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모임에 bedts 팀들 파송이 있어서 갔습니다. 항상 bedts 사람들은 저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화요모임에 제가 친한 한 형제와 함께 5시 30분쯤 갔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와 있어서 놀랐습니다.
자리를 찾아 적당한 위치에 저와 그 형제 가방을 놔두고 밖에 잠깐 배를 채우러 나갔었습니다.
갔다가 들어왔는데, 어떤 자매님이 제 자리에 앉아 계시더군요.
제 가방과 저랑 같이 온 형제 가방은 옆쪽으로 옮겨져 있구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자리를 먼저 맡았습니다. 두 칸 뒤에 자리가 있으니 그쪽에 앉으시면 어떨까요?
우리 둘 자리가 있는 곳은 여기 밖에 없어서요.
이렇게 얘기했는데, 기분이 나쁘셨나 봅니다. 좌우지간 그 자매님이 뒤로 이동하셨는데, 그 이후로 제 맘이 못내 불편했습니다.
제가 잘못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저의 권리라고 하더라도 양보했어야 했는데, 이런 생각이 너무 들었습니다.
예배 끝나고 혹시라도 보게 되면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끝나고도 못 만났습니다.
좌우지간, 이런 불편도 감수하지 못하는 저의 모습을 많이 반성하면서
화요모임 찬양끝나고 설교 시간에 계단에 앉아 있는 자매님들께 자리를 양보하고 계단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어느 컴퓨터 대리점에 노트북 수리를 맡겼습니다.
맡긴지 두 달이 되도록 고치지 못하고 수리 업체 핑계를 댑니다.
그러면서 두 달 지난 후 저보고 전화를 하면서 수리 업체에 재촉하랍니다.
수리 업체는 부품을 외국에서 주문해야 하는데 단가가 안 맞아서
그 노트북 같은 부품을 찾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제 노트북은 굉장히 오래 되어서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이거 기약 없는거 아니냐? 그러니 그렇다고 합니다.
좌우지간 15만원이라는 돈을 대리점에 수리 비용으로 맡겼는데, 그 쪽에서 발뺌을 합니다.
끝까지 싸워서 받아내려다가 기독인으로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을 포기한다고 하면서 그냥 노트북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도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지만, 그 15만원을 가지고 끝까지 집착하는 그 대리점 주인을 볼 때도 안타깝습니다.

제 집 앞은 일방 통행 도로입니다. 제 집앞에 차를 주차 잠시 동안 주차했는데(이곳에는 자기 주차자리는 없구 그냥 먼저 차를 주차하는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건너편 집에서 차를 빼라고 전화를 합니다. 화를 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동안 주차하지 않았구요 요 며칠만 주차한건데, 계속 차 주차했다는 건 오해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들을 생각은 안하고 무조건 윽박지르더군요.
생각같아선 화를 내고 싸우고 싶었지만, 그냥 그분께 알겠으니 그분의 차를 계속 거기다 주차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제 돈을 들여서 저는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겨우 거주자 주차 자리를 신청하고 거기다 주차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면들이 있습니다. ^^;;;

한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네요. 바빠서... ^^;;;
아래는 지난 주일 화천의 교회 학생부에서 설교했던 내용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2:6, 누가복음 1:46-55)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베들레헴의 상태를 한글 성경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마태복음 2:6

이 구절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베들레헴이라는 땅의 규모나 상태 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땅은 그다지 유명한 땅이 아니고 한글 성경 번역에 의하면 유대 고을 중 가장 작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영어 번역은 이것과는 약간은 다르지만 (least among the rulers of Judah; NRSV) 의미상 베들레헴이라는 곳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베들레헴이 가장 작지 아니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마리아의 노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잉태하고 친척의 집에 갔을 때, 엘리사벳이라는 여인이 마리아를 보고 여자 중에 복이 있는 여자이며 태중에 아이가 복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 때 말한 내용이죠.
누가복음 1:48절에 보면 마리아는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말하고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천함이란 NRSV에서는 lowliness라고 표현하고 있고, NASB에서는 humble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외부적 상태의 낮음을 표현하는 일차적 의미이외에도 내부적 상태의 심리를 표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좌우지간, 마리아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좋은 계층에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이제는
위의 두 가지의 공통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들레헴 - 이름 없는 곳
마리아 - 비천하다고 자신을 생각함

에서

베들레헴 - 더이상 작은 곳이 아니다.
마리아 - 만세에 복이 있다 일컬으리라.


이 전환을 이끌어 내게 된 과정 가운데 있는 분은 누구실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환경적으로 베들레헴과 같은 지역에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마리아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고 무시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이상 이름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작은 존재가 아닙니다. 비천한 존재가 아닙니다.
존귀하며, 복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모든 것들이 이성을 넘어선 차원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이성을 주신 이유는 이성을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지 그것을 마비시키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니다.
이성에 대한 필요 이상의 거부감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많은 장애를 주고, 또한 이단으로 빠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전에 어떤 한 선교사님을 만난적이 있다.
그 선교사님은 King James Version 에 대해 거의 광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분이셨다. King James Version 을 줄여서 KJV 라고 적겠다.
KJV 만이 절대 오류가 없는 성경이며 문자적으로도 절대 틀리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성경 버젼을 읽을 때 문자 하나 하나 자체가 살아서 역사하며 감동을 주는 것이 대단하다고 강조하셨다.

어떻게 보면 참 신앙이 좋아보이시고 그 열성이 나무랄데 없이 성경에 충성적이긴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금방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애초에 기록될 때,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는데, 이전에 한 번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그 무한한 뜻과 정확한 개념들이 정확한 단어로 표현될 수 없을 뿐더러, 원어 성경을 번역하여, KJV을 만들어도 정확히 번역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시를 영어로 번역할 때 가장 정확한 영어 단어로 옮긴다할지라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치다.
상식을 넘어선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의 맹신은 부작용을 낳고 다른 사람을 배타하며 기존 기독인들에 대해서 비난을 하기 쉽다.

얼마전에 집에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전도하기 위해 왔다.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셨다고 하면서 유월절을 왜 안지키느냐? 안지키면 구원이 없느니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성경의 예수님이 유월절 지키자라고 언급한 부분을 가르키면서 오늘날에도 유월절의 그 날짜 그대로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큰 소리를 쳤다.
그 성경 구절을 마태복음 26장 18절에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자라고 하신 부분을 언급했다.
참 어이없는 일이다.
유월절을 언급하신 일은 유월절 날짜 자체가 중요-물론,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유월절에는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해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성만찬을 베푸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실 피와 찢기실 살에 대한 부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언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면, 유월절 자체에 대한 부분은 한 줄이지만, 성만찬에 대한 부분은 17절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월절만 절기로 지키신 것이 아니다. 바로 앞부분에 보면 무교절에 대한 언급도 나와 있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의 절기를 규례를 따라 지키고 계신 것이다.
좌우지간 전도하러 집에 왔던 사람들에게 기분이 별로 안 좋았던 것은 자기들만 얘기를 하고 내 얘기는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남은 인격적인 상호 반응인 것이지 자기 이야기만 쏟아내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그런 태도는 참 답답하게 만든다.
그분들이 바로 성경에 대해서 알고 구원의 진리를 바로 알게 되길 정말 마음으로 바라고 기도했다.

좌우지간,
성경을 문맥을 따라 읽어야지 어느 한 부분만 따와서 그것을 자기의 해석에 맞게 짜집기 해 놓은다면 어떤 주장도 다 할 수 있다.
그것이 성경을 구절 그대로 맹신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다.

우리가 일반 책을 읽는다하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요지를 파악하는데, 성경은 최소한의 그런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책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례가 많이 있다.

그런 부분들이 얼마나 많은 이단을 발생하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고, 최소한 기독인들이 그런 어의없는 이단들에게 혹하지 않도록 성경을 전체적 맥락에서 읽어보길 간절히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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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는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화제를 주었고 감동을 주었던 영화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고난을 당하셨는지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고통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느끼라는 취지의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정말로 많은 부분에 있어서 신앙의 회복등 긍정적인 측면을 주었지만, 난 다른 면에서 부정적인 영향 또한 많이 주었다고 생각한다.

일단 영화의 목적이나 시간상의 제한으로 인하여, 예수의 고난 측면에 초점을 맞추게 된 부분인데, 그럼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측면을 소홀히 하였다.
사실,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정 및 세상에서의 태어남과 사역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부터 부활까지 이르는 것이며 결국은 영광스러운 부활 생명, 영생에 대한 부분으로 하이라이트 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 부분을 다루는 데는 미약했다.
즉, 우리에게 눈물을 짜내기는 했지만 웃음은 거둬가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예전에 SBS(School of Biblical Studies)에서 공부할 때, 4복음서에 대해서 성경을 그대로 읽어가며 영화가 전개되는 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서에 따라서 다양한 성격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참 유머와 웃음이 넘치고 사람들에게 농담도 하면서 열정적으로 다가갓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고 있었던 복음서의 영화였다.(어떤 복음서에 대한 비디오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SBS direacror도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일 좋아한다고 하였다.
달라스 윌라드 이야기를 어쩌다 많이 하게 되는데, 그는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서 웃음에 대해 이런 말을 적어 놓았다.
 
"(초략) 웃음은 진정한 공동체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니 웃음이 건강에 그토록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웃음은 구속의 상징이기도 하다. 모든 피조 세계에서 구속보다 더 큰 부조화는 없기 때문이다. 구속이 이를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시126:1-2)"
그리고 예수에 대해 말하기를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듯이 세간에 굳어진 예수의 이미지는 그분이 재미있고 매력 있고 사랑스러운 분임을 전혀 느낄 수 없게 한다. 복음서 도처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그분께 보인 반응을 보면 그 이미지가 완전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인간적 관점에서 그분은 당대 지도자들이 인기를 시기하여 죽일 만큼(마27:18) 매력 있는 사람이요 강력한 연사였다. 그분은 유머의 대가이셨고, 여느 훌륭한 연사와 다를 바 없이 듣는 이들이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머를 즐겨 사용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파티의 손님 목록에 그분을 올릴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예수를 지식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만큼 함께 지내기 즐거운 명랑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닌가."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복있는 사람 펴냄, 324p.]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또한 많은 믿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들의 열정과 그들의 사명감을 보았을 때, 그들은 어떤 모습을 지녔을까?
아마도 많은 환경의 어려움이 있지만 정말 그들의 모습 속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쳤을 것이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성만찬 예식을 할 때 분위기는 교회사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즐거움 속에서 성만찬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부활에의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 생명, 그리그 그 풍성함, 천국의 기쁨등이 그 안에 넘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인들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그 즐거움이 그들의 얼굴속에 가능한가? 또한 나의 얼굴속에 가득한가?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하다는 말이 이웃 사랑과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제자화 하고 변화시킨다는 것과 대치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 것이다.

오늘날, 사명감을 가지고 사회의 부조리나 이웃에 대한 소외 현상등을 고치려고 하는 어떤 기독인들의 모습에는 그 문제에 대한 무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으로 그 영역들을 제자화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기쁨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넘쳐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처에서, 그리스도의 잔혹사에 초점을 맞추는 형식의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우울하다. 어둡다. 무엇인가 그들을 얽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죽임 당하신 것이 그토록 원하셨던 우리를 향한 생명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예수님은 자신이 그런 고통을 당하셨어도 아마 우리들을 향해서는 이 세상 가운데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 풍성하게 흘러나오는 기쁨과 평안을 원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 불균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며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갔던 수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기쁨을 얻게 되었던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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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어떤 목사님을 본 적이 있는데, 싫다는 사람 억지로 잡아두고 그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라고 강요하여 고백을 이끌어냈고, 그러면서 이제 당신은 영생 받았으니 기뻐하라고 말하는 분을 보았다. 난 그 주변에 있으면서 그 강요당한 사람의 찡그리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 주어지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인가?

오늘날, 이런 모습들이 얼마나 기독교를 무례한 하나의 단순한 종교로 만들고, 이런 과정을 통해 기독교인화된 사람들의 변화되지 않은 즉, 중생(regeneration)되지 않은, 도덕적으로 문제있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기독교인들을 양성해 왔는지 모른다.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이 영생에 대해 언급한 구절은 요한복음 17:3절(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이 유일하다면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의 성경적 의미는 단순히 믿는 다는 고백이 아니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맺는 관계이며, 삶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영생이다. 영생이라는 것은 사후 세계를 믿는 사람들이나 또한 있다고 심증적으로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있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개념이다.
기독교에서 영생을 사실 너무도 단순화 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이야기하면 되는 것처럼 공식화하여 말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삶 속에서나 사회적으로 어떤 행동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아도 믿으니까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왜냐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곧 영생을 통행증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겨지는 개념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라스 윌라드는 이런 개념을 거부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영생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사실, 예수를 믿는 다고 이야기할 때, 성경에서는 예수를 성도들의 신랑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성도들을 신부라고 표현하고 있다. 결혼의 관계와 같이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를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혼 서약을 할 때, 신부측에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신랑을 믿고 따르며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취지의 서약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주로 영접하기로 한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를 주로 믿습니까? 믿습니다. 이런 형식적인 고백보다는(물론, 진심이 담겨 있는 고백이라면 상관없다.)
예수를 주로 따르기로 고백하십니까? 어떤 어려움이나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따르시겠습니까? 또한, 예수가 보여주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길을 따르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따른 고백이 더욱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성경의 문자적 무오류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SBS에서 성경을 공부할 때(SBS는 주석보다 inductive method를 사용하여 성경 자체에 초점을 맞추며, 성령의 계시하심과 context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해석한다.) 성경을 참 많이 봤던 것 같다.
그 때 당시 느꼈던 점에 대해서 적어보고자 한다.

성경이 놀라운 것은, 성경에는 바르다고 생각되는 것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실수나 죄악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죄악상들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성경은 솔직한 책이며, 가식을 거부한다. 또한 인간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성경이 원래부터 완벽함을 추구했다면, 믿음의 조상들의 실패적인 모습이 기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내용에 대한 부분(part)의 인간적 실수나 부족함들이 용납되지만, 왜 기록상에 있어서 실수나 부족함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서 포장하질 않으신다. 있는 그대로 보시며 있는 그대로 성경에 기록되게 하셨으며,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다.

성경을 기록했던 성경 기자들은 어떠할까?
만약, 성경이 문자적으로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의 잘 통제받는 존재로, 자유를 부여하지 않은 하나님으로 여겨질 수 있다.
성경에는 분명, 실수적인 문자의 기록들이 있다. (여러 요인에 의해 문자가 잘못 기록되어 있을 수 있다. 알다시피, 성경은 오랜 세월 동안에 걸쳐서 형성되어 온 것이지, 이것이 성경이라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나타난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심(실수조차도, 부족함조차도 사용하심), 동역자로 삼으심등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과 은혜를 보여준다.

성경에 실수적인 기록들이 있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등이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 기자의 기록과정에서 문자의 실수적인 부분들이 하나님의 신성을 손상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은 성경 기자를 로보트처럼 만들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어야 한다라고 전제를 만들어 하나님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또한 제한할 수 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행하심은 오류가 없다.
그러나, 성경 자체의 문자적 표현들에 대해서 오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는 다소 위험한 표현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깊은 생각과 그 정확한 의미를 어떤 문자에도 정확히 담아낼 수 있을까? 문자라는 것은 한계가 있는 표현이다.
나 조차도 나의 어떤 감정과 생각들이 한국말의 단어로 정확히 표현될 수 없는 그런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의 문자적 오류가 전혀 없다고 사용하고 싶은 심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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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다가 내 안에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적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기로 결심하였다.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위로가 있으며 평안과 기쁨이 있다.
물론, 삶이란 그리 쉽지 않다. 나에게는 여전히 어려움들이 많이 있고, 내 머리를 아무리 굴려 보아도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는 것들도 많이 있다. 물론, 내 마음 속에는 그런 어려움들이 해결되길 솔직히 원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과정을 통한,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내 안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디서 이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될까?
예수만이 오직 유일한 위로시며 영원한 소망되신다.
그렇다면 이 영원한 위로와 소망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거리에 나가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전한다.
어떤 사람은 과격하게 전한다. 과격한 구호를 외치는 몇몇 사람들을 지하철에서 볼때, 거리에서 볼 때, 어찌 보면 무섭게 느껴진다. 물론,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비단, 그런 구호를 외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예수를 전하는 데 무섭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쳐다 보는 눈빛이 너 그렇게 살면 안돼. 너 지옥의 길로 가고 있어 뭐 이런 식의 내재된 협박이 느껴진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제한이 없다. 그런 사람들을 꼭 잘 못 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싫다. 내가 평가하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좌우지간, 이런 생각들이 예수를 떠올리게 했으며,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믿도록 전했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마태복음을 쭉 넘기면서 살펴봤는데,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증거했던 메세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에 대한 메세지였다.
이 메세지의 어감은 어떠했을까?


너희 회개 안하면 다 멸망할꺼야 이런 식의 메세지였을까?

4:23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4:23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4:24

뒷 구절들을 살펴 봤을 때, 나는 쉽게 예수님의 메세지의 초점을 잡을 수 있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에 대한 메세지의 강조점은 뒷 부분 천국에 있다는 것이다.
천국이란 어떤 것인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이 고쳐지는 그런 것에 관련되어 있다. 23절...

즉, 예수님의 메세지는 세상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에 고통받고 힘들어 하던 사람들에게 위로함을 주는 메세지였던 것이다.

이것을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이렇게 예수님이 전하셨을 것 같다.

 
세상 가운데 어려움과 고통들, 병들로 인해 힘들어 하는 여러분들. 이제는 더이상 여러분들을 사로잡고 있는 어두움의 영들에서 벗어나고, 회개하여 내게로 오십시요. 여러분들은 이제 새로운 희망과 위로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안에 있는 힘듬과 어려움들이 내게 나누어질 때, 나는 여러분들의 약함들을 고칠 것이고 천국의 소망을 줄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나아왔을 때도
예수님은 8:3절에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라고 말씀하셨다.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할 때,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8:7
세리와 죄인들이 왔을 때,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는 것처럼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9:12,13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을 만지며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은 딸아 안심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9:22
특히, 예수님은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과격하게 말씀하신 부분이 있다. 화 있을진저로 시작되는 부분들...
23장에 나온다. 그 대상은 누구냐면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약하고, 힘든 자들, 죄인들을 돌아보고 위로할 생각은 안 하고 정죄하고 자신들은 위선적인 행동을 보였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전도 언어는 바로 사랑의 언어이셨다.
힘들지? 내게 오렴. 내 딸아, 내 아들아. 괜찮다. 어려운 점들을 내게 말하렴 내가 고쳐주겠다.
이런 표현이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방식은 어떠해야 할까?
주변에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면
세상 가운데 많이 힘드시고 어려우시죠? 힘내십시요.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힘들고 어려운 점을 고쳐주실 겁니다. 예수님의 위로와 평안이 넘치길 기도하겠습니다.
아마, 이런 표현들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과격한 표현을 들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믿는 다고 하면서도 위선을 행하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하고 꾸짓는 사람들이다. ^^;;;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거꾸로 되어 있는 현실들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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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꼽으라면
난 단연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진실하고 솔직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어제, 높은 뜻 숭의 교회 담임이신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그 설교가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그분에게 가식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자신의 상태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내어 놓고 사람들 앞에서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신앙을 우리는 가식적으로 만들 때가 많은 것 같다.
정작 삶이 힘들면서도 힘들지 않다고 하나님 앞에서 가식적으로 말하고, 감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나라가 정말로 고민되지 않으면서도 솔직히 나라의 문제들이 고민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말하지 않고, 오히려 고민되는 것처럼 가식적으로 기도할 때가 많다.

또, 개인적인 문제들이 힘들면서도
마치, 그런 것은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문제들을 아뢰지 않고
그냥 부담감에서 뭔가 이상적이고 고상하다는 기도 제목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 놓는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솔직하고 진실하고 싶다.
솔직하고 진실 할 때, 나의 부족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며,
그 사랑과 은혜를 깊게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을 향한, 이 나라를 향한,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먼저 글에서 하나님이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실 것이 있다는 마음을 주셨는데,
그것은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 놓는 것이다.
분노가 되면 분노의 목소리를, 불공평하다면 불공평의 목소리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것이다.
시편 처럼...

오늘 아침에 시편을 기도했다.
읽는게 아니라
내 목소리와 감정을 넣어 시편 그대로를 기도했다.
시편이 내게 놀랍게 다가 왔다.

마지막으로 토머스 머튼이라는 사람이 쓴 글 중 일부를 적어 보겠다.
필립 얀시의 기도라는 책에서 인용되었던 부분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가 자기중심적이냐 아니냐에 특별히 개의치 않으신다.
주님은 그저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실 뿐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자신의 필요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일종의 교만이다. 마치 모자라는 게 전혀 없다는 듯,
하나님께 의지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뜻에 따라 물질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듯 행동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에 올려놓으려는 또 하나의 교활한 술책이기 때문이다
.

저는 지금 조그만 시골 읍내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역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께서만 사역하시죠. 저는 그냥 하나의 통로가 될 뿐인데, 뭐 이런 거 하나  하나까지 가려서 쓰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학생부 아이들을 가르치고 같이 예배 드리고 있는데, 7명 정도입니다.
안 나올 때는 3명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그 조그만 읍내를 답답해 하면서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지긋지긋해 보이고, 답답해 보이는 그 생활에서 말입니다.

이 작은 읍내에도 여러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교회 저 교회 마다 특색들이 있습니다.
아내가 어떤 교회를 사정상 다녀오게 되었는데,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목사님이 교인들을 참 잘 위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위로가 농사일로, 또는 여러 가지 힘든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참 힘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제 안에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제가 SBS를 하면서 나름대로 결론 내렸던 것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한 재림하실 예수를 기다리며 십자가를 짊어지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욕심에서 이 모든 것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삶에서 지치고 힘들고, 일상 조차도 힘든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라는 말이 어떻게 다가올까요? 물론, 그것이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해야 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낀 것은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 제가 현재 이 상황에서 만나는 이 사람들에게 어떤 하나님의 방법과 어떤 하나님의 전달하시는 마음들이 필요한지를 물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급하게 의욕만 앞세워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제 안에 부족함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 안에 더욱더 넘쳐야 할 것 같습니다.
요새 어딜가나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bdts 동기 모임때 뽑은 말씀 카드도 기도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7,8

왜, 하나님은 내게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는지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물론, 지금도 잘 모릅니다.

나의 기도생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 직접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지는 않지만, 거의 하루종일 하나님 생각과 나의 모습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말을 안하고 있다면 거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 제 머릿속이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도대체 기도란 무엇일까?
내가 하고 있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일까? 아닐까?

그러던 중, ihop의 24시간 기도 실황에 대한 것을 찾았습니다.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니 마음이 뜨거워지더군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도 꼭 ihop과 같은 곳에서 기도했었는데...

어제, 오늘 아침 내내 ihop 기도 실황을 보면서 들으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학교에 책 반납하러 가면서
도올 선생님의 도올 달라이라마를 만나다라는 책(총 3권인데)의 1권을 마저 읽고 2권 앞부분을 읽었습니다.
불교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석가의 깨달음이 참 깊구나라는 생각도 했죠.
도올은 불교가 연기라는 것으로 다 표현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으며, 원인이 제거 된다면 결과도 소멸되는 그런 순환의 흐름.

아무튼, 책을 다 반납하고 친구랑 이야기를 한다음, 앞에 서점에 갔는데, 갑자기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필립 얀시의 기도라는 책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기도를 잘 모른다는 생각에서 샀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읽는 동안 많은 부분 생각하게 되었고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나를 솔직히 그분 앞에서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진정 솔직히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

제 기도에서 부족한 점이
하나님 앞에서 저를 진지하게 하나 하나 다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 분께 초점을 많이 맞추고 있지만,
제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 할 때, 자기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은 기도 할 때,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어떠한 말씀을 들으려고만 노력하지 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의 솔직한 반응을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순간 순간 느꼈던 감정들, 내가 필요한 것들, 내가 부족한 것들, 나의 화남과 기쁨들. 어느 것 하나 내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나누었는지 반성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나의 감정들을 쉽게 나누면서 하나님에게는 나누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시편이 갑자기 생각났었습니다.
시편 기자들의 원망과 화남의 고백들, 절망의 고백들, 억울함의 고백들이 다 하나님 앞에 소리쳐서 나누어지는 모습들 말입니다.

저도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나누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도올 선생님의 책에서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냐면, 자신의 상황을 나누고 이야기할 절대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독한 혼자만의 싸움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슬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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