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우스꽝스럽고 당혹스럽게 여겨지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저는 큐티를 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약간의 위험성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말씀 묵상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말씀 묵상의 방법이 우리에게 은연중의 위험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예배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은혜를 만들어내지 말고 하나님만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예배 인도자로 섬겼습니다.
정말 중요한 예배는
회중들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불붙는 떨기 나무에서 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예배의 분위기나 감정 적인 것에만 자신을 맡겨 은혜 받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말씀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묵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됩니까?
말씀 묵상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취해서 적용점을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큐티를 보통 하게 될 때
우리는 말씀을 여러번 읽고 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묵상한다음
하루에 적용할 점을 찾습니다.

여러분의 상황 가운데 맞는 말씀을 여러분들이 취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에 적용하려고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말씀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다면
그 말씀 묵상은 제대로 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여러분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여러분들의 삶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태여 적용점을 만들지 않아도
길을 가는 도중에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살아서 여러분을 이끄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창세기 1장을 공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는 것을 공부하고 묵상했습니다.
저는 어떤 적용점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 인간을 향한 존엄성의 부여를 느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지하철 역을 내려가는데
때가 꼬질꼬질한 노숙자 분을 보았습니다.
그 때 저는 가지고 있는 돈의 일부를 그분에게 주었는데
그때 이런 말씀이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분이다.'
그 노숙자 분이 인사할 때, 저는 더 허리를 숙여 그 분을 존경하며 인사하였습니다.

말씀이 사역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적용점을 찾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적용점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은혜를 억지로 자아내려는 묵상은 바른 묵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만으로도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마치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 알지 못해도
길을 가듯이
우리의 삶을 말씀이 스스로 사역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이것뿐.  (0) 2007.10.22
신앙의 단계  (0) 2007.10.19
성경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0) 2007.09.14
선악과 사건...  (0) 2007.09.01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자.  (0) 2007.08.14
만약 성경의 모든 부분들이 정말 분명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약간은 제한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어떤 계층에게는 그 말씀이 정말 많이 다가오겠지만은,
어떤 계층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이 어떤 의미에서는 훼손될 가능성도 있다.

성경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해석에서 열려져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말 명확한 답변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답답한 일이지만
구원의 소식을 성경을 통해 모든 계층에게 전달하려는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곳에서 자기 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는 위험이 따르며
하나님의 천국의 확장성을 제한하는 한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태까지 배웠던 것의 고정관념에 묶여 있지말고
성경을 직접 붙들고
성령 하나님의 조명아래 기도하면서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 성령의 빛 아래서 말씀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며
각자에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을 일깨워 주실 것이다.

사람을 다양하게 만드시고, 그 고유한 개성을 주신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도 각자에게 가장 맞게끔 그러면서도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계시하실 것이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다른 면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며
하나님의 사랑의 광대하심을 다시한 번 느껴본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의 단계  (0) 2007.10.19
하나님의 말씀이 사역하는 것.  (0) 2007.10.06
선악과 사건...  (0) 2007.09.01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자.  (0) 2007.08.14
마태복음 팔복  (0) 2007.08.13

오늘 모 형제랑 이야기하는 도중 불현 듯 떠오르는 것이 있어 적어 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사랑의 관계 아래 들어간다는 것은
책임성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은 바람직한 사랑의 태도가 아니죠.

살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과 특별한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특별히 헌신되고 서로를 돌아보아 줄 결혼 관계 같은 거 말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에게 상처를 받게 되고 후회 하는 일도 가끔씩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이혼률이 높은 이유를 살펴보면
성격차라든가, 배우자의 불륜등의 이유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즉, 살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신의 눈을 다른 데로 돌리게 된다는 거죠.
어떤 사람이 지금 있는 배우자 보다 더 좋은 것 같다, 아니면, 이런 생활들이 더 나에게 자유를 주고 더 행복한 생활을 줄텐데...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선악과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눈을 돌리게 되는 어떤 선악과와 같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바로 우리가 서로에게 책임성 있고 구속되는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려고 선악과와 같은 것으로 향하면서 우리가 결단을 할 때
관계는 깨어지게 됩니다.

이혼 같은 문제도 그렇습니다.
다른 상황, 다른 상대에게 눈을 돌릴 때, 그 상황이나 다른 상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쪽으로 우리의 마음을 옮길 때 가정이 깨어집니다.
그러면 그 깨어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힘든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혼으로 인하여 자녀들의 상처들 괴로움들 같은 것 말이죠...
그것은 파괴적인 결과, 죽음과 같은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먹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 관계어서 벗어나 다른 좋아보이는 그런 쪽으로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인거죠.
결국 그런 것들이 죽음과 같은 상태를 만든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 더 큰 사랑이었죠.
죽음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으니까요...
계약 관계, 책임성의 관계 자체를 더 초월한 아가페의 사랑의 단계...
정말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호세아서를 보면 서로에게 구속된 사랑의 관계에서 더욱더 확장된 사랑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자신을 내어 주신 그 사랑
고전 13장의 사랑에 대한 속성들을 보여주는 것들....

아무튼, 감사하고 놀랍지 않나요?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말씀이 사역하는 것.  (0) 2007.10.06
성경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0) 2007.09.14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자.  (0) 2007.08.14
마태복음 팔복  (0) 2007.08.13
편견  (0) 2007.08.10
오늘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하나님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어떤 이상적인 것을 설정하고 거기에다가 하나님을 갖다 맞추는 경향들이 많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시고 힘없는 사람들을 돌아보신다 이런 쪽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은 모든지 이런 틀에 맞춰 하나님을 바라본다.
말씀을 봐도 다 그런 틀에 맞춰서 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열망이 지나치게 강해, 민족을 향한 사랑과 민족을 위한 쪽으로 치중하게 되고 그에 따라 말씀을 또한 해석한다.

해방신학이니 민중신학이니 여성신학이니 토착화 신학이니 이런 종류의 용어들이 정말 많다.
이런 것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나쁘게 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그 틀안에 갇혀서 자신의 이상에다가 하나님을 갖다 붙이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틀안에 신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갖다 붙히는 일을 범하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는 것, 하나님을 겸손한 마음으로 알아가는 것
난 이것을 소망한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0) 2007.09.14
선악과 사건...  (0) 2007.09.01
마태복음 팔복  (0) 2007.08.13
편견  (0) 2007.08.10
내려놓음?  (1) 2007.08.02

8월 12일 화천 모교회에서 학생부 설교 내용 요약(주일마다 마태복음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1-12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 부분은 굉장히 유명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팔복에 대한 부분이죠.
마태복음 5장부터는 예수님의 산상 수훈에 대해서 나오고 있는데, 특히 마음의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쓰여진 시대 배경을 살펴보면, 로마의 압제를 당하던 시대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로부터 고생을 당하고 있었고, 또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로부터 율법주의에 비추어 비난을 당하던 때였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민중들이 경제적으로 살기도 굉장히 힘들었고, 거기다가 세리 계급들은 그나마 경제적으로 겨우 먹고 살던 민중들의 돈을 수탈하였습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의 삶을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병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며, 굶주려도 그런 굶주림을 해결 받을 수 없었던 일들도 많았겠죠.

더군다나 그들을 더욱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종교적인 행위를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민중들을 더욱더 힘들게 했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보고, 너희들은 죄를 많이 지어서 이런 병에 걸렸다라고 비난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들한테, 왜 그렇게 헌금도 많이 내지 않느냐라고 이야기하고, 자신들은 종교적으로 굉장히 잘 산다라고 잘난체하고 힘없는 사람들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많이 보였던 바리새인들의 모습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민중들이 가졌던 아픔과 상실감, 자괴감, 소망없음 등은 말할 나위 없겠죠.

아무도, 병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들, 가난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았을 때 바로 예수님은 다가가셔서 이렇게 말하십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 겉으로는 내세울 것이 없어도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의를 행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너희들이 진짜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팔복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시고 위로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세지가 담겨 있는 곳입니다.
(팔복은 우리가 그런 상태가 되면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상황과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을 향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즉,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위로하시며 힘 주시는 메세지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하면 복이 있다라는 메세지가 아니라 이미 심령이 찢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희가 정말 복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시는 메세지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우리 자신을 위장하고 가식적으로 보이길 좋아합니다.
마음에는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도 없으면서도 교회 나가서 내가 이만큼 봉사하니 난 하나님을 참 사랑하지 않아? 내가 이만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잘 섬기니 얼마나 난 겸손한 사람인가? 등의 것들을 은연중에 보이길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면서 마음의 진실함이 무엇보다도 복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마태복음이 특별히 마음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죠.

팔복은 또한 마음에 상처 받고 힘들고 이리저리 치인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왔을 때 그들을 위로하고 천국의 메세지를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힘든 사람들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을 때, 그들의 삶에 더이상 소망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들은 예수께로 나왔습니다.

오늘날, 많은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병 때문에, 아니면,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소외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 올 때,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안으시고 위로하시면서 그들에게 복이 있을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진실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를 예수 앞에 내어 놓을 때 예수님은 형식적인 열심을 보이는 사람보다 예수님은 그들을 더욱더 진실되다 말씀하시면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무시함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손해를 보면서도 의로운 일들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 왜 그렇게 바보같이 행동해? 현대 사회에서는 어떻게든지 자신의 것을 잘 챙겨야 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 자신이 가진 것 없고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도우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천국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우리의 모습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우리를 이해한다 말씀하시고, 사랑한다 말씀하시고 예수 안에 영원한 위로와 소망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여도 묵묵히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사랑과 의로운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악과 사건...  (0) 2007.09.01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자.  (0) 2007.08.14
편견  (0) 2007.08.10
내려놓음?  (1) 2007.08.02
훈련(Discipline)  (0) 2007.07.29
오늘날 언론보도를 보면 그것이 진실이고 공신력이 있어 보이는 것처럼 믿겨 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한 기사는 기자들이 그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인격적인 교제나 정보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사를 어느 한편만 부각시켜 쓰기 때문에 그 정보를 접하는 우리는 편견을 가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좋은 태도는 그 기사가 보도한 그 사람에 대한 부분은 저런 일부분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싶습니다.

청년사역으로 유명한 S교회의 J목사님에 대한 것도 한 번 적어 보고자 합니다.
J목사님에 대한 보도가 기독언론 사이에서 여러 번 나왔었습니다. 그 골자는 그 목사님은 지나치게 성공주의적인 신앙을 주장하며 그것을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열심히 자기가 맡은 영역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여러분은 성공할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젊은 계층일수록 동기부여를 집어 넣어주는 말을 많이 하면 자극을 받게 되어 끌리기 쉽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한국 경제의 상황을 보면 젊은이들이 취직을 하기도 쉽지 않고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살아남기도 어렵기 때문에, 성공의 방법들을 신앙의 관점에서 제시한다는 것은 기독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좌우지간, 그런 보도를 여러번 접한 저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이분은 성공주의적인 신앙관을 취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약간은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 분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신은 솔직히 성도들의 성공에 관심이 많다. 특별히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바란다.라는 이야기였고
제 마음속에 그 말이 많이 남았습니다.

목사라는 입장에서 가난하고 힘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잘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바라는 것이 성공주의라는 다소 부정적인 말로 표현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마음의 진정성을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인격적인 교제가 중요하며 알아가는 노력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와 사람들과의 관계도 인격적인 교제가 더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오늘날, 너무나 매체들이나 인터넷 공간들이 서로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게 하지 않고 단순히 공식처럼 사람들에 대해 한 부분에 의해 단정짓고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자.  (0) 2007.08.14
마태복음 팔복  (0) 2007.08.13
내려놓음?  (1) 2007.08.02
훈련(Discipline)  (0) 2007.07.29
지금은 희미하지만 완전해지리라.  (0) 2007.07.27

요새 기독교 출판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은 내려놓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내려놓음, 자기 비움, 낮아짐 등등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면 이런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간증들이다.
자기가 유명한 대학을 나오고 그에 걸맞는 지위를 가질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내려 놓고 조금은 힘든 길을 가고 있는데, 그것이 참 축복이다라는 등의 비슷한 메세지들을 담고 있다.
물론, 이 모습들이 꼭 나쁘다고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내려 놓음이란 무엇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려 놓는 것이 내려 놓음의 의미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
욕심을 비우고 다른 좋은 일을 하고 섬기는 것이 참다운 내려 놓음인가?

내가 생각하는 내려 놓음의 본질은 이것과 틀리다.
내려 놓음이란 내 힘으로만 살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바로 내려 놓음의 삶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보기에 힘든 곳에서의 삶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내려 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다 보니 그러한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저자들도 그런 의미에서 내려 놓음을 이야기하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하지만, 은연중에 우리의 의식 속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내려 놓을 때 하나님이 복 주시고 크게 쓰시리라 하는 기대감이 있다.
그래서, 오지로 가야 할 것 같고, 지금의 삶을 내려 놓고 뭔가 신앙 좋아 보이는 것을 전임으로 해야 할 것 같은 생각들에 사로잡히기 쉽다.

한국 사회에서 신앙 좋다는 어떤 기독인들을 보면 직장 생활 가운데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이나 전임 사역자들을 부러워 하기도 한다.
그것들이 마치 내려 놓음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사역자로 헌신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냥 일상 생활 가운데 사는 것을 답답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자기가 권리포기를 못하고 현실에 안주했다고 한다.
즉, 내려 놓음을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내려 놓음이라는 잘못된 개념들이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들고 자신의 현재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며 방황하게 만드는 예이다.

다시 말하지만,
내려 놓음이란 내가 내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내려 놓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적고자 한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눅 17:10)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팔복  (0) 2007.08.13
편견  (0) 2007.08.10
훈련(Discipline)  (0) 2007.07.29
지금은 희미하지만 완전해지리라.  (0) 2007.07.27
아프간 사건을 생각하면서.  (0) 2007.07.25
요새 제가 사역하는 교회에서 학생들에게 마태복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점점 말씀을 재밌어 하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

오늘은 4장 부분을 가르쳤죠.
4장은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러 가시는 장면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시험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40일의 시간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통해 어떤 상황가운데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 있는 의미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던 것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닮아가라는 예를 보여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사단이 속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40일 주야를 금식하신 예수님께 다가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단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속여서 자신의 말을 듣게 하려고 합니다.
너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떡덩이가 되게 해 봐라. 이런 식으로 접근하죠.
이런 식의 접근은 에덴 동산에서도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너희더러 동산 나무의 모든 과일를 먹지 말라고 하였느냐?(3:1) 이렇게 물어보죠.
이런 식의 질문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존심을 건들게 하고, 기분나쁘게 만들어서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이나 존재의 의도대로 따르도록 만들곤 합니다.

약간 비약적인 이야기지만,
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있죠. 어떤 권력이나 부를 가진 사람에게 사단은 이런 마음을 불어 넣습니다. 너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 그 정도도 못하느냐? 이런 일을 함으로 너의 힘과 능력을 보여봐 이런 식의 질문입니다.
이런 식의 마음을 불어 넣음으로 사단은 인간을 파괴의 길로 몰아 넣으려고 합니다.

이 질문은 두 번째 시험에서도 나옵니다.

첫번째 질문의 두번째 부분은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는 부분입니다.
바로 앞부분에 예수님이 심히 굶주리셨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굶주렸을 때 가장 원하는 것이 먹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셨는데, 못하실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사단이 떡덩이를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요구에 대해서 내가 사단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겠다라는 말을 하죠. (구체적인 성경의 말씀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4:4)

우리가 지치고 피곤할 때, 항상 우리에게 약한 부분으로 가서 죄책감을 느끼도록 사단은 유도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알콜 중독으로 빠져든다든가, 어떤 사람은 금지된 약물 복용, 어떤 사람은 자극적인 영상등에 빠져 버립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우리에겐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 주신 것처럼 자유 의지의 사용을 사단의 속삭임에 넘어가서 자신을 멸망의 길로 파괴되는 길로 몰아 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길로 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이런 예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어떤 학생이 너무 힘들어서 사단이 이런 속임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힘들지? 자살하는 건 어때? 뭐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사단의 길을 구분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사단은 생명을 파괴하는 쪽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죽이고 멸망하고 파괴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은 사단에 의해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좌우지간 학생에게 이런 파괴적인 생각이 들 때에는, 자신이 자살할 수 있는 일종의 자유의지를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내가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가운데 나를 맡기겠다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두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에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천사들이 너를 받들어서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재밌는 것이 사단도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너를 받들어서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는 구절은 시편 91편 11,12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재밌는 점은, 성경 구절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게 우리의 상황에 무조건 맞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 구절 어느 하나를 딱 떼어서 그걸 자기가 원하는 목적에 사용한다면 그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파괴하는 말씀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런 식으로 말씀을 사용합니다.
집에 찾아와서 성경 어느 구절을 보여주고 기독인들에게 보여주고, 성경을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믿는다고 하죠. 그리고 나서는 성경 구절 이런게 있는데 이것을 믿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물은다음 사람들을 속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말씀 드렸다시피, 성경은 전체적인 맥락, 문맥에 따라서 봐야지 한 구절만 떼서 사용하면 저의 어떤 주장도 다 근거로 댈 수 있습니다.
사단은 이런 전략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속이는 데 내용의 진정한 의미를 변개시켜 이용하는 거죠. 좌우지간 조심해야 합니다.
이 두 번째 시험도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을 상실하게 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두번째 시험은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도 사용하였습니다.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라 이렇게 사람들이 소리쳤죠.
마귀의 이 두 번째 시험이 바로 이 부분과 정확히 일치되지 않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다면 우리 죄를 대속하지 않으셨다면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두번째 시험에 대해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면서 대적합니다.
예수님을 이런 시험 속에 넣으면서 하나님을 자기가 움직이게 하려는 등의 의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단이 자신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마치 하나님 위에 서려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되죠.

세번째 시험은 사단이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을 보여주면서 자신을 섬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주리라고 말합니다.
참 재밌는 것은 이 세상을 사단이 자기의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천하 만국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데,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으로 미혹하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자신을 섬기라고 합니다.
사단이 속이는 영이라는 것을 여기서도 볼 수 있죠.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면서 대적하고 있죠.

복음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구원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예수님의 그 사명에서 벗어나게끔 속이길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 뜻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 가운데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약할 때
또는 우리가 어느 지위에서 힘이 있을 때,
사단은 우리를 유혹하길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살게끔 만들고 하나님을 따르지 말고 사단의 길을 따르길 원합니다.
또한, 사단이 아무 세력도 없는데, 사람들이 속임에 넘어가 사단이 시키는대로 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분명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이 자유의지를 멸망의 길로 가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길로 가는데 사용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견  (0) 2007.08.10
내려놓음?  (1) 2007.08.02
지금은 희미하지만 완전해지리라.  (0) 2007.07.27
아프간 사건을 생각하면서.  (0) 2007.07.25
지난 주 화요모임에 갔을 때의 일 외 2  (0) 2007.07.25
천국이란 어떤 곳일까?
사실 천국이란 개념이 공간적인 개념이라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관계적인 개념이다.
물론, 공간 개념도 배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다. 찬양가사처럼.
그렇다면 우리의 영이 육체를 떠날 때 가게 되는 곳은?
그곳도 천국이다.
사실 두 가지의 천국 개념(관계적, 공간적)을 구분하고 싶지만 마땅한 용어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셨을 때
천국을 보여 주셨다.

어떤 병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치유 받았다.
어떤 귀신 들린 사람은 에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귀신이 떠나가고 온전해 졌다.
어떤 죽었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어떤 굶주렸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풍성한 먹거리를 얻게 되었다.
어떤 자기 만의 학문 세계에 집중했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뜨는 학문의 진일보를 이루게 되었다.
어떤 자기만의 부를 추구했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나누는 것의 행복에 대해 깨닫고 실천하게 되었다.
어떤 소외되었던 어린이들이나 여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더이상 소외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았다.
어떤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천대받았던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더이상 멸시받지 않고 소중한 존재로 여김받았다.
어떤 도덕적으로 문제있었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더이상 정죄당하지 않고 다시 회개하며 참된 삶을 살 수 있는 길로 인도받았다.
어떤 ...
어떤 ...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기 전에도 하나님의 천국은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먹고 살 길이 없었던 과부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서 먹을 것이 채워졌다.
노예 상태로 고민하던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한 인도하심으로 인해 해방되었다.
기타 등등....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더 크게 급박하게 중요하게 다가왔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오고 있다.


그러나,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는 부분적이다.
현재 어떤 사람들은 병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때 치유받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치유받지 못한다.
현재 어떤 사람들은 가난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때 가난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다.
등등...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할 지 그려지지 않는가?
이 어떤 것들이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완전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적들과 가르침들을 통해 보여주셨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공간적, 시간적 제약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 맛보지는 못했다. 부분적이었다. 그러나, 부분이 완전함을 채우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그 부분을 맛 본 사람들을 통해(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천국을 맛 본 사람들을 통해), 그 소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꿈꿔지고 희망을 가지게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천국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천국이 확장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고 소망하고 기대한다.
그리고, 완전한 천국을 향해 나아간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려놓음?  (1) 2007.08.02
훈련(Discipline)  (0) 2007.07.29
아프간 사건을 생각하면서.  (0) 2007.07.25
지난 주 화요모임에 갔을 때의 일 외 2  (0) 2007.07.25
복 있는 사람  (0) 2007.07.23
납치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밤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어리신 분들도 있고, 그런 일이 실제적으로 발생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상황에서 시간들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해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물론, 가게 된 과정가운데 실수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 할 수 있고, 그런 것들이 또한 좋은 측면들을 가로막아서 매도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상의 많은 나라에는 정말 힘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숨 한 번 쉬는 짧은 순간에도 먹지 못해서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고, 병에 걸려 최소한의 의료 혜택만 받으면 살 수 있는데도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낙태로 매년 500만명 이상의 여자 아기들이 살해 당하고 있습니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1&article_id=0001695436&section_id=104&menu_id=104

낙태 뿐만 아니라 태어난 여자 아기들도 그냥 길에 버려져서 죽어가는 일이 허다합니다.
20년동안 무려 1000만명 이상의 여아가 살해 당했다고도 합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2191715571&code=970207

제 인도 친구인 Russal이 버려진 여아를 살리고 키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보면 버려져서 죽은 여자 아기들의 사진이 나옵니다.
http://babyhome2.blogspot.com/2007/02/dear-friends-greetings-from-in-jesus.html

어떤 분들은 한국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다른 나라로 가서 그런 활동을 하느냐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한국은 그 나라들보다 모든 면에서 사정이 좋습니다.

당장 사람이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것을 다른 나라 일이라고 그냥 내버려두기엔 우리는 상대적으로 누리고 있는 행복이 많습니다. 또한, 어찌보면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을 위해서 환경이 열악한 나라 사람들의 희생이 대가로 지불되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노르웨이 사람을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그들이 북한 어린이의 굶주림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노르웨이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도 아니고 정말 보통 노르웨이 시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세계 여러 나라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교육받았고, 주변에 병 걸린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습니다.

그 먼 나라에서도 북한의 어려움들에 대해 인도주의적인 관심을 일반 사람들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참 많이 놀랬고,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좌우지간 이 아프간 사건에서 평소 한국 기독인들의 성숙하지 못했던 모습들로 인해 이번 일이 마녀 사냥식으로 매도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아프간을 사랑했고 아프간의 병든 사람들, 외로운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길 바라고, 더불어 세계의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빨리 평화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훈련(Discipline)  (0) 2007.07.29
지금은 희미하지만 완전해지리라.  (0) 2007.07.27
지난 주 화요모임에 갔을 때의 일 외 2  (0) 2007.07.25
복 있는 사람  (0) 2007.07.23
성경을 읽을 때 이성의 중요성  (0) 2007.07.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