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3:4-6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MSG)


1. 자기가 스스로 초래한 고난이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대부분의 고난은 자기가 잘못해서 그 결과로 얻어지는 고난입니다. 사실 이런 말에 고난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가를 치룬다라는 말이 더 적당하겠죠.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떨어져 놓구선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잘되면 내탓 못되면 주님탓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구선 그 결과에 대해서 불평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요. 그런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 쓴소리를 한다면 하나님 측면에서도 많이 억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불만인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래, 뭐 때문에 불만이야? 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나, 딱히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실패적인 삶에 대해서 핑계를 돌릴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 되어 버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예수님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예수님이 뭘 잘못했단 말입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 죄인들의 친구가 되라고 했습니다. 뭐 하나 잘못된 말이 없는데 구체적이지도 않은 추상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비난합니다.

2. 아무 이유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고난의 한 종류가 나옵니다. 그것은 누군가 고난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예수 믿는 누군가가 저렇게 힘들면서도 믿음을 잘 지키는구나.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겪는 고난에는 대부분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 없다는 것은 우리의 눈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고난도 우리의 눈으로 결코 이해되지 않지만, 그분의 고난 때문에 사람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겪는 고난은 그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당장 그것이 가슴 아픈 길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보면 아, 이래서 내가 이 고난을 짊어지고 가게 되었구나라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계획 가운데 통로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런 고난 받을 이유가 없는데 고난 당한다.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친밀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저는 다르게 들렸습니다. 너는 나와 함께 십자가까지 질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극도의 친밀함 말입니다. 친구가 정말 친구이고, 친밀한 친구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고통까지도 같이 나누는 친구가 정말 친밀한 친구입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쁘나 괴로우나 같이 할 수 있는 부부가 더더욱 친밀한 부부가 아닙니까? 나와 함께 하는 인생에 있어서 이런 어려움이 있소. 그러나 같이 해 줄 수 있겠소? 이 고백은 정말 멋진 고백입니다. 어려움까지도 같이 하는 그런 사람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으니, 힘들어도 우리 끝까지 같이 가는 그런 사람됩시다라는 극도의 친밀감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십니다. 누군가에게 나와 함께 십자가 질 수 있겠냐고 초청하는 것은 주님이 그 사람을 그만큼 신뢰하신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분과 신뢰함 가운데 깊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꺼이 고난을 받으신것도 나는 너희를 위해 고난까지도 짊어질 수 있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라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역시, 고난까지도 같이 쉐어할 수 있는 사랑으로 연결된 그런 관계 속으로 깊이 주님과 위탁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막 15:21-32
 병사들은 오전 아홉 시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진 그분의 죄목이 십자가에 적혀 있었다. 예수와 함께 죄수 두 사람도 십자가에 달렸는데, 하나는 그분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그분 왼쪽에 달렸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슬픈 척 고개를 저으며 예수를 조롱했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으스대던 네가 아니냐. 그러니 실력을 보여 봐라! 네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 십자게에서 내려 와 봐라!"
 바로 그 자리에서, 대제사장들도 종교학자와 나머지 사람들과 어울려 신나게 그분을 비웃었다. "그가 다른 사람은 구원하더니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군! 메시아라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그럼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다 믿을 텐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까지도 조롱에 가세했다.
(MSG)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게에 못 박히셨는데, 사람들의 조롱에 대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롱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던 너가 왜 너 자신은 구원못하느냐?라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똑같은 비난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잘된다고 영혼이 구원받는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하는 너의 모습은 왜 그 모양이냐? 도대체 집이 잘 되기를 했나? 너 처지와 형편이 풀리기를 했나? 가족들은 왜 그 모양이냐? 이런 걸 가지고 예수 믿으면 잘된다고 말한 너의 모습은 내가 보기엔 형편없다. 한심스럽다. 이러면서 조롱을 받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형편이라도 남보다 잘 풀리면 우리는 담대함을 얻습니다. 봐라, 예수 믿으니 이렇게 잘 되지 않는가? 오늘날 교회에서 들려지는 많은 간증자들의 메세지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 믿었으니 자식들이 성공했다. 예수 믿었으니 봐라, 내가 사회적으로도 부끄럽지 않은 인생 되었다.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 이런 말들에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이 잘 안되는 경우도 많고, 예수를 따라서 갖은 노력을 기울이며 하나님 나라를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망가지고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달려갔으나, 정작 자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더더욱 가슴 아픈 것은 교회에서도 정작 그런 수고 보다는 믿음을 탓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한 선교사분이 오랜 외국 생활 가운데 본인도 병을 얻고 가족들도 많이 지쳐, 이제 그 자리를 정리하고 한국에 요양을 하려고 돌아왔지만 패배자로 몰아가는 현실 속에서 아파했던 경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십자가 사건도 예수님이 패배자로 보이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그 뜻 하나님이 다 아시고 계시는 것이죠. 오히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그 모든 비난을 감당하시고 걸어가셨습니다.

 오늘날도 힘든 상황 속에서 인정 받지 못함 속에서 자신의 마음의 아픔을 쏟아 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는 우리들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은 결코 겉으로의 상황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공주의적인 신앙의 모습만 생각하고 달려가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혹시 없는지요? 세상적으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칭찬만 늘어 놓는 우리들의 모습은 없는지요?
 진정한 믿음은 세상적으로 보기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런 간증들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달려갔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삶 가운데 근원이시며 소망이시라. 그 분만이 나의 구원이시라.

 아멘.
호 12:3-5
야곱이 모태에 있을 때에는 형과 싸웠으며, 다 큰 다음에는 하나님과 대결하여 싸웠다. 야곱은 천사와 싸워서 이기자, 울면서 은총을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베델에서 그를 만나시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주는 만군의 하나님이다. '주'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분의 이름이다. (MSG)

1. 쓸데 없는 거 가지고 싸우는 인생
 가장 가슴 아픈 인생은 하나님과 어떤 승부도 하지 않는 인생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좌우지간 하나님께 기회를 드리는 시간이 된다. 싫던 좋던 간에 그 자리에 나가야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 앞에 무조건 앉는 것을 연습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쓸 데 없는 거 가지고 싸우는 인생이 되지 말고, 내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2. 처음에는 순수한 동기가 아니었는데 변화되었다.
 처음에는 순수한 동기는 아니었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이 억울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쳐진 위험들을 극복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매달렸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과 씨름을 하셨다. 기꺼이 자신이 씨름을 하기로 결심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야곱이랑 씨름하는게 쉽겠는가? 씨름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변화시키기 원했다. 야곱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그 동기로 나아왔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길 원했다.
 씨름을 하다가 야곱은 비로서 하나님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내 인생이 하나님을 뒤로 한 인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비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가 변화되었다라는 말,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간증이 아닌가. 인생의 문제 때문에 나아와 나의 심정을 하나님께 이야기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변화되는 인생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가장 안 좋은 인생은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는 사람이다. 문제가 있어도 그냥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최소한 문제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그래도 복된 사람이다.

3. 하나님은 우리와 씨름하길 원하신다.
씨름은 사랑의 표현이다. 아이와 씨름하고, 제자들과 씨름하고, 사역지에서 성도들과 씨름하고. 씨름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기에 변화시키고 싶기 때문에 씨름하는 것이다.
우리도 씨름하는 사람이 되자. 변화되지 않는 사람과 씨름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바라보는 인생 되게 해야 할 것이다.
호 6:1-5
이제 주께로 돌아가자. 주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 앞에서 살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알자. 애써 주를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MSG)

 호세아 6장 첫번째 단락은 우리가 많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어도 언제든지 돌아가기만 하면 받아 주실꺼니, 다시 돌아가자,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참 많은 감동을 주는 구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면 그다지 좋은 맥락의 구절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고 한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그 고백은 말로만 그렇고 일시적으로만 그런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말 많이 아는 듯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을 보면 일시적이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똑같이 반복하는 무너짐, 일시적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맘, 물론 이런 현상들도 하나의 과정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원하십니다.
 학교 교사를 할 때 가슴이 많이 아픈 경우는, 아이가 잘못을 뉘우친다고는 하지만, 거짓된 잘못의 뉘우침이며 똑같은 행동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향해 열받는 것 보다는 저렇게 살다가 어떻게 될까? 그 미래가 더 걱정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그럴 것 같습니다. 저 녀석 저렇게 진실되게 마음을 쏟아 놓지 않으면 어떻게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 더 신실하게 정직하게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

'Intimacy With Go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패처럼 보이더라도 달려갈 인생  (0) 2010.03.31
하나님과 싸우는 인생  (4) 2010.03.23
탐욕과 관련된 두 당사자의 태도  (0) 2010.03.11
그래도 다시 한 번 가라.  (0) 2010.03.05
하나님의 마음  (0) 2010.03.04
호 5:8-11
기브아에서 전쟁을 알리는 나팔을 불어라! 라마에서도 비상 나팔을 불어라! 벳아웬에서도 전쟁이 터졌다고 경보를 알려라! 베냐민아, 적군이 네 뒤를 쫓는다. 에브라임이 벌을 받는 날에는, 온 나라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이미 확정된 일을 내가 선포한다. 유다의 통치자들은 경계선을 범하는 자들이니, 내가 그들 위에 나의 분노를 물처럼 쏟아 부을 것이다. 에브라임이 도움을 구하러 허무한 것을 뒤쫓아갔으니, 에브라임이 심판을 받아, 억압을 당하고 짓밟혔다.(MSG 11:8-11)


1. 본문에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전쟁 상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다의 통치자들은 경계선을 범하는 자들이니. 유다는 뭐가 부족했는지 북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영토 확장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경계선을 범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지나친 욕심을 내기도 합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데 그것을 그냥 능력의 부족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능력자들이 능력을 가진 것은 순전히 자신의 능력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일부 정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공동체에서는 어떤 사람의 상황에서의 결과가 절대 개인적인 것의 결과만이 아닙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성공했으면 다른 사람의 희생이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이 불행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희생의 대가를 그들이 치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서로를 섬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대형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그들이 대형 교회가 된 것은 자기들이 잘 해서 그렇습니까? 물론 열심히 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큰 교회로 성장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주변 작은 교회들의 희생도 있을 것이며, 개발지역으로 선정된 수혜를 받기도 하며, 선점 효과 및 기타 요소들도 정말 많은 것입니다.
 일부 교회에서 성공주의적인 가치관에 물들어서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나의 노력 덕분이다라고 말하면서 작은 교회들에 대해 비난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수준이 한심하다라는 생각을 많이 해 봅니다. 유다의 통치자들은 경계선을 범하는 자들이니, 내가 그들 위에 나의 분노를 물처럼 쏟아 부을 것이다.

2. 그렇다면 세력이 약한 에브라임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약자들은 어느 사회나 존재합니다. 약한 교회들도 존재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외에 다른 곳을 의지하려고 하는 욕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바로 에브라임이 도움을 구하러 허무한 곳에 갔듯이 말입니다. 그런 태도는 일단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께 더욱더 집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에브라임이 도움을 구하러 허무한 것을 뒤쫓아갔으니, 에브라임이 심판을 받아, 억압을 당하고 짓밟혔다.


서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나날들 되길 기도합니다.
화이팅입니다. ^^

'Intimacy With God'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과 싸우는 인생  (4) 2010.03.23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호 6:1-5)  (0) 2010.03.12
그래도 다시 한 번 가라.  (0) 2010.03.05
하나님의 마음  (0) 2010.03.04
그러나, 그 때가 되면  (0) 2010.03.02
호 3:1-4
 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건포도를 넣은 빵을 좋아하더라도,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그래서 나는 은 열다섯 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가서, 그 여인을 사서 데리고 왔다. 나는 그여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많은 날을 나와 함께 살면서, 창녀가 되지도 말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도 말고, 나를 기다리시오. 그 동안 나도 당신을 기다리겠소." 이스라엘 자손도 많은 날을 이렇게 왕도 통치자도 없이, 희생제물도 돌기둥도 없이, 에봇도 드라빔도 없이 살 것이다. (MSG)



 하나님의 사랑은 생각보다 큽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화부터 내실거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생각보다 하나님은 오래참음과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고멜이라는 여인이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그 품에 있을지라도 호세아보고 고멜에게 가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역시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따를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콘켄 베이스에 김남현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선교사님이 한번은 제가 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대학부 수련회를 인도하러 오셨습니다. 그 때 제자훈련 학교 태국 학생들의 사진을 한장씩 붙이고 그 밑에 기도 제목을 적어 놓은 수첩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 훈련 할 때 학생들이 얼마나 속을 썩이는지, 데려다 놓으면 또 도망가고 사고치고, 그래도 또 나가서 그 학생들 데려오고, 그게 속상해서 눈물도 많이 흘리고, 그래도 하나님의 마음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에 또 힘을 내어 그들을 사랑하려고 하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뜨거웠는지요.
 우리는 살면서 어떤 사람에 대해 실망도 많이 합니다. 가르치고 정성을 들였는데, 또 도망가고, 또 우리에 대해서 까칠하고 상처받는 말만 늘어 놓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사람을 놓아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로 가라. 다시한번 그들을 데리고 와라. 내가 너희들에게 그러했듯이 말이다.

 끊임없는 사랑, 오래참는 사랑, 그 사랑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호 2:16-20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 나는 그의 입에서 바알 신들의 이름을 모두 없애고, 바알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MSG)


 사역을 할 때 사람들이 오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때로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그런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어서 때로는 사람들이 아프더라도 지적해야 하고 치료하길 원하지만 선뜻 사람들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나를 아프게 하느냐? 라고 하나님께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런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일 것이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결혼하겠다. 너는 나를 주인으로 부르는 관계가 아니라 남편이라고 부르는 그런 친밀한 관계속으로 이끌겠다.
 때로는 엄격해 보이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애절한 우리를 향한 마음이 하나님 마음 아닐까요? 하나님이 무슨 부족한 것이 있어서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관계는 바로 지극한 사랑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자식 잘 키워놓으면 노후 대비가 된다라는 말을 하긴하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뭐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아이를 대할 때 대가를 요구하겠습니까? 그러나 가끔은 자식이 부모에게 많은 원망을 합니다. 나에게 부모는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런다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 부족한 것이 있어서 안 좋게 대하시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시는 관계는 지극히 순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를 부부 사이의 가장 친밀한 관계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져서,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되어 보거나 세어 볼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이 너희를 로암미라고 부른 땅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통일을 이룩하여, 한 통치자를 세우고, 땅에서 번성할 것이다. 그렇다. 이스르엘의 날이 크게 번창할 것이다. 이제 너희는 형제를 암미라고 하고, 자매를 루하마라고 하여라. (호 1:10-2:1) (MSG)


하나님 없는 인생은 사단에게 결박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술에 중독되고, 돈에 중독되고, 섹스에 중독되어 눈을 보면 어디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곳이 없나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애나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권리나, 나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받게 될 상처는 아랑곳 없습니다.
어제 마음 아픈 기사를 봤습니다. 신생아 4명이 있다면 그 중에 3명은 낙태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 보살핌 받아야 하는 권리가 있지만 그런 권리는 이기적인 인간의 욕심에 의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한순간에 허물어져야 합니다. 물론, 낙태를 이야기할 때 임신부의 자기 결정권과 신생아의 생명권이 충돌하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보다는 임신부의 권리가 우선된다고 합니다. 누구의 권리가 먼저 되느냐의 논쟁 보다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가게 한 상황과 그 상황속에서 이기적인 욕망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임감 없이 단 하룻밤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온통 누구와 잤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는 사람들도 분노와 안타까움이 겹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겠습니까?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떠나 서로에 대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거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 것, 참 가슴아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회복시키길 원하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떤 절망속에서도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초청하시고, 생명과 존귀함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우리가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죄악이 만연한 곳에 그러나, 그러나, 그 때가 되면,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그들이 그 사랑에 반응하게 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 속에 하나님 내 삶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반응하게 하시고, 회복함을 주십시요. 기도하며 나아가는 시간외 되었으면 좋겠네요.
마 10:24-33
학생이 선생보다 더 나은 책상을 쓸 수 없다. 사원이 사장보다 돈을 더벌지 못한다. 너희는 내 학생이요 내 추수할 일꾼이니, 나와 똑같은 대접을 받거든 만족하여라. 아예 기뻐하여라. 그들이 주인인 나를 '똥 묻은 화상'이라고 부르는데, 일꾼들이야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 겁먹지 마라. 언젠가는 모든 것이 밝혀져 모든 사람이 일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드러내 놓고 진리를 말하기를 주저하지 마라. 괴롭히는 자들이 허세를 부리며 위협한다고 해서 침묵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너희 존재의 중심인 너희 영혼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너희는 너희 삶 전체-몸과 영혼-를 그 손에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된다. 애완용 카나리아의 값이 얼마더냐? 푼돈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새에게 일어나는 일을, 너희가 신경 쓰는 것보다 더 신경쓰신다. 그분께서 너희에게는 더 정성을 쏟으신다.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돌보시며, 심지어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신다! 그러니 괴롭히는 자들의 이런저런 말에 겁먹지 마라. 너희는 카나리아 수백만 마리보다 더 귀하다. 세상의 여론에 맞서 내 편을 들어라. 그러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너희 편을 들 것이다. 너희가 겁이 나서 달아난다면, 내가 너희를 감싸줄 것 같으냐? (MSG)


 이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 진리를 말하기를 주저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왜 진리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하는 것에 대한 이유가 하나님이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세상 살다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아마 평생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끊임없이 적대하고, 안 좋은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좋은 평판을 얻을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신기루가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결국, 주님의 진리를 말하는 데 환경을 살펴보면서 환경이 바뀔 때 난 진리를 말하겠다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평생 말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살면서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때로는 불의에 대항할 용기도 필요하고, 때로는 자신의 좋은 평판을 내려 놓는 모험도 필요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이 기준을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편한 길,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길, 권력자들에 편승하는 길을 과감히 내려 놓으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의 편을 들기도 하셨고, 사마리아 마을로도 직접 걸어가셨습니다. 세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용기 있게 진리를 말하는 그런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 10:16-23
늘 정신을 바싹 차려라. 내가 너희에게 맡기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너희는 이리 떼 속을 달려가는 양과 같으니, 너희에게 시선이 쏠리지 않게 하여라. 뱀처럼 영리하고 비둘기처럼 순수하여라. 세상을 몰라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너희의 동기를 비난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너희의 평판을 더럽힐 것이다. 단지 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들이 너희를 법정으로 끌고 가더라도 당황하지 마라.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너희와 나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다. 너희에게 천국 소식을 전할 무대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때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 걱정하지 마라. 꼭 맞는 말이 떠오를 것이다. 너희 아버지의 영이 필요한 말을 주실 것이다. (MSG)


1. 세상이란?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자신을 향해 원하는 것을 뭐든지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정을 봐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세상은 냉철한 곳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간과 더불어 따뜻함과 행복함이 있던 곳입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세상은 가시덤불로 뒤덮힌 곳과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가시덤불을 제거하기 위해 눈물을 뿌려야 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이 가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직장을 내려 놓고 외국에서 훈련받은 뒤 한국에 들어왔는데, 모 기독교 학교에서 제 아내가 면접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신대원에 다닌다니 그 기독교 학교에서 한 면접관이 그러면 사역자의 부인이니 기도나 하지 뭐하러 취직하려고 하느냐? 그런 멘트를 늘어 놓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솔직히 제 마음 속에 분노가 나왔습니다. 그게 기독교 학교에서 할 소리인가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세상이라고 말하는 이런 개념, 적대적인 것은 비단 예수 안 믿는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세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우리는 그런 사람들, 그런 가치관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비판에 비난에 시달려도 꿋꿋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우리 삶 가운데 들어와서 역사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꼭 맞는 말이 떠오를 것이다!
 이 말은 참 마음의 위로가 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나 찬양인도를 할 때, 또는 어떤 모임에서나 한 가지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통해 어떤 말씀을 들려주시길 원하십니까? 주님이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기도를 하고 모든 것들을 준비합니다. 때로 잊어버리고 안 할 때도 있지만, 의도적으로라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모든 말들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분께 주도권을 드리는 것이 모든 생활 가운데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마다 꼭 맞는 말씀이 떠올라 저에게도 힘이 되며 듣는 사람들에게도 힘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고... 그분의 지혜는 무궁하며 그분의 생각은 한량없으십니다. 그분께 집중하는 것 평생 마음에 지키고 따라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Recent posts