생겨났었습니다. (고전 12:12)
그렇지만 바울도 또한 이야기 하기를 하나님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것들을 묶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선교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람이 큰 일을 해야 한다. 중국 크리스쳔들이 선교 중심이 되는 것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자 같은일들, 우리교회가 큰 일을 해야 한다, 우리 교단이 한국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우리 신대원이 최고다 등등과 같은 것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참 위험한 일들입니다.
물론, 바라기는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우리라는 틀을 깨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 안에 한 형제, 자매, 한 가족들로 묶일 때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라는 틀에 묶어 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제한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 우리라는 범주에 묶인 사람들만 사용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들, 우리의 생각을 벗어난 그 이상의 한정될 수 없는 것들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시고 그 분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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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같이 불러 보십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중략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불러 보니까 행복하십니까?

이 축복송은 한국 교회 가운데 널리 불려지고 있습니다. 누구를 축복할 일이 생길 때 교회 내에서 정말 많이 부르며 행복해 하는 곡입니다.
심지어 요즘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불려지고, 믿지 않는 가수들도 이 곡을 부르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재정적인 부분들도 교회 자체를 위해서 많이 사용하고 내부의 공동체 멤버들을 위해서 많이 사용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좋은 예배를 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감동을 줄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부터 글의 갑작스런 전환입니다.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불려져야 할 노래 쪽에 가깝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바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사랑을 더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정말 슬픈 현실입니다.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거하고 계시는 데, 이미 사랑을 받았는데, 자꾸 달라고 합니다.

성경은 크게 세 가지의 중심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둘째, 십자가를 지고 - 고난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사랑을 전하고 주는 삶입니다.
셋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자. - 소망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안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랑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직 그리스도가 믿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잘 심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번째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예수의 사랑과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축복송을 이렇게 불러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

특히, 부흥을 기대한다면 사랑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약한 지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말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약한 지체들이 없다면 사랑을 줄 곳들을 찾는 데 오히려 힘이 들 수도 있습니다.

제 어머님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저에게 하시는데, 저는 참 많이 감동을 받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주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아느냐고...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그 분의 사랑을 주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알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땅의 교회들은 사랑을 들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들고, 이 땅의 소외 받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도와주고 그리스도가 심겨 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7-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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