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6장 51-52절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마가복음을 읽다보면 뜬금없이 왜 이 구절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상상을 해 보게 됩니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갔다는 16장 50절 다음에 바로 나오는 구절입니다.
보통의 설교는 이 구절들을 사용하여,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의 삶 가운데 많이 나타나므로, 세상 가운데 환란을 당할지라도 예수를 부인하지 말고 쫓아가자라는 취지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러나, 문맥적으로 볼 때, 마가복음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구절의 삽입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구절은 다른 공관복음(마태, 누가)에는 없는 독특한 구절입니다.
왜 이 구절들이 들어가 있을까요? 어찌보면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 이 구절이 왜 꼭 들어가 있었어야 했던 걸까요?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마가 자신의 모습을 제 3자적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예수를 끝까지 따르지 못했던 자괴감을 드러낸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의 전체적인 주제는 예수는 고난 받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신기하게도 첫 장에서 예수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지 않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부분들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1장 21절부터는 귀신 들린 사람 고친 이야기, 29절부터는 베드로 장모 고친 이야기, 40절부터는 나병환자 고친 이야기, 2장 첫부분은 중풍 병자 고친이야기, 3장 첫 부분은 손 마른 사람 고친 이야기 5장부터는 귀신 들린 사람 고친 이야기 21절 부터는 야이로의 딸 살리고 혈루증 앓는 여인 고친 이야기 등등 정말 많은 기적적인 부분들을 행한 일들이 마가복음 전반부에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아래와 같은 구절이 아래에 반복됩니다.
1:33절에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1:45절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오더라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3:7절에 큰 무리가 따르며 3:9,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4:1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5:21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등등, 정말로 많은 부분에서 예수의 기적들을 보며 사람들이 엄청나게 따르고 몰려 왔다는 표현이 적혀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쯤되어서 마가복음의 저자가 제일 처음에서 소개한 구절을 삽입한 의도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올 줄로 생각됩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잡히셨을 때, 버림받기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그 버림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버림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잡히셨을 때, 제자들이 도망갔고 바로 뒤에 이어 알몸으로 도망친 청년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특이하게 보이는 그 구절에 집중시켜 예수가 철저하게 버림받았음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를 떠나는 것이 시급했으면 알몸으로 도망쳤겠습니까?
그것을 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자신으로 인한 피해로부터 신속하게 도망치기 위해서 알몸으로 갔던 그 청년...
구약에서는 특히, 알몸을 드러내는 것의 수치스러움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기억하고 있는 이 유대 청년이, 그 율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면서까지 도망갔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는 그렇게 버려졌던 것입니다.
철. 저. 하. 게. 버. 려. 졌. 다.
마가복음은 예수는 고난 받는 종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가 고난받았고 철저하게 외롭게 버려졌음이 이 구절에서 하이라이트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버려지셨고, 고난 당하셨고, 외로움 가운데 계셨습니다.
다 우리 때문이죠. 우리의 죄 때문이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죠.

사순절 기간인 요즘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들에게서 버려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면 더더욱 좋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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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1-13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재산을 관리하는 일꾼이 있었는데, 이 일꾼이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2 그래서 그를 불러다가 말했다. 내가 자네에 관해 들은 소문이 어찌된 일인가? 더 이상 자네를 일꾼으로 쓸 수 없으니, 자네의 일을 정리해 주게.
  3 그러자 그 일꾼은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이 내 일을 빼앗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구걸을 하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다.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날 때, 사람들이 나를 집으로 맞이하게 만들어야겠다.
  5 그 일꾼은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렀다. 첫째 사람에게 물었다. 주인에게 빚진 것이 얼마요?
  6 그가 올리브 기름 백 말이오라고 대답하자 그 일꾼이 말했다.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어서 앉아서 오십 말이라고 적으시오.
  7 또 다른 사람에게, 그가 진 빚이 얼마냐고 물었다. 밀 백 섬이오라고 대답하자 그 일꾼이 말했다.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팔십 섬이라고 적으시오.
  8 주인이 그 불의한 일꾼이 슬기롭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다. 이 시대의 아들들이 자기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곳으로 맞아들일 것이다.
  10 아주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많은 것에도 충실하다. 아주 작은 일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많은 것에도 충실하지 못하다.
  11 그러므로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도 충실하지 못하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다른 사람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 몫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그 어떤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한 편에게는 충성을 하고 다른 편은 무시하든지 할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것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13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성경 공부할 때도 뜬금없이 들어가 있는 10-12 절을 보면서 논란이 분분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문맥적으로 살펴 보면 그다지 논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명백한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줄거리를 적자면
주인의 재산을 맡은 한 청지기가 있는데, 주인의 재산을 자기 것인양 사용하고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서 청지기의 직분을 빼앗으려고 하니까,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을 가지고 주변의 사람들을 영접합니다. 왜냐면 청지기 직분을 빼앗긴 다음에 자기가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로 가면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도와 줄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 보면 이 청지기의 행동을 보고 빛의 아들들보다 지혜롭다고 합니다.

분명 청지기는 옳은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재산도 아닌 것을 자기 것인양 친구를 사귀는 데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왜 이런 말씀이 나오게 되었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15장 17장을 보면 바리새인을 어느 정도 염두해 둔 말씀입니다.
17장 1절에 보면 바로 바리새인의 반응이 나옵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17장 1절에서 위의 내용이 제자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중요한 청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돈을 사랑했습니다. 겉으로는 올바른척 의로운척 하지만 속으로는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기가막힌 대조의 표현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로, 불의해 보이는 청지기의 행동이 재물보다는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수단적으로 재물을 사용하는 걸 보고 그것이 더 올바른 행동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불의한 사람들도 돈에 얽매여 있지 않고 돈을 우상시하고 있지 않은데, 바리새인들이 자신은 율법적으로 옳다고 하면서도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0절에서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절에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3.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로 윗부분이 또한 해석하기 어려운데, 앞에서 제가 적은 맥락에서 살펴보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재물이라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더 큰 가치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하나의 작은 것입니다. 여기서 더 큰 가치란 하나님 본위의 가치를 둔 것이죠.
작은 것으로 여겨지는 재물을 지혜롭게 하나님 안에서 사용하고 그것이 하나님이 되지 않도록 할 때, 우리의 마음이 진정한 가치인 하나님 중심의 가치를 가지게 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바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고 그 안에 얽매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청지기도 더 좋은 가치를 위해 재물을 기꺼이 포기한 것처럼, 하나님안에서 재물이 우상이 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공의와 정의가 넘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도록 하는 이웃 사랑을 위해 사용된다면, 즉, 작은 일에 충성된다면, 우리에게는 더더욱 하나님 나라의 큰 일에도 충성되는 자로 자라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재물이 작은 것으로 여겨지도록 노력해야 하며, 재물을 아예 값어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재물을 충성되게 지혜롭게 잘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재물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되면, 우리의 모습은 바리새인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덧붙여.

위의 노란 박스 안에 있는 성경은 쉬운 성경을 적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글은 개역개정판을 중심으로 쓰여 졌습니다.
쉬운 성경을 적어 보니 더더욱 명백한 논리구조가 갑자기 보여 적어봅니다.
(영문판 성경인 NRSV도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더군요.)

10절 11절을 보면
10 아주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많은 것에도 충실하다. 아주 작은 일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많은 것에도 충실하지 못하다.  
11 그러므로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도 충실하지 못하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많은 것에도 충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많은 것에도 충실하지 못하다라고 한다음 바로 "그러므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므로"라는 것은 10절과 11절을 연결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이 "불의한 재물에도 충실하지 못하면" 이라는 내용입니다.
11절의 불의한 재물이라는 것이 10절의 바로 작은 일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제가 윗 부분의 글에서 도출한, 재물이 작은 것에 해당된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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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11-32절

이 부분은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탕자의 이야기에 대한 부분이다.
흔히, 이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 조건없는 사랑,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사랑에 대해 많이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이 구절에서 큰 아들의 모범생 컴플렉스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한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자랐다. 하지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끼기까지,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기 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교회에서 봉사도 나름대로 많이 하고, 기도회나 기타 여러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그랬지만, 수련회를 가면 꼭 이상하게도 교회에 얼마 나오지도 않은 몇몇 사람들이 방언도 받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충만하게 들어가서 눈물 흘리고 감격하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아서 일종의 질투와 회의감과 자기 연민등에 휩싸였던 때가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하나님은 저 사람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건가? 난 왜 소외 당했다는 느낌이 들까?

이런 문제들이 바로 이 구절들에서 나오는 큰 아들의 마음이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도 않았으며 나름대로 성실하게 주어진 임무들을 담당했는데, 오히려 아버지는 동생에게 예정된 몫을 강탈하다시피해서 떠난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 작은 아들이 정말 형편없고 비참한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잔치를 벌이고 큰 은혜를 베푼다.
이것을 본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에 상심하고 만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다 이 큰 아들의 모습들이 있다.
교회에 나가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예배 드리면, 하나님께서 더욱더 큰 복으로 채우시리라는 그런 조금의 기대감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보다 못 해 보이는 사람들이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이것에 대해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31절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로되....
"큰 아들아 나의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다."
질투 때문에 하나님이 이미 큰 아들에게 주기로 작정하신 모든 것이나 주신 것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관점은 작은 아들을 더 사랑하신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큰 아들에게 이미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큰 아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작은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32절에서 볼 수 있는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얻었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도 그냥 내버려 두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작은 아들도 마땅히 구원받아야 하고 잘못에도 불구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 품에 거하도록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인 것이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오해하지 말고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해야 한다.
이미 그에게 하나님 나라가 있고 상급이 있으니, 죄 짓고 돌아오는 자기의 형제를 같이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안의 많은 모범생들... 능력도 있고 헌신되어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이 작은 아들을 끌어 앉고 입 맞추고 사람들 앞에서 큰 잔치를 벌이는 방식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할찌라도, 하나님 나라를 이미 소유하고 그 사랑이 거한다는 것을 알며, 포용할 수 있다면 더더욱 멋진 하나님의 모범생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자기 자신이 죽어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이 시대의 모범생들의 컴플렉스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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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한 동네에는 주차 자리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먼저 차를 가지고 온 순서대로 파킹을 한다.
그런데, 한 젊은 사람은 마치 빈 한 자리를 자기 자리인 것처럼 사용한다.
누가 파킹을 해 놓았을 때, 버럭 화를 내며 마치 죽일 것처럼 성질을 엄청 낸다.
미안하다고 해도 계속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참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든다. 순간적으로 나도 욱하긴 하지만, 그냥 참았다.
그런데, 웃긴것은 그 자리가 그 사람이 완전히 독점하는 자리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이 성질 내는 일들을 경험하고 나선 아예 그 자리에 파킹을 안하게 된 것이다.

일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목소리 크고 화 잘 내는 사람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내버려두면 그 사람은 사회적인 이익을 독차지 하게 되고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보게 된다. 지적해 주고, 대응을 해야 하지만 그 반대 급부적인 것들이 두려워서 또는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두게 된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뺨 마저 주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되면 사회적인 공의는 어떻게 보면 저해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이라면 좋은 해답을 주셨을 텐데... 가이사의 동전처럼 말이다.

인생 쉽게 생각하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 살기 쉽지만, 그렇지 않고 하나 하나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래서 인간은 더더욱 한계를 느끼게 되고 겸손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버스를 타면 참 재밌는 게 있다. 교회 근처에 명산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온다. 그런데,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웃긴 건, 산을 오르는 운동을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이 등산을 하기 위해 산의 입구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의 버스안에서는 절대 서 있으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지 자리를 차지하려고 투쟁 비슷한 마음 가짐으로 자리를 확보하려는고 애절하게 노력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산을 오르는 여유로움으로 자리 양보하면 안될까? 씁쓸하다.

지하철을 타다보면 사람들이 많아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 앞에 서 있어 진행 경로를 막기도 한다. 그냥 실례합니다 그러면 되는데, 화를 막내는 사람들이 있다.
진짜 모든 일들이 인격 수양의 과정이다.

불과 5년 전하고 지금 하고 내가 느끼는 사회의 각박함은 천지차이이다. 도처에 웃음짓고 여유롭게 양보하며 미덕을 보이는 사람보다, 성질내고 못 잡아 먹어서 안 달이고 자기 것만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이런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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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김중은 총장님은 개강 예배에서 거룩함에 대해 말씀하셨다.
레위기 19:2-3절을 인용하셨는데,
거룩함을 실천하기 위해서 첫째 부모를 경외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19;3절에 언급되어 있는 이 구절이 원문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하라는 순서로 나와 있다고 한다.
경외하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경외하다의 그 표현과 같은 표현으로 부모님에 대해 큰 존경과 감사함으로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둘째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 예배를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것도 바로 거룩함의 일종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거룩함의 중요한 부분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많은 의미를 지닌 말씀이었다.
부모님을 잘 섬기고 그 분들을 잘 존중하며 따르는 것 우리 가운데 필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의 경우에 있어서 부모님을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그 분들을 사랑하지만, 실제적으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게 참 안타깝고 늘 죄송스럽지만 더욱더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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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 많은 기독인들이 바라는 것 중의 하나는 부흥의 회복이다. 1907년의 부흥의 불길이 한반도를 다시 뒤덮길 소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에 그동안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사회적으로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했던 자성에서 부흥 100년을 돌아보며 다시금 부흥을 하길 원하는 염원들은 참 좋은 것 같다.
또한 이 운동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하나님 나라 운동과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크리스챤으로 살게 된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부흥이란 것은 사실 바로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 생활, 현재 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부흥이란 외침은 또한 일회성이며 지속적인 삶의 변화나 사회적 변화를 이루어 내긴 어려운 것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수련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서 수련회를 기획하고 그것을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매일 매일이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수련회 같은 마음과 기대감으로 살지 않는다면 별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부흥에 대한 환상을 넘어서서 날마다의 삶을 기대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도록 한국 교회가 초점을 맞추었으면 하는 소망이 개인적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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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예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이,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섰었고, 성경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섰다.
신약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베드로가 섰다.
또한 바울이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다.

구체적으로 적어보면

아브람은 온갖 죄가 들끓고 있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아마도 그 힘든 상황 가운데 나름대로 열심히 살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부르셨다. 복이 될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때 아브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세는 이집트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다니다가 광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
삶이 실패한 것 같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현실 생활에서 크게 보여지지 않을 때 그 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잡힐 때 예수를 자기는 절대 모른다고 저주하면서 도망갔다.
그 아픔과 슬픔 속에서 지내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불렀고 그는 예수 앞에 섰다.

바울...
온갖 지식과 학문을 지녔고 그에 대한 열심으로 누구보다도 자기가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살 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기안에 사로 잡혔을 때 예수님이 그를 불렀고 그는 예수 앞에 섰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선 이후로 다 변했다.
이전의 삶이 현실의 괴로움과 어려움, 두려움 속에서 묶여 있을 때
또는 바울처럼 사라질 것에 모든 가치를 두고 그 안에 묶여 있을 때...

바로 그 때 하나님 앞에,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변화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물론 조금의 변화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깊은 변화는 그 깊음을 아는 분에 의해 다뤄질 때 변화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그 임재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우리 안에 상처들, 우리 안의 깨어진 부분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눈물이라는 것이 기쁨의 눈물로 바뀐다.

말로 할 수 없는 그 변화의 행복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오게 된다.

개인적으로도 그냥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내 깊은 내면을 다루시며 그 안에 치유가 된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오직 변화됨은, 회복됨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하나님을 만나길 소망하고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느끼길 갈망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그 안에 기쁨의 눈물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행복 가운데 거하게 된다.

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모든 사람이 서길 소망한다.

기도
하나님... 저의 삶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서길 원합니다.
치유의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저를 만지시고 고치시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은혜 가운데
더 깊이 들어가게 하여 주세요.
하나님을 더욱더 알게 하시고
주의 성품과 주의 지혜를 제 안에 계시하시고 말씀하여 주세요.
제가 듣길 원하며 변화되길 원합니다.
이 사이트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길 원합니다.
그렇게 되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이 어떠한지 깨닫게 하여 주세요.
이 모든 것 우리의 소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어떤 사람은 전도를 하면서 이런 말을 많이 한다.
그냥 전도를 하면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라던 안 자라던 그건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에 상관할 바가 없다.
목회자들 중에 이런 식으로 말하시는 분을 여러분 봤다.
과연 그럴까?

예수님이라면 그러셨을까?
아니면, 신앙의 본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의 목숨같이 사랑하셨다. 배반할 줄 알았던 가롯 유다도 끝까지 품으셨다.
바울은 그의 삶 속에 그가 복음을 전했던 사람을 끝까지 품고 목숨같이 돌보며 사랑했다.

그런데 오늘날?
왜 전도를 강조하면서 그냥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라고 하면서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나갈까?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일까?
난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린양 한마리가 방황할 때도 그 어린양 한마리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목자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그리고 탕자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 마음이 우리 믿는 사람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막무가내 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게 하고 그러면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직까지 내게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의 부류이다.

막무가내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드는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고린도 전서 3장의 말씀이다.
3:6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3:7 그런즉 심는 자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위의 성경 구절이 과연 어떻게 하든지 예수만 입으로 시인하게 한다면, 자라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사람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으니까 하나님이 이끄시겠지라는 말을 정당화하는 구절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고린도 교회는 분란이 많았다. 바울은 서로 한 가지 목적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데 합력하여 최선을 다하길 원했다.
하지만, 또한 고린도 교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정말 목숨을 아끼지 않고 협력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볼로와 바울처럼.
바울은 3: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님의 밭이고 집이라고 말한다. 서로 합력하여 밭을 일구고 서로 합력하여 집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러한 동역자들은 심고, 물을 주는 것을 서로 협력해서 열심히 했던 사람이다. 물론, 이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다. 그들이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서 그들은 겸손한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이 구절들 자체가 복음을 전하는데, 그냥 전하기만 되며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잘 되겠지라는 식으로 방치되는데 이용되는 말은 절대 아닌것이다. 모든 사람이 합력하여 성령의 인도아래 전인격적으로 헌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요는 책임성 있게 복음을 전했으면 좋겠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전인격적으로 대하여서 끝까지 품고 사랑하신 예수님의 삶을 따라 끝까지 품고 사랑하는 자세로 복음을 전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부담이 되니까 단순히 영접기도 시킬려고 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 아니다. 바른 자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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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경험한 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우리의 삶이 그냥 우연히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시편에 보면 우리가 모태에 있기 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우리를 어머니 뱃속에서 신묘막측하게 뜨게질하듯이 모든 부분을 잘 짜서 우리가 이런 형체를 가지게 만드셨다고 적혀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때로는 상처 받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이해 못하는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고, 세상이 싫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의 참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내가 상처 받았기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위로 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자라면서 교회에서 많은 상처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고 오히려 제 삶에 유익이 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상처를 받았기에, 교회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도와주며
참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바로 경험의 권위라고 합니다.
경험을 해 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그 분야에 대해 많은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의 권위를 많이 늘려가시면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힘들더라도 회피하지 말고, 이 힘든 광야의 시간들을 잘 겪어 나오신다면
하나님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사랑을 퍼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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