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날 박안나 자매님께서 나의 은사, 나의 브랜드라는 제목을 가지고 강의해 주셨습니다.

하나 하나 주옥과 같은 강의였습니다.

아래는 박안나 자매님이 강의하신 간단한 내용입니다.

http://bit.ly/4kcpdM

 

특히,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해 봤던 것은

제가 제 자신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셨는지, 나 자신에게만 부여하신 고유한 은사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많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박안나 자매님의 강의를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들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은사는 역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또는 교회에서 봉사를 통해 내가 무엇을 잘 하는 지를 발견하는 것이고 그것을 토대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고등학생에게도 참 좋은 강의일 것이고, 청년들에게는 많은 도전을 줄 수 있는 강의입니다.

교회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 도전을 받았는지 내내 흐뭇했습니다.

 

앞으로도 자매님의 사역에 많은 열매들이 맺히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더 풍성케 하시길 기도합니다.

 

'Intimacy With Go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대원 졸업을 앞두며.  (0) 2009.11.01
아이들을 위한 성경!  (0) 2009.10.17
목요일 밤 산책  (4) 2009.06.19
고귀한 희생을 생각하며.  (0) 2009.06.18
24시  (2) 2009.06.06

자녀가 있다는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blessing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녀가 연약하여서 때때로 병에 걸린다면 그것 때문에 잠도 못자고 늘 신경이 쓰이고 어떻게 해야 건강할지에 대해서 마음 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점들, 고생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가를 더더욱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것은 아마 부모가 되어 본 사람만이 더욱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녀가 아프면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고 안타까워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는 우리들의 아픔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까요? 더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하지 않으실까요?

 

우리는 살면서 너무도 완벽한 모습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뭐든지 잘되고 만사 형통하고 가정에 안 좋은 일도 안 생기고 그런 것이 마치 옳은 것 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가정에 고통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더욱더 마음이 아파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죄악의 고통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사회는 강한 사람 완벽한 사람을 추구하고 그렇게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강한 사람이 되라, 연약하여 지지 말라, 예수 믿는 사람에게 능치 못할 일이 뭐가 있느냐?

 

그러나,

성경은 약한 것을 자랑하라라고 말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그 약함을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약해서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가정에 고통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아픔이 있기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고,

깨진 곳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약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약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매달리고 그 분의 위로함으로 살았습니다. 약속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존재 자체 만으로도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가슴으로 낳은 사람들입니다.

가진 조건이 훌륭해서 사랑받을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분이 낳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장이 여러분들의 심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통 속에 눈물흘리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원합니다.

힘내세요!!!

나이가 점점 들어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새는 주님 앞에 잠잠히 머물면서 생각하면서 입으로 나오는 몇 마디의 기도가 참 좋다라고 느낍니다.
어려서부터 감리교 전통의 교회에서 자라서 기도라하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 열정적으로 주여를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에 많이 익숙해 졌었는데 말이죠.
물론, 저 개인적으로는 힘든 연단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기도를 하면 목이 쉬고, 무릎 꿇고 1시간 정도 기도하면 다리에 쥐나고^^ 그래도,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월드컵 응원에서 고래 고래 고함질러서 목이 쉬어도 기분 좋은 것과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주님 앞에서도 그 정도의 열정을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차라리 미지근한 것보다는 낫지요.

고린도전서 14장 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개역개정)
14:19 nevertheless, in church I would rather speak five words with my mind, in order to instruct others also, than ten thousand words in a tongue.  (NRSV)

방언의 유익은 분명히 있지만, 우리의 지성을 사용해서 충분히 깨달은 몇마디의 말이 오히려 수천마디의 방언의 말보다 더 낫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하면서 바로 바로 우리의 입으로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충분히 묵상하면서 살아서 바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며 습관처럼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순간 순간 떠오르는 것을 기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더 좋은 방법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면서 우리가 깨달은 것으로 기도하는 것이 참 좋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성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용되는 지성은 그 분을 더욱더 알고 그분의 뜻을 우리 마음 속에 새겨서 행동하게 하는 데 참 좋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이라는 것이 순간적으로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원합니다.

대비되는 용어는 five words vs. ten thousand words 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수많은 말씀을 어설프게 아는 것 보다 몇 마디의 말씀이라도 충분히 묵상하여 깨달은 것을 가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것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 보다 한 가지라도 충분히 생각하며 깨달은 것을 전달할 때 힘이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최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준비된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많은 은혜가 촉촉하게 스며들거라고 믿습니다.
한마디라도 진실된 우리 마음 속의 고백이 하늘 보좌를 움직일 것입니다. 또한 향기로운 제사가 될 것입니다.

프리셉트 성경의 데살로니가 후서 개요 부분에 말씀 묵상과 적용 4번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언이나 다른 교리에 대해 여러분이 믿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직접 연구해서 얻은 것입니까? 아니면 책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 준 데서 온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은 지식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때 유행하는" 가르침에 쉽게 설득당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는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닥 좋은 방법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선교단체의 훈련도 좋습니다. 여러 좋은 프로그램도 좋습니다. 여러 좋은 책들도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만큼 확실하게 우리가 부족했던 모든 것을 명백하게 지시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직접 교사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며 기름 부으심이 분명 있습니다.
힘들어도 계속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가시다보면 놀라운 보물들을 찾아내게 될 것입니다.
좋은 집회, 좋은 예배를 찾아다니는 것도 그닥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연구하고 사랑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힘들어도 그 길만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운데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성령님의 기름부으심 가운데 세울 수 있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도 말씀이 없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말씀의 권위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아멘.

기독인들이 날로 줄어가는 현실 속에서 많은 논의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기독교는 침체되어 가고 있는가? 라는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소재를 밝히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선조들의 죄악을 회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 데, 한국 역사 속에서 선조들이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힘들다.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회개해야 한다라는 주장도 많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이런 논리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유다가 멸망당하는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힘든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질고를 지는 것이다라는 속담을 유행시켜며 책임회피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8:19 그런데 너희는, 왜 그 아들이 아버지의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 본문에 대해 박윤선의 주석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위의 2절 말씀으로 돌아가서 유대인들의 그릇된 사상을 지적한다.  그들은, 그 현재 당면한 고난이 저희의 죄값이 아니고 선조의 죄 값이라고 하며 스스로 의로운 체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속은 태도이다. 에스겔은, 여기서 누구든지 율법을 행하면 선조의 죄와는 상관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하나님은 철저히 조상들의 죄와 현재 사람들의 죄를 분리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18:20 죄를 지은 영혼, 바로 그 사람이 죽을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의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가 아들의 죄에 대한 벌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의인의 의도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이 시대에 악과 그에 대한 징계가 있는 것은 아마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리어 어떤 비난을 받게 된다면 우리의 잘못이 있지는 않는지 돌이켜 보고 마음을 겸비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게 나아가는 자세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역자입니다. 청년부를 섬기고 있는데, 항상 무언가 잘 안될 때마다 다른 조건들이나 상황들을 보고 그것을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때 물론 여러 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상황을 통해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뜻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 자체가 꼭 나아지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점검은 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혹시 리더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를 겸비하면서 엎드리어 점검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다른 원인들을 살펴보는 것은 우선 순위를 잘 설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더욱더 용기와 격려를 해 주시는 것은 에스겔서 다음 구절입니다.

18:21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에서 떠나 돌이켜서, 나의 율례를 다 지키고 법과 의를 실천하면, 그는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18:22 그가 지은 모든 죄악을, 내가 다시는 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킨 의 때문에 살 것이다.

프리셉트에서 나온 프리셉트 개정개역판을 추천합니다.

귀납적 성경공부 방법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구요,

각 권마다 앞에 개요들이 있는데 참 좋습니다.

그리고 여백이 있어서 성경을 읽다가 깨닫게 된 것을 적는 것도 좋습니다.

 

저는 한글 성경 중 국내에서 이보다 좋은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ywam의 귀납성경연구학교인 sbs에서 하는 방법과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은,

프리셉트 성경은 나누어져 있는 장별로 제목을 찾고 전개하지만,

sbs에서는 문맥 단위로 끊는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의 해석 방법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즉 귀납적 성경연구 방법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분은 이 성경을 가지고 공부하셔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이즈는 특대 사이즈와 중 사이즈가 있는데요, 특대는 너무 커서 갖고 다니기가 힘들고 중 사이즈로 사시는 게 휴대하기도 좋으실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지도나 배경 등에 대한 자료들이 있는데, 지리적 명칭이 나오면 지도에서 하나 하나 찾아가면서 읽으시면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기타 읽기자료들도 풍부해서 별다른 주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또한, 어려운 구절들은 다른 성경 번역본들과 비교 대조를 해서 이해하기 쉽게 했으며, 중요 단어들은 원어의 뜻을 밝혀 놔서 더욱더 성경의 의미를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소 아쉬운 부분은 관주입니다.

관주가 몇 개 있긴 하지만, 부족한 것이 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나온 관주 성경만큼 관주가 수록되어 있으면 완벽할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구입할 수 있는 곳은 프리셉트 쇼핑몰이나 국내 인터넷 서점 및 기독교 서점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http://gobible.co.kr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상지를 고민하고 계신다면  (0) 2009.12.16
Brenton Brown (Humble King)  (0) 2009.08.02
세련됨 보다는 투박함으로 살리라.  (0) 2009.06.07
하나님의 약속은  (1) 2009.04.18
은혜로 산다는 것은  (0) 2009.04.07

혹시 제 블로그에 방문하신 분들 중에서

저와 인터넷으로 교제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이 포스트에 댓글로

메일 주소 적어주세요.

초대장 보내드리겠습니다.

 

textcube 블로그 만드시면 종종 방문하겠습니다.

 

 

ywam base에 있으면서 이런 형태의 기도회를 자주 했었습니다. 참 은혜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이 기도모임을 시도해 보려고 하는 중입니다.

이 기도모임의 특징은 앞에서 worship team은 끊임없이 찬양을 합니다. 주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하게 되고, 짧은 형태의 창의적인 곡도 만들어 넣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회중들은 같이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집중합니다. 물론 같이 따라 불러도 전혀 상관이 없지만 포커스는 기도입니다.

인도자는 진행되는 중간에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다 싶은 것이 있으면 기도를 하거나 회중들에게 나눕니다. 같은 마음을 품고 그 기도제목에 응답할 회중들은 한 명씩 나와서 앞에서 기도를 합니다.

그 시간 동안에도 찬양은 끊이지 않습니다.

대략 위의 promo 동영상을 보시면 이해가 쉽게 되실 겁니다.

한국에도 이런 모임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미국의 존 오트버그라는 설교자가 있습니다.

잘 쓰는 방법이 바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설교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도무지 나의 도움이 없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

저는 그렇습니다. 살면서 이런 것들이 다가옵니다.

->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설교 본문으로 연결하면서 해결 방법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삶을 살면서 궁금한 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고민들을 끄집어 내서 하나님 말씀 가운데 가르쳐 주는 것은

충분히 사람들의 집중을 이끌어내기 좋은 방법입니다.

 

오트버그 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의 설교자들이 이런 방식을 즐겨 씁니다.

 

분명한 타겟을 지정하면서 설교를 하는 것은 청중들로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