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그 후에 예수께서 성령께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시험을 받으셨다. 그곳에는 마귀가 대기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밤낮으로 사십 일 동안 금식하며 시험에 대비하셨다. 그러다 보니 허기가 극에 달했고, 마귀는 첫 번째 시험에 그 점을 이용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 돌들한테 말해서 빵 덩이가 되게 해보아라."
4 예수께서 신명기를 인용해 답하셨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말씀이 있어야 한다."
5-6 두 번째 시험으로,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도성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앉혀 놓고 말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뛰어내려 보아라." 마귀는 시편 91편을 인용해 예수를 몰아세웠다. "그분께서 천사들을 시켜 너를 보호하게 하셨다. 천사들이 너를 받아서 발가락 하나 돌에 채이지 않게 할 것이다."
7 예수께서 신명기의 다른 구절을 인용해 응수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8-9 세 번째 시험으로, 마귀는 예수를 거대한 산 정상으로 데려갔다. 마귀는 선심이라도 쓰듯, 지상의 모든 나라와 대단한 영광을 두루 가리켜 보였다. 그러고는 말했다. "전부 네 것이다. 무릎 꿇고 내게 경배하기만 하면 다 네 것이다."
10 예수께서 딱 잘라 거절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리고 세 번째로 신명기를 인용해 쐐기를 박으셨다. "주 너의 하나님, 오직 그분만을 경배하여라. 일편단심으로 그분을 섬겨라."
11 시험은 끝나고 마귀는 떠났다. 대신에 천사들이 와서 예수의 시중을 들었다. (MSG)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번지수를 잘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높은 뜻 교회의 김동호 목사님이 사경회에서 설교한 내용 중의 하나인데, 성경아 남편들아 이러해라 라고 이런 구절이 있으면 아내들이 남편에게 그 말씀 가지고 봐라 이렇게 되어 있지 않느냐라고 말한답니다. 똑같이 성경아 아내들아 이러해라라는 구절이 있으면 꼭 남편들이 아내보고 성경에 이러해라라고 주장한답니다. 이건 번지수를 못찾은 거라는 것이죠.
 아내들아, 라고 했으면 아내가 읽으면서 자기에게 적용하라고 있는거지, 남편들이 아내보고 이렇게 하라라는 말로 훈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꼭 나에게 다가오는 구절이 있으면, 이 구절은 어떤 누가 읽어야 하고 감동받아야 하는 구절인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지요.
 어떤 분과 새벽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부르짖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후에 저와 논쟁이 붙었습니다. 저는 조용하게 묵상 가운데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는 성경에 어디 기도를 조용히 하는 것이 있느냐? 기도는 부르짖어 하는 것이다라고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씀적 근거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성경에는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고난이 많아 차마 입술로는 부르짖지 못하고 꺼이 꺼이 하면서 입이 안 떨어지고 마음속에 깊이 부르짖음으로 기도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숱하게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라는 구절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말 많이 하려고 하지 말고 골방에서 기도하라라는 말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바울이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한 점은 무엇입니까? 또한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성경 구절은 무엇입니까? 디모데가 기도 방법은 무슨 방법이든 상관없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은 또한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숱하게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들으라는 표현들은 무엇입니까? 부르짖는 기도도 좋고 조용히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기도도 좋고 방언으로 하는 기도도 좋고, 일어서서 공격적으로 하는 기도도 좋고, 사단을 대적하며 큰 소리로 선포하는 기도도 좋습니다. ^^;;;
 (참조 : 항상 말씀 논쟁은 본문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만 인용하여서 생깁니다. 올바른 말씀 인용은 문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르짖으라 햇으면 왜 부르짖으라고 했는가?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으면 왜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는가? 등등이죠. 이걸 생각하는 게 올바른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단순히 적혀 있다라고 말하는 식의 말씀 인용은 사실 본질을 잃게 됩니다. 제가 근거로 들은 말씀 구절도 올바른 인용이 아닌 것을 밝혀 둡니다. 그분의 똑같은 논리 구조로 반박했을 뿐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

 결국 신앙에서 우리 각자는 은혜 받았던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가장 잘 아셔서 특별하게 이용하셨던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자기에게 그 방법으로 은혜를 주셨으면 다른 사람도 그런 방식으로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또한 주장하는 것은 신앙의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찬양의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전도단에서 하는 방식의 찬양 집회에서, 어떤 사람은 두란노에서 하는 방식의 찬양 집회에서, 어떤 사람은 기도원에서 북치고 성령께서 춤추게 하는 방식으로 찬양을 할 때 하나님을 깊게 만나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의 통로가 된 것이지 절대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할 때도 자기가 은혜 받은 구절만 보는 것은 참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런 구조가 특히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께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시험을 받으셨는데 사단이 시험했던 방법이 바로 "너는" 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뛰어 내려 보아라, 세상은 전부 네 것이니 내게 경배해라. 사단은 자꾸 너는 이런 존재이다. 너는 높은 존재이다. 너는 세상의 왕이 될 존재이다.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화법을 보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주 너의 하나님, 오직 그분만을 경배하라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모든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느냐를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능히 높은 곳에서 떨어지셔도 천사가 받들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돌을 빵 덩이가 되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경계의 범위,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를 스스로 침범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모든 생각의 관점은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이끄시냐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범위를 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귀는 계속 나 자신을 높이고 인간을 높이고 인간에게 주어진 범위 내에서 하나님이 누리게 하신 것들을 넘어서게 만듭니다. 선악과의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꾸 자신에게 주어진 범위를 떠나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의 모든 근원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세상의 것을 창조한 것인양 범위를 넘어서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사단도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시편 91편을 인용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천사들이 너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자기 맘에 드는 구절이라 취사선택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를 들어야 하고 그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내가 성경책을 넘겨보다가 내 맘에 쏙 드는 말씀만 취사선택하거나, 이건 다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라고 하면서 내 자신의 욕구에 따른 번지수를 잘못 찾아간 말씀을 취한다면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나 자신의 욕심을 내려 놓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가득채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말씀을 읽다가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먼저 하나님 혹시 무엇을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역자이다 보니 의욕에 앞서서 제가 의도한 것을 말씀이라는 도구로 말하는 죄를 범할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분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 나에게 하신 것이면 나에게만 적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전하라고 하시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번지수를 잘 찾아가는 신앙, 주어진 범위와 한계 내에서 하나님의 주권만이 드러나게 하는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2009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며 혹시 나의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은 뒤에 계시고 나 자신만이 빛났던 적은 없었습니까? 나 자신만을 높이게 하는 사단의 전략에 말려 버렸던 적은 없습니까? 오늘 본문의 예수님처럼 하나님만이 드러나시게 하며, 모든 삶의 근원이 하나님만이 되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십자가 뒤로 감추시고 하나님만이 찬양 받으시는 분이 될 수 있도록 2010년을 하나님께 우선적으로 드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가오는 2010년 한 해, 우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만이 인생의 주인 되셔서 우리를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가르치시고 자라게 하시길 원합니다.

 한 해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깊은 묵상이 있는 하루, 감사가 있는 하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마 3:15-17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호하셨다. "내 말대로 하여라.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하나님의 바로잡는 역사가 바로 지금, 이 세례 속에서 하나로 모아지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말씀대로 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셨다. 성령과 더불어 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으로 선택하고 구별한 내 아들, 내 삶의 기쁨이다." (MSG)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가셨습니다. 사실 그 당시 관습으로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제자가 된 것을 의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바울 서신(고린도전서0을 보면 나는 아볼로파다, 게바파다 등등의 논쟁이 있어서 바울이 나는 몇 사람 외에 세례 안 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지극히 겸손하구나 이런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행동이 아니라, 요한이 선생님처럼 비춰지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면서 그 당시 인기있는 지도자였던 요한을 불러서 예수님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사람들은 다들 오, 저 사람이 누구길래 하면서 아마 예수님은 단번에 인기 있는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데에 있음을 알고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저는 요새 영적 권위라는 주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르치셔서 하나님께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이 욕심이라는 것이 많습니다. 교회 내에서 보면 오히려 사역자들보다 뛰어난 성도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모든 면에서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겸손함으로 묵묵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재능이 뛰어나다고 판단하고 겉으로는 잘 따라주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절대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안 보이는 곳에서 쓴 말을 뱉어 놓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삶의 변화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어떤 능력적인 존재인가에 따라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새롭게 하는 역사는 바로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 겸손하게 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섬기라고 말씀하시면 그냥 거기에 순종하여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될때, 놀라운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Matt Redman이 찬양 가사를 통해 고백했듯이 화려한 음악보다 그 모든 조명이 다 꺼지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만날 때 마음의 중심을 드릴 때 바로 나는 참된 예배자로 서 있다는 그 고백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것이 내 성에 차지 않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그 분의 뜻에 따르며 기도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성령이 물 붓듯 부어짐을 경험해 봅니다.

 여러분이 있는 자리,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자리라면 아무리 작은 자리라도 감사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 순종을 제사보다 낫게 여기시며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를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새롭게 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자리만 꿈꾸다가, 남보다 더 우월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성령이 일하시는 그 놀라운 통로가 되지 못하고 평생 자기 힘만으로만 나아가는 안타까움으로 귀결되는 삶을 살았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 3:11-12
내가 이 강에서 세례를 주는 것은, 너희의 옛 삶을 바꾸어 천국의 삶을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너희 안에 천국의 삶을, 너희 안에 불을, 너희 안에 성령을 발화시켜, 너희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그분께 비하면 나는 잔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은 집을 깨끗이 하실 것이다. 너희 삶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참된 것은 모두 하나님 앞 제자리에 두시고, 거짓된 것은 모두 끄집어내어 쓰레기와 함께 태워 버리실 것이다.(MSG)

 변화되고 싶지만 변화되지 않는 시간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때의 안타까움, 또는 변화되고자 하는 마음 조차도 없는 그런 절망감. 이런 것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가득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수련회를 가도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했었어도 왜 그렇게 제 마음은 냉랭하고 삶이 변화되지 않았는지요? 다른 사람들은 생명력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겪으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다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결단도 해 보았으나 또 실패하게 됩니다. 삶은 점점 꼬여 갑니다.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뭔가 해 보려고 이리저리 발버둥치고 삶의 허무함을 해결해 보려고 이곳저곳 기웃거려 보았지만 해결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가복음 4장 16-21절 사이의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시니
그가 나를 택하여,
가나한 사람에게 복된 소식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다.
나를 보내셔서, 갇힌 사람에게 놓임을,
눈먼 사람에게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고,
눌리고 지친 사람을 자유케 하여,
"지금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해!"라고 선포하게 하셨다.(MSG)

자기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 했는데 결국 절망 가운데 사로잡혔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 가운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이제는 너희들이 일하는 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해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라고 선포합니다. 너희들 너무 힘들지? 잘 안 되지? 내가 할께.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냥 맡겨 봐. 언제까지 너희들의 힘만으로 하다가 결국 안되어서 눈물 흘리는 날들만 가득할꺼니? 이렇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1999년은 저에게 참 의미있는 해였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과거의 삶에 실수를 너무도 많이 해서 가슴이 아팠던 해였습니다. 대학생활 때부터 다니던 교회에서도 저에게 다가와서 사랑을 주었던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미성숙하였고, 그리스도인 같지 않았던 저의 모습은 저 자신이 생각하여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절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 오셔서 절 도와주세요. 매일 매일이 눈물이었습니다. 그러길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성령께서 제 삶을 감싸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이 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새벽기도를 나갔었는데 기도제목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속 깊은데서, 선기야, 너가 지금 기도제목을 다 들고 나왔는데, 너를 누가 창조했니? 누가 가장 잘 알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너는 먼저 나한테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들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저는 머리를 망치로 두드려 맞은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이 음성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이 생각은 어디서부터 나왔습니까?
저는 그 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나중에 예수전도단이라는 곳에서 하나님 음성 듣기라는 것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예수전도단 뿐만 아니라, 여러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뜻대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듣고 그 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내 삶을 맞춰가는 삶. 제가 일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고 하나 하나의 계획을 가지시고 인도하시는 삶. 이 삶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너희 안에 천국의 삶을, 너희 안에 불을, 너희 안에 성령을 발화시켜, 너희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그분께 비하면 나는 잔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은 집을 깨끗이 하실 것이다. 너희 삶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참된 것은 모두 하나님 앞 제자리에 두시고, 거짓된 것은 모두 끄집어내어 쓰레기와 함께 태워 버리실 것이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실 때, 바로 진짜의 삶이 시작됩니다.
아직까지 저는 연약한 점이 많고 훈련되어야 할 점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하나 하나 가르치시고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저의 공로가 없는 것입니다. 삶도 조금씩이나마 변화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발버둥쳐도 되지 않았던 그 견고한 삶이 말입니다.
지금도 무너지는 일이 많지만 그래도 기대합니다. 하나 하나 다루실 주님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쓰레기들이 다 태워지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한 사람 되길 소원하며 그분을 전하는 사람 되길 원합니다.

2009년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성령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신앙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기도합시다.
하나님 내 삶 가운데 말씀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심을 알게 하시옵소서. 성령님 오시옵소서. 행하소서.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과 대화하길 원합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인도받길 원합니다.



마 2:13-15
학자들이 떠난 뒤에, 하나님의 천사가 다시 요셉의 꿈에 나타나 지시했다. "일어나거라.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거기 있어라.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고 한다. 요셉은 순종했다. 그는 일어나, 밤을 틈타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떠났다. 동틀 무렵에 마을을 벗어나 제법 멀리까지 가 있었다. 그들은 헤롯이 죽을 때까지 이집트에서 살았다.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아간 이 일은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고 한 호세아의 설교를 성취한 것이다. (MSG)

2009년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계획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루 하루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를 풍성한 하나님의 생명이 가득한 자녀로 성장시키기 위해 그분은 노력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강력하게 몰아가시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그 분의 뜻을 따를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우리의 반응을 지켜보실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우리 가운데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꼭 하나님이 자유 의지를 주셨으니 우리가 전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를지 안 따를지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넘어서 이것이 정말 필요하다 싶으면 하나님의 강력한 강권으로 인도하시기도 하고, 많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결단하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자유의지 문제 가지고 많은 신학적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우리를 향한 정말 좋은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자유의지의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어떤 경우에는 자녀의 자유 의지를 꺾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이런 부분들을 내가 계획해 놓았는데 너 한 번 해 볼래? 이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주셨어도 그분의 뜻대로 어떤 부분을 강력하게 인도하신다 하더라도 자녀를 존중하지 않으신 걸로 단정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결단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십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성취의 기쁨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들 진우와 장을 보게 될 때 제 아들은 장바구니를 자기가 들기를 원합니다. 힘이 없어서 사실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짝 도와주면서 아들이 장바구니를 든 것처럼 들어봐 이렇게 말하면서 들어올릴 때 아이는 참 기뻐합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저도 참 좋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요셉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끝부분에 보면 호세아의 말씀을 성취했다라고 말합니다. 이 두가지가 어찌보면 상충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 두가지가 절대 상충되지 않습니다. 자유의지도 주셨고, 하나님의 계획과 강권하심도 있었고 두 가지가 협력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렇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들을 우리의 의지로 묵묵히 이루어나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2009년 한 해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맡겨주신 것들을 우리가 순종하면서 이루어나간 것도 있었을 것이며, 나의 배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래도 은혜로 주님이 우리를 성장시켜 주신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대해 성장시켜 주신 부분에 대해 감사하는 하루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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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세상이 멸망될 것을 말하며 거대한 방주를 짓는 동안,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 같으냐? 보이지도 않는 실체를 위해 그렇게 노력하느냐? 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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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믿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방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방주를 향해 한 걸음씩 전진하며 방주 속으로 다가갑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방주로 오라고 초청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미친 사람처럼 말도 안되는 이야기처럼 우리들을 취급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노아들은 여전히 묵묵히 전진합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 방주 짓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하루 하루를 삽니다. 그 시간이 길수도 짧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있기에 그 길을 따라갑니다.
누가 증명하라고 하면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신을 갖는데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분의 음성은 명확하며 그분의 생명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이 분명하기에 그 분명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가장 명확한 것은 나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길을 따를 수록 더 분명해 진다는 것입니다.
노아도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은 증명하라고 말하지만 증명할 필요가 없이 그에게는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 분명함이 없었다면 방주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여 저는 방주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아멘.

마 2:7-8
헤롯은 동방의 학자들을 은밀히 따로 만났다. 그는 자기도 그들처럼 열성인 척하면서, 탄생을 알니는 별이 나타난 정확한 때를 자세히 캐물었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베들레헴에 관한 에언을 일러 주면서 말했다. "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아기를 찾으시오. 찾거든 곧바로 나한테 알리시오. 나도 즉시 가서 경배하리다."  <MSG>


제가 사용하는 노트북이 고장나서 고치느라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 오랫만에 글을 올립니다.
흔히 우리는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멋진 성경의 사람들이 우리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난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야,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난 요셉과 같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의 모습은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고 오늘 본문처럼 헤롯의 모습에 가까울 때가 많습니다.
 헤롯은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 공동체의 통치자였습니다. 사실 유대 공동체라는 곳에 헤롯이 들어와 거기서 리더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을 생각하면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천대받던 민족의 출신으로 지도자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억지로라도 존경받고 싶어서 그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온갖 행동을 다 합니다.
 저는 헤롯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신앙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기에는 신앙이 좋아 보이고 예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전혀 따르지 않고 제 욕심대로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른다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따르지 않고 우리의 욕심만을 따라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아기를 찾으면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경배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 아기를 제거하려고 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헤롯은 그의 삶을 통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생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는 세상에서는 화려한 통치자였고, 정말 호화스러운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지만- 호화스러운 종교 생활을 했지만- 결국, 그는 예수님과 거리가 먼 사람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영화에 눈 먼 자로 기억되고 말았습니다.

2009년 한 해를 돌아봅니다.
 과연 우리의 진정한 마음 속에는 누가 자리잡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진정한 구주로 고백하고 그분을 따르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겉으로는 멋진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삶 속의 주인은 나이며, 추구하는 가치관은 나의 개인적인 욕망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그 분께 경배하지 않으면 우리 삶은 그분이 그토록 주시고자 하셨던 영원한 생명의 삶과 거리가 먼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2009년 한 해 진정으로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님이셨습니까? 그렇지 않으셨다면, 이제부터라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노동 가요의 한 구절을 패러디했습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같이 살고 싶다. 뭐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사야 7:10-12
주께서 아하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 저 깊은 곳 스올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여라." 아하스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MSG)

남유다의 아하스왕은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열심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앗수르를 끌어들여 그들의 힘을 얻으면 전쟁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먼저 부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징조를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얼핏 보면 참 겸손한 표현일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고생시키기 싫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런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의 태도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겉보기에는 아하스가 겸손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께 맡기는 어떤 태도도 없으며 인생의 주인이 아하스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떤 일이 다가왔을 때 먼저 기도하지 않고 자기가 먼저 다 해결책을 마련해 놓고 그제서야 기도라는 형식적인 것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급한 문제일 때 그렇습니다. 먼저 이곳 저곳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곳 없나 전화부터 합니다. 안절부절 못합니다. 이런 위급 상황일 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내려 놓고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먼저 내가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결정해 놓고 그 다음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드립니까?

하루를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하나님 저 오늘 하루의 삶을 주님께 맡깁니다. 이런 일들이 있는데, 우선 순위를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 도와 주십시요.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제 삶의 인도자이시며 주님은 나의 기업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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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친구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존경할 만한 것과 믿을 만한 것과 바람직한 것과 품위 있는 것을 마음에 품고 묵상하십시오. 최악이 아니라 최선을, 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 저주할 만한 일이 아니라 칭찬할 만한 일을 생각하십시오. 내게서 배운 것과, 여러분이 듣고 보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협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가장 탁월한 조화 속으로 여러분을 끌어들이실 것입니다.(MSG)


만나면 우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에 말하는 것이 부정적인 말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불행한지, 사회에는 얼마나 악이 가득한지, 교회에도 이런 저런 문제가 많다. 이런 이야기만 합니다. 물론,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언급도 좋은 역할을 하지만, 그래서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건설적인 이야기와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의미가 사라져 버립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묵상을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를 발견하고 그것만 묵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자기 연민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겸손해 보이나 교만한 것입니다. 복음이란 자기 연민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현재는 악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까운 점들이 많지만 그래서 우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하실 것들을 기대하며 '하나님 나를 다루어주십시오. 그렇다고 제가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점을 깨달았으니 하나님께서 저를 이 부분에서 훈련시켜서 더 나은 그릇으로 만드시길 원하시는 그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기도하며 올바른 나를 회복시켜 가겠습니다.' 라고 선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국, 좋다고 생각되는 일도 하나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좋은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존경할 만한 것과 믿을 만한 것과 바람직한 것과 품위 있는 것, 최선과 아름다운 것, 칭찬할 만한 일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내가 보기에 안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 좋은 점들만 묵상하면 어찌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좋은 점 한 가지씩은 있고 배울 만한 점들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안 좋은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점들을 가르치시고 배우게 하시는 것들을 더욱더 묵상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한 점들을 실천할 때 우리는 우리가 생활하는 현장 속에서 나와 정말 다른 사람들과도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악한 영의 세력을 분별하는, 영적으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묵상하는 것이 마귀라는 것의 아이러니함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어딜 가나 악한 영이 보이니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분열의 영을 쫓아내야 돼, 미움의 영을 쫓아 내야 해 이런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를 묵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타락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작 그 은사를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생각하고 그분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인데, 은사 자체만 묵상하거나 은사가 사용될 것만 생각하다가 하루 종일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에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우리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온전히 자리잡도록 성육신하신 그 분이 내 몸과 영혼 깊숙히 자리 잡도록 기도하고, 그분의 아름다움과 그분이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일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자리잡도록 도와 주는 사람들이 됩시다.
또한 우리가 아름다운 일들을 묵상하고, 배운 것들을 실천할 때 수많은 사람 가운데 관계속에서 탁월한 조화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협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가장 탁월한 조화 속으로 여러분을 끌어들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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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졸이거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 대신 기도하십시오. 간구와 찬양으로 여러분의 염려를 기도로 바꾸어, 하나님께 여러분의 필요를 알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대한 감각, 곧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믿음이 생겨나서 여러분의 마음을 안정시켜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삶의 중심에서 염려를 쫓아내실 때 일어나는 일은 실로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MSG)


 제자훈련의 여러 사역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역을 꼽으라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The Father's Heart) 사역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육신의 아버지의 모습은 가부장적이고 완고한 모습을 지닐 때가 많이 있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육신의 아버지의 모습이 거기에 투영 되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하거나, 어떤 일을 안하면 바로 채찍질하고 뭐라 그러는 하나님으로 비추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오로지, 자녀의 잘됨을 위해 무한한 사랑과 애정으로 자녀들의 기도와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잘못된 아버지에 대한 관념을 바꾸어 자녀들이 진짜 아빠로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하고 모든 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깊은 교제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로이드 맥클랑의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이라는 책의 내용 중 한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과연 어떤 분이실까 생각한다. 그분은 자신의 모습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명확하고 분명하게 드러내고 계신다고 알려 주고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나는 딸에게 하나님은 예수님과 같은 분이라고 말해 주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나타내고 계신지 살펴보자.
 유대인 중에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축복받도록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런 사소한 일을 하기에는 너무 바쁘고 중요한 분이라고 생각해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어린아이들을 자신에게로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팔로 안아 주시고 그들과 대화하셨다. 그분은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셨고 그들의 놀이에도 관심을 보이셨다. 그분은 아이들이 코를 흘리고 무릎에 앉아서 옷을 더럽히는 것에도 개의치 않으셨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신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우리들을 위한 시간도 갖게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분은 우리 인생의 보잘것 없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동일한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를 영접하신다.
(플로이드 맥클랑 지음,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 예수전도단)

 염려 대신 기도로 바꾸어서 하나님을 깊게 묵상할 때 그분의 생각이 우리의 영혼 깊숙히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하심과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고 그에 따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며 미소지을 수 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라보며 친밀하고 깊고 애정 가득한 대화이어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 아버지를 완고한 아버지로 무서운 아버지로 바라보는 기도는 율법적인 기도에 그칠 따름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기 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진짜 마음이 어떠신가? 나를 향한 마음이 어떠신가? 그것이 충분히 이해되어질 때 그리고 나서 속 마음을 아뢰며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마음을 느낄 때 하나님의 사랑을 통과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깊게 신뢰하며 따뜻함으로 연합된 관계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삶의 중심에서 염려를 쫓아내실 때 일어나는 일은 실로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이 자리잡길 기도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ivp에서 나온 월간 묵상지를 추천드립니다.
사실, 성경이 가장 좋은 묵상을 위한 도구가 되겠지만, 꾸준히 성경만 가지고 묵상을 잘 하지 못하신다면, 아니면 욕심을 내려 놓고 그날 그날의 한정된 본문으로 깊이 묵상하고 싶으시다면 묵상을 위한 보조 도구인 묵상집이 좋겠지요.

저는 좋은 묵상집을 고르는 저만의 기준이 있습니다.
1. 여백이 많아야 한다.
2. 성경 본문은 무조건 쉬워야 한다.
3. 문맥 단위로 끊어져 있어야 한다.
4. 디자인이 이뻐야 한다. ^^;;;
5. 도움을 주는 글이나 질문들이 딱딱하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묵상집이 그 동안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묵상집을 살펴 보았지만 이건 좋고 저건 안 좋고.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ivf라는 선교단체에서 나온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이번 12월 호부터 싹 바뀌어서 이 모든 조건을 거의 충족시키는 형태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묵상집들도 나름대로의 훌륭한 점들이 많습니다. 이건 그냥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성경 본문을 한쪽에는 개역개정 그 옆에는 MSG(메시지 성경 한글번역)을 실어 놓아서 성경 본문의 이해를 수월하게 했으며, 묵상을 위한 질문도 딱딱한 질문이 아니라 쉬운 질문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백이 많아서 다이어리 대용으로 쓰기에도 적당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소망 중의 하나는 영어 성경 본문도 살짝 넣었으면 더 좋겠고, 관주도 넣었으면 좋겠지만,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는 없겠지요.

혹시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조바랍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 (12월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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